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 누드 그리려고 식민지에서 여성들과…
여행하는 인간, 먼 곳을 사랑하다 고갱이 발견한 남태평양의 롤리타
고갱은 파리를 떠나 수많은 미지의 도시들을 20년에 걸쳐 떠돌며 그림을 그렸다. 이런 삶을 위해 그는 소중한 것들을 많이 포기해야 했지만, 그 어떤 것도 자유롭게 떠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막지 못했다. 아마 페루인인 외조모의 피를 통해 흘러든 잉카인의 기질이 그로 하여금 원시적이고 이국적인 것을 사랑하게 해, 자신만의 세계에서 치열한 삶을 살게 했던 것은 아닐까?
폴 고갱은 태생 자체가 여행자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신변의 위협을 느꼈던 진보 성향의 언론인 부친과 가족을 따라 페루행 배에 몸을 실었다. 그 이후 고갱의 인생은 평생 여행으로 점철되었다. 1887년에는 파나마에서 마르티니크로, 1889년에는 퐁타방에서 르 풀뤼로, 그리고 1891년에는 타히티로 갔다. 고갱은 타히티에 도착한 지 채 1년도 안 돼서 마르케사스에 있는, 유럽인은 세 명밖에 살지 않는 도미니크 섬으로 가고 싶어 했다. 이런 그의 꿈들은 천천히 이루어졌다.
탈출에의 욕망과 극도의 원시적인 욕구는 고갱을 점점 돈이 들지 않는 곳으로 가게 만들었다. 그는 정말 돈 한 푼 없이 원주민처럼 자급자족하며 생활하기를 원했다. 고갱은 파리를 떠나 수많은 미지의 도시들을 20년에 걸쳐 떠돌며 그림을 그렸다. 이런 삶을 위해 그는 소중한 것들을 많이 포기해야 했지만, 그 어떤 것도 자유롭게 떠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막지 못했다. 아마 페루인인 외조모의 피를 통해 흘러든 잉카인의 기질이 그로 하여금 원시적이고 이국적인 것을 사랑하게 해, 자신만의 세계에서 치열한 삶을 살게 했던 것은 아닐까?
1891년 4월 1일, 고갱은 프랑스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으며 타히티의 관습과 풍경을 연구하고 그리기 위해 프랑스 교육부와 미술 부처의 서신들을 지니고 고국을 떠났다. 그는 이 프랑스 식민지에서 검소하게 살면서, 1887년부터 별거해온 아내 메테와 결혼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바랐다. 고갱의 이런 결정은 유럽의 각종 인류학 서적과 국제적인 식민지 전람회 등을 보고 고안한 ‘열대’라는 문화적 형식에 자신의 환상을 혼합시킨 결과물이다. 고갱의 환상은 식민지 국가의 백인 남성이 피식민지 유색인종 여성에게 갖는 선입견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선입견이란 보통 성적 판타지를 뜻한다. 식민지 국가의 백인 남성이 보기에 피식민지 국가의 원주민 여성은 성적 모험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완벽한 대상이었다. 프랑스 자국은 문명, 질서, 제약, 척박, 고통, 권태를 표상하는 반면, 남태평양의 원주민 문화는 자연, 야만, 혼돈, 풍요, 힘, 기쁨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원주민 여성들은 ‘자연 그대로의 여성’, ‘다산의 여성’ 등 성적이고 육감적인 것으로 표상된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그녀들은 자아의 상실, 의식의 상실, 의미의 상실을 표상하는 마녀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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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시각예술과 정신분석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뉴욕 대학교에서 예술행정전문가 과정을 수료했다. 수년간 미술잡지 기자와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현재는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를 운영하며 예술과 인문학을 통한 상상력과 창의력, 힐링과 멘토링에 관한 글쓰기, 상담, 특강 등을 기획ㆍ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예술가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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