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사이에서 술 한 병 놓고 홀로 마시다가… - 이백과 두보
[동양고전 특강] 바퀴가 두 개 있을 때 수레는 안전하게 굴러간다 한시로 조화로운 질서를 꿈꾸다
두보와 이백은 많은 부분이 달랐다. 하지만 한시에서 짝수와 홀수의 배열을 맞추듯, 혹은 평성과 측성의 배합을 신경 쓰듯, 서로 다른 것이 조화를 이루는 건 중요하다. 변화가 있어야만 조화로울 수 있다. 두보와 이백이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천재가 한 시대에 공존하고 있었다는 건, 그 자체로 음양의 조화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첫 번째는 시경이었다. 마지막은 이백과 두보였다. [동양고전, 2012년을 말하다]는 시로 시작해서 시로 끝났다. 이 날은 본격적인 강연에 앞서 가야금의 거장 황병기의 공연이 있었다. 성공적인 종강을 축하하는 행사였다. 황병기가 연주한 곡은 침향무였다. 한국 국악의 전통은 대부분이 조선 시대의 유산이다. 하지만 황병기는 그 틀을 깨고 싶었다. 그리하여 전통 음악의 원류인 신라 시대로 돌아가서 쓴 곡이 바로 침향무다. 침향무는 네덜란드에서 초연한 이후, 그가 작곡한 곡 중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
침향무 연주가 끝나고 황병기는 고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보았다. 황병기는 논어를 애독한다. 다만 논어에는 불필요한 문장이 너무 많기에 좋은 문장만을 추려내었다. 이렇게 선택한 100여 문장을 늘 가슴에 품고 다니며 암송한다.
“논어에 보면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원래 공부는 재미있는 겁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공부라는 말을 들으면 학교 공부를 떠올리고, 그래서 공부를 싫어합니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는 기본적으로 비교하는 공부입니다. 주변 사람과 누가 더 잘하나 비교를 하기 때문에 공부할 맛이 뚝 떨어져 버립니다. 불역열호?(不亦說乎?)는 즐겁지 아니한가? 라는 뜻입니다. 이게 바로 논어의 문법입니다. 확정된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반문을 합니다. 논어에는 평범한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우러납니다.”
황병기의 이야기가 끝나고 연제호의 장구 독주가 이어졌다. 뒤이어 이영주 서울대학교 중문과 교수가 등장하며 본격적인 강연을 시작했다.
한시는 단순한 문학작품이 아니다
이영주는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를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시에는 중국인의 사상은 물론이요, 중국 문화의 전반적인 흐름이 담겨있다. 중국의 고대 시가 담겨있는 시경은 중국 문화의 원류이며, 고대 중국에 대한 연구 또한 시경에서 시작된다. 시경을 통해서 그 시대의 생활상을 짐작해 보는 셈이다. 시경에 실린 시는 대부분 사언시의 형식이다. 한나라 시대에 와서는 오언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때만 하더라도 구체적인 규칙 없이 자유롭게 시를 지었다.
이후로 시인들은 어떻게 하면 이상적인 시의 모습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한다. 오랜 고민 끝에 당나라 무렵에는 한시의 형식이 구체화되기 시작, 소위 말하는 칠언율시가 두보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시인이 다양한 시도를 했으나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결국 당나라 시기에 확립된 형식이 청나라 때까지 유행한다.
이쯤에서 한시의 형식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한시에는 크게 4가지 형식이 존재한다. 바로 오언절구, 오언율시, 칠언절구, 칠언율시다. 앞에서 설명하는 오언 혹은 칠언은 한 구(= 한 줄)에 사용된 한자의 숫자를 뜻한다. 오언이면 다섯 개의 한자가 쓰이고, 칠언이면 일곱 개의 한자가 쓰인다. 절구와 율시는 총 몇 개의 구가 사용되었는지를 말해준다. 절구는 네 개의 구로 이루어지고 율시는 여덟 개의 구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단순히 글자 수의 제약만 있다면 한시 쓰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는 아마 없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제약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성조다. 중국어에는 평성(平聲), 상성(上聲), 거성(去聲), 입성(立聲) 4성이 있다. 이 중에서 평성은 소리가 평평하게 난다는 의미로 평성이라 부르고, 나머지 세 가지 성조는 소리의 변화가 있기 때문에 측성(仄聲)이라 부른다. 시인은 한시를 지을 때 이 성조의 조합을 고려했다. 어떻게 하면 보다 율동감을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한 셈이다. 그렇다면 성조가 어떻게 배열되어야 이상적인 한시의 형태가 될까? 오언절구로 예를 들어보자. 이처럼 평성과 측성이 번갈아 나오면서 조화를 이루는 시가 이상적이다. 결국 시를 지을 때에 시의 내용은 물론이고, 글자수와 성조까지 고려해야 했다. 만약에 시의 내용에 어울리는 한자라 하더라도, 성조가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쓸 수 없다. 이쯤 되면 한시 쓰기는 시 쓰기가 아니라 퍼즐 맞추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영주는 이런 복잡한 규칙 속에 중국 문화 정신의 본질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한시 쓰기가 왜 이렇게 복잡해졌을까?
仄仄平平仄
平平仄仄平
平平平仄仄
仄仄仄平平
한시로 조화로운 질서를 꿈꾸다
공자는 시와 예절과 음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공자의 교육 철학은 시로써 올바른 마음을 일으키고, 예로써 바름을 확립한 다음, 음악으로 사람의 마음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공자의 사상에서 시예악은 한 몸과 같았다.
