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뿐하고도 당당한 걸음으로 무대에 오르는 자그마한 체구의 여가수. 조명이 켜지고, 간주가 흐름과 동시에 가수는 노래 속 주인공과 무서운 속도로 혼연일체 되기 시작한다. 호흡과 발성을 번갈며 풀어내는 멜로디들은 신비스러운 힘을 일으키며 동화를 그리고 드라마를 펼친다. 음악이라는 마법에 넋 잃은 관객들이 박정현을 ‘국민 요정’이라 칭한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박정현의 재조명을 <나는 가수다> 이야기를 빼놓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당시의 나가수 열풍은 곧 ‘박정현 열풍’으로 등식해도 지나치지 않았으니, 데뷔 13년 만의 대중적 탄성이라 할 만했다. 프로그램 내에서 그는 무게감과 친밀감을 함께 갖는 거의 유일한 가수였다. 중견 가수로서의 중량감과 프로적 면모를 지니면서도 서른 중반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소녀’라는 단어와도 어울렸다. 이 상반된 모습의 균형적 양립은 박정현을 더욱 매력적인 인물로 끌어올렸다.
화려하고 압도적인 절창으로 무대 위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는 디바지만, 일상에서 그의 음악은 다정한 속삭임처럼 가까이 닿는다. 노래는 여자의 마음 속 내밀한 한 구석을 고백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리움, 슬픔, 간절함, 그러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숨겨 둔 욕망들이 곰살궂은 말들을 타고서 혼잣말처럼 흐르고 터질 때 전이되는 정서는 여성들에게는 나대신 이야기해 주는 것 같은 공감을, 남성들에겐 마치 그 이야기를 내게 하는 것 같은 교감을 부른다.
박정현의 음악은 구김살이 없다. 여리고 애틋하면서도 열렬하고 꿋꿋하다. 어떤 상황이건 좀체 희망을 버리지도 않는다. ‘
믿어요 난 돌아올 그댈/ 믿어요 난 그 한가지/ 꿈꾸는 사람에게만 비로소 꿈은 이뤄진다는 걸(「믿어요」)’ 이별 후에도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올 거라는 기대를 진실로 움켜쥐거나, ‘
혹시 이게 꿈이란 걸 그대가 알게 하진 않을거야/ 내가 정말 잘할거야 그대 다른 생각 못하도록/ 그대 이젠 가지마요 그냥 여기서 나와 있어줘요(「꿈에」)’ 비록 꿈이더라도 아직 거두지 못한 지난 사랑을 최선을 다해 호소하는가 하면,
‘
곧 괜찮아지겠지 처음도 아닌데/ 조금만 참다보면 잊혀질 거야/ 나는 너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 이렇게 아픈데 넌 지금 어떤지(「생활의 발견」)’ 헤어짐을 어른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하고 ‘
혼자서 살아가는 삶도 괜찮아/ 사랑이 귀찮아질 때도 있잖아/ 아직도 달려가야 할 길 멀은데/ 내가 왜 이리 남자 없다 징징대야 해(「싱글 링」)’ 혼자라도 나는 잘 지낼 수 있다고 씩씩하게 믿는다. 열심히 소원하고 갈망하면서도, 노래 속 그는 꺾인 욕망 앞에 마냥 낙담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이러한 외유내강의 의지를 부드러운 강렬함으로 극대화시키는 건 특유의 밝은 음색이다. 어둠을 밝히는 한줌의 영롱한 빛을 닮은 목소리는 극복, 비상, 상승의 기운을 품은 노래들과 탁월한 궁합을 이룬다. 박정현의 몸을 통해서 재현된 조용필의 명곡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가 그랬듯, 그 결합물에는 듣는 이를 기분 좋게 하는 맑은 희열이 응축돼 있다. ‘그에게는 인간의 마음을 밝게 해 주는 명랑함이 있다’ 니체가 몽테뉴를 두고 했다는 이 말은 박정현의 음악을 표현하는 데 빌려 와도 온전히 들어맞다.
