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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상징, 故 박철수 감독을 추모합니다

음주운전자에 치어 사망한 박철수 감독은 누구인가? 혁신과 새로움으로 읽히는 작가주의, 박철수의 이름으로 독보적이고 혁신적인 박철수 감독의 작품 세계 추모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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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에 데뷔하여, 80년대에는 혁신적인 여성영화를, 90년대에는 독립영화를, 21세기에는 디지털 영화와 저예산 영화의 다양한 변주를 통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는 그였기에,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믿을 수 없는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그는 과거에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지만, 미래에 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낼 거의 유일하게 현역에서 활동 중인 60대 중견 감독이었기에 아쉬움은 더욱 크다.


<베드 B.E.D>

<베드 B.E.D>는 ‘인생이 침대에서 시작되고, 침대에서 끝난다’는 오프닝의 문구처럼 침대를 중심으로 B.E.D 세 사람의 섹스와 그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영화였다. 젊은 감독들도 좀처럼 시도하지 않는 도발과 실험으로 가득한 이 영화를 연출한 사람은 60대 감독 박철수였다. 최근 화제를 이끌만한 흥행작이 없기에 21세기 젊은 관객들에게는 낯선 이름일 수도 있지만, 80~90년대 영화계에서 박철수라는 이름은 언제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한 고정관념을 깨는 혁신적인 이름이었다. 아쉽게도 박철수 감독은 영화 <베드 B.E.D>를 통해 관객을 여전히 ‘도발’하지만, 60대 감독의 자유분방한 연출 방식에 관객들은 쉽게 동화되진 않았다. 영화 자체보다 시상식 드레스로 더 주목받았던 배우 오인혜가 주인공을 맡았던 전작 <붉은 바캉스 검은 웨딩>역시 섹스와 삶의 여러 측면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관계를 탐구하는 영화였지만, 섹스도 형식도 그 묘사의 방법도 결코 대중적이지 않았다.


<붉은 바캉스 검은 웨딩>

“영화적 엄숙주의, 영화적 형식주의를 깨뜨릴 수 있을까?”라는 문구로 <붉은 바캉스 검은 웨딩>은 마무리되는데, 그의 최근 작품들이 이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해답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박철수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이 같은 질문을 던진 후 자신을 돌아보고 뒤척거리면서 그 해답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그런 사유와 여행의 시간들 속에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영화를 만드는 자신의 행위를 멈추지 않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담겨 있다. 3월과 5월에 순차적으로 개봉을 앞두고 있었던 <생생활활>과 후반작업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작이 되고 만 <러브 컨셉추얼리> 역시 섹스를 중심으로 엮인 사람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성찰하는 저예산 독립영화였다. 박철수 감독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없는 세 가지는 스타, 자본,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한 것처럼 없음(無)을 통해 늘 새로운 화두를 현실에 끄집어내는 감독의 뚝심은 늘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드는 믿음직스러운 것이었다. 70년대에 데뷔하여, 80년대에는 혁신적인 여성영화를, 90년대에는 독립영화를, 21세기에는 디지털 영화와 저예산 영화의 다양한 변주를 통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는 그였기에,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믿을 수 없는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그는 과거에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지만, 미래에 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낼 거의 유일하게 현역에서 활동 중인 60대 중견 감독이었기에 아쉬움은 더욱 크다.


박철수 감독의 ‘처음’



<에미>

박철수 감독을 설명하려면 ‘처음’이란 수식어를 꽤 많이 붙여야 한다. 그만큼 평생을 영화를 위해서 헌신했고, 또한 급변하는 영화적 혁신에 대응하면서 나름의 생존법을 터득하면서, 자신의 커리어를 늘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1979년 가족영화 <골목대장>으로 데뷔한 박철수를 처음으로 기억하게 만든 영화는 1985년 <에미>였다. 인신매매 당한 후 자살한 딸의 복수를 위해 나선 어미의 처절하고 슬픈 이야기는 당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순종과 희생의 이름으로 불리던 어미가 복수의 화신이 되어, 세상 남자들을 향해 칼날을 휘두르는 이 영화가 2012년 성폭행 희생자 엄마의 눈물겨운 복수극 <돈 크라이 마미>보다 27년이나 앞서 제작되었다는 점은 박철수 감독이 우리사회 속에서 억압받는 약자로서의 여성을 대변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선구자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박철수 감독은 자신만의 일을 꿈꾸며, 집에서 가출하고, 이혼을 감행하며, 남자보다 여성 연대를 선택하는 여자 주인공들을 내세워 당시 <애마부인>류의 성애 영화가 중심이었던 80년대 영화계에 ‘여성 영화’라는 생소한 장르를 끌어들인다. 1987년 <안개기둥>은 이혼 앞에 당당한 여성의 독립을 이야기하는 영화였고, 1989년 여성의 섹스와 독립을 이야기하는 <오늘 여자>에 이어 1990년 <물위를 걷는 여자>까지 박철수 감독은 가부장제도의 틀 안에서 새롭게 눈뜨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렸다.