논어를 읽어보면 같은 질문을 해도 공자는 다르게 대답한다 그 이유는 공자가 질문하는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서 대답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해준 가장 높은 수준의 대답은 어디서 볼 수 있을까? 그의 제자 중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났다는 안회와의 문답에서 찾을 수 있다. 안회가 공자에게 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공자는 극기복례가 인(克己復禮爲仁) 이라고 대답했다. 극기복례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는 무엇일까? 이영주는 예란 바로 질서라고 말한다.
예, 질서는 중요하다. 하지만 질서만 있는 사회는 딱딱하다. 기본적으로 예는 지켜져야 하는 덕목이지만, 융통성도 갖춰야 한다. 이상적인 질서는 조화로운 질서다. 음악은 조화로운 질서를 가장 잘 보여준다.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합주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특정 파트, 이를테면 바이올린이나 첼로가 혼자 튈 수는 없다.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 자신의 음악을 연주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음악이 탄생한다. 시도 음악과 마찬가지다. 시예악은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시 또한 음악적인 이상을 추구하려 했다.
처음에는 사언시였다. 사언시를 네 줄로 쓰면 어떻게 될까? 완벽한 정사각형의 모습을 갖춘다. 이런 모습을 가지게 되면 질서는 있지만 변화는 힘들다. 여기서 살짝 변화를 주어 사언시가 아니라 오언시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오언시를 네 줄로 쓰면 균형감 있는 질서도 갖추면서 변화도 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한시를 쓰다 보니 오언절구는 너무 짧았다. 그리하여 오언시에서 칠언시로 변화한다. 추가적으로 일곱 글자로 한 줄을 쓰면 너무 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네 줄에서 여덟 줄로 늘어났다. 칠언율시의 탄생이다. 여기에 숫자가 가지는 이미지도 있다. 예로부터 홀수는 양을, 짝수는 음을 상징했다. 예를 들어, 네 글자를 제 줄 쓰면 음만 존재하지만, 다섯 글자를 네 줄 쓰면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한시에 자연의 조화를 담은 셈이다. 이영주는 한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양의 피타고라스는 숫자로 세계를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동양에서도 숫자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한시입니다. 단순히 술 한잔 마시고 읊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
石壕吏 석호의 관리 暮投石壕村 저물어 석호촌에 투숙하였는데 有吏夜捉人 한밤중 관리가 사람을 잡으러 왔네. 老翁踰墻走 영감은 담장 넘어 달아나고 老婦出門看 할멈이 나가서 문을 지키네. 吏呼一何怒 관리의 호령은 어찌 그리 사납고 婦啼一何苦 할멈의 울음소리는 어찌 그리 고통스럽던지. 聽婦前致詞 할멈이 나가서 하는 말을 들어보니 三男( )城戍 “세 아들이 모두 업성에 수자리 나갔는데 一男附書至 한 아들이 부쳐온 편지에 二男新戰死 두 아들은 최근 싸움에서 죽었답니다. 存者且偸生 남은 자는 그래도 구차하게 살아갈 수 있겠지만 死者長已矣 죽은 아들은 아주 끝난 것이지요. 室中更無人 집에는 다른 사람이라곤 없고 惟有乳下孫 오직 젖 먹는 손주 녀석 뿐 孫有母未去 손주가 있어 어미는 떠나지 못했지만 出入無完裙 나고 들 때 입을 마땅한 옷 한 벌 없으니 老軀力雖衰 늙은 이 몸 힘은 비록 쇠하였어도 請從吏夜歸 나으리를 따라 밤 도와 가기를 청하오니 急應河陽役 서둘러 하양의 부역에 응한다면 猶得備晨炊 그런대로 새벽밥은 지을 수 있을 거외다.” 夜久語聲絶 밤 깊어 말소리는 끊겼으나 如聞泣幽咽 숨 죽여 오열하는 소리 들리는 듯 天明登前途 날 밝아 길 떠날 적에는 獨如老翁別 오직 영감과 작별하였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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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村 강마을 淸江一曲抱村流 맑은 강 한 구비 마을을 안아 흐르고 長夏江村事事幽 긴 여름 강마을 일마다 그윽하다. 自去自來堂上燕 절로 가며 절로 오는 들보 위 제비 相親相近水中鷗 서로 친하며 서로 가까이하는 물 가운데 갈매기. 老妻畵紙爲碁局 늙은 아내는 종이를 그어 바둑판을 만들고 稚子敲針作釣鉤 어린 아이는 바늘을 두드려 낚시 바늘을 만든다. 多病所須唯藥物 다만 벗이 녹미를 보내 주면 徵軀此外更何求 보잘 것 없는 몸이 이 밖에 또 무섯을 구하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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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下獨酌達 四首 其一 아래서 홀로 술을 마시다 4수 제1수 花間一壺酒 꽃 사이에서 술 한 병 놓고 獨酌無相親 아는 이 아무도 없이 홀로 마시다가, 擧盃邀明月 잔을 들어 밝은 달을 청해오고 對影成三人 그림자를 마주하니 세 사람이 되었네. 月旣不解飮 달은 본디 술 마실 줄 모르고 影徒隨我身 그림자는 공연히 나만 따라하지만, 暫伴月將影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하여 行樂須及春 모름지기 이 봄을 즐기리. 我歌月徘徊 내가 노래하면 달은 서성이고 我舞影凌亂 내가 춤추면 그림자는 어지러이 움직이는데, 醒時同交歡 깨어 있을 때는 함께 즐기고 기뻐하지만 醉後各分散 취한 후에는 각각 흩어지겠지. 氷結無情遊 시름없는 무정한 교류 영원히 맺어 相期邈雲漢 아득한 은하수 너머에서 서로 기약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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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글을 쓰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