<301 302>


<학생부군신위>

1990년대 중반부터 영화계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자본과 스타 마케팅의 과열되었고, 영화 제작사들이 자본주의와 상업적 시스템에 유연한 젊은 감독들을 선호하면서 독자적인 영화세계를 추구하던 중견감독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이에 박철수 감독은 1995년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박철수 필름을 설립하고 작가의 실험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저예산 영화 촬영에 앞장서서, 감독이 창작의 주체가 되는 영화 만들기에 주력했다. 지금도 박철수 감독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301 302>는 그런 그의 영화적 변신을 알리는 첫 작품이었고, 전 세계 시장에 배급된 최초의 한국영화였다. 301호 대식증에 걸린 여자 송희와 302호 거식증에 걸린 여자 윤희 사이의 성욕과 식욕을 통해 ‘여성’을 말하는 <301 302>는 갈등하던 두 여자가 정신적 교감을 얻어가고, 급기야 자신을 음식재료로 써주길 제안하는 윤희를 식재료로 만든다는 충격적인 소재와 혁신적인 이야기 구조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박철수 필름의 두 번째 영화는 1996년 <학생부군신위>였다. 박철수 감독 자신이 주인공을 맡은 이 영화를 통해 그는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의 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에 맞닿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봉자>

거대 자본에 휘둘리지 않는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박철수 감독은 생존과 작품 두 가지를 동시에 선택했다. 김기덕, 홍상수 보다 앞서 저예산, 초스피드로 영화를 찍는 방법을 열고 그 가능성을 가장 먼저 입증한 것은 박철수 감독이었다. 제작의 경제성과 효율성, 자신의 영화사를 가진 그만의 장점으로 21세기에도 60대에도 영화를 계속 찍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중견감독이었다. 21세기 영화 제작환경이 급변하는 시기, 박철수 감독은 <봉자>를 통해서 혁신적인 실험에 앞장선다.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고, 감독 특유의 작가주의가 평론가들과 소통하지 못했기에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봉자>는 극장에서 개봉된 우리나라 최초의 디지털 장편 영화였다. 이혼과 누드를 담은 성생활 고백서의 출간으로 화제가 되었던 서갑숙이 주인공을 맡은 이 영화는 미천한 삶을 살아가는 두 여성의 위안을 담아낸다.


<녹색의자>

박철수 아카데미를 만들어 운영하는 등 그는 후학 양성을 위해서도 노력했지만 2004년 <녹색의자>를 만들기 위해서 4년의 시간이 걸렸고, 더 이상 박철수 필름은 없었다. 대신에 이전 작품들에 비해 예산이 넉넉한 편이었던 <녹색의자>는 당시 큰 물의를 빚었던 19세 고교생 제자와 31세 선생의 파격적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이 영화는 이제까지 박철수 감독이 지속적으로 던졌던 고착된 이데올로기와 그 감수성에 대한 도발적 시선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중년 남성과 소녀의 사랑에만 익숙한 관객들에게, 중년 여성과 소년의 사랑은 어딘지 낯설고 껄끄럽다. 이런 이데올로기를 비틀어대는 박철수의 도발적이고 유쾌한 환상극은 선댄스 영화제에도 출품되었다. 다양한 층위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던 그의 작품이 남녀 간의 섹스를 중심으로 다소 고정된 것도 <녹색의자>로부터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붉은 바캉스 검은 웨딩><베드 B.E.D>는 ‘섹스’를 소재로 한 실험영화로 그의 전작들 중에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섹스의 농도나 그 표현방법에 있어서 가장 노골적인 작품들이다. 박철수 감독 역시 그의 최근 작품이 섹스를 중심으로 한 저예산 영화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것을 원하는 관객의 욕구가 다양해지고, 소화 매체 또한 더 많아지면 소재와 주제의 다양성이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렇게 박철수 감독은 저예산 영화의 한계 속에서 소재와 방법의 층위를 넓혀가는 중이었다. <러브 컨셉추얼리>의 개봉 이후에 그는 성폭행 피해 여성의 복수를 그린 <메데이아>, 한 여인과 늙은 전 남편과 젊은 현재의 남편의 기묘한 동거를 통해 가족의 해체와 복원을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모든 것>, 다양한 인종의 식생활과 일상을 통해 사람의 본능과 본질을 조명하는 <스시바 인 LA>, 남북분단과 동북아 문제를 다룬 영화 <중조우의교> 등의 작품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러브 컨셉추얼리>가 <녹색의자>의 후속 이야기라는 점을 되짚어 보면 그가 준비하고 있었던 영화는 80년대의 <에미>, 90년대의 <가족시네마>, <301 302>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전언처럼 제작이 되었다면 소재와 주제가 한층 넓어지고 작품의 층위도 깊어졌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독보적이고 혁신적인 감독의 차기작을 더 이상은 볼 수 없다는 사실은, 그것도 음주운전자의 어이없는 실수 때문이란 사실은 두고 생각해도 분하고 아쉬운 일이다. 우리는 아직 충분히 박철수 감독의 작품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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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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