건강한 비관주의가 상실된, 거둘 줄 모르는 의지의 화염이 이따금씩 노래 속 인물들을 미치게 할 때도 있다. 찰스디킨스 소설
『위대한 유산』 속 인물을 그린 5집의 끝 곡 「하비샴의 왈츠」는 그 대표적 드라마다. 음색의 톤이 ‘섬뜩한 밝음’으로 재무장되면서 그려지는 그만의 비극적 문법은 삶의 시계가 결혼식날 아침 신랑에게 버림받은 순간에 멈춰진, 웨딩드레스를 벗지 않은 채 은둔해 살아가는 노파 미스 하비샴을 완벽하게 구현한다. 그의 의욕적 보이스는 처절한 슬픔을 무력한 어조나 휘발된 감성으로 전할 때보다 지나친 집착에 의한 광기로 표출할 때 비참함으로 돌변하며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노래에 저류하는 캔디적 태도는 자신의 긍정적인 성격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15년간 가수로서 박정현이 걸어온 길은 그의 음악만큼이나 열렬하고 꿋꿋했다. ‘파워풀한 가창력의 알앤비 여가수’ ‘소름 돋는 고음과 신들린 기교’ 등과 같은 타이틀로 수사되며 데뷔 때부터 가창력 하나만으로도 특별한 인정을 얻은 그였다. 그러나 자신은 노래 잘하는 가수로 머물기보다는 음악 잘하는 뮤지션이고 싶어 했다. 1집부터 묵묵히 곡을 써 오고 다양한 장르적 변신을 감행하며 그는 스스로를 가둔 타이틀과 조심스럽게 싸워 나갔다. 가요와 팝이 묘하게 크로스오버되어 있던 어법은 정석원, 황성제, 윤종신 등의 음악 파트너를 통해 박정현만의 가요로 구축됐다.
정석원과 협업한 4집은 「꿈에」를 1위곡으로 만들며 처음으로 대중적 성공을 안겼다. 타이틀곡 외에도 「상사병」, 「사랑이 올까요」, 「미장원에서」, 「이별하러 가는길」, 「생활의 발견」 등 거의 모든 곡들이 긴 시간 고르게 사랑받는 명반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성공작에 안주하지 않았다. 다음 앨범부터는 자신이 직접 프로듀서를 맡으며 앨범 전체를 지휘했고 자작곡의 비중도 넓혀 가며 아티스트로서의 역량을 갈고닦았다. 대중음악 시장의 침체와 맞물린 연이은 앨범 판매 부진도 그만의 맹렬한 음악적 돌진을 가로막진 못했다.
확대된 가능 세계만큼 구사하는 창법의 종류도, 표현해내는 감성의 폭도 전해 비해 넓어졌다. 음악 팬들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서로 다른 앨범들을 베스트로 꼽게 될 만큼 박정현의 음악적 궤적이 다채로움을 띄게 된 것이다. 나가수에 등장해 인기를 얻게 되기 전까지, 방송 카메라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지만 이 진화하는 가수를 음악 팬들은 꾸준히 주시했고 마음으로 품었으며 그 다음 음악을 기대했다. 그의 노래들은 시대를 뚫고서 끊임없이 불리고 들렸으며, 정기적으로 열어 온 콘서트도 대부분 매진 행진을 이었다.
무대 위에서 박정현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억눌림이 없다. 특정 상황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가사들을 소중하고도 정성스럽게 다루어 가며 비가시적 드라마를 지어 올리고, 그 별도된 세계 안에서 박정현은 아름다운 스토리텔러가 되어 넘치는 에너지로 자아를 발산한다. 이러한 내적 폭발성은 듣는 이에게 대리만족을 주면서 묘한 해방감과 황홀경을 맛보게 한다. 예술가에게 중요한 것이 어떤 환상을 창조해내는 데 있다면, 아티스트로서의 박정현은 제 역할을 무대 위에서 제법 잘 풀어내고 있는 셈이다.
현란한 표현법 때문에 장식적이라 여기기 쉽지만 박정현은 꾸밈없는 가수다. 그는 결코 시늉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느끼는 바를 감정의 흐름에 따라 순수하고 솔직하게 전달할 뿐이다. 온몸을 써가며 구사하는 테크닉적 터치는 기교를 위한 기교가 아니라 기침처럼 자연스러운 순간의 표출에 더 가깝다. 절제되지 않는 과잉적 에너지는 이따금 취향의 호불호를 부르기도 하지만 여과 없는 날것 그대로의 표현과 풍성한 접근, 이는 박정현의 음악을 박정현의 것으로 규정하게 하는 독자적 속성이자 파워다.
근작 앨범인 8집
< Parallax >의 타이틀곡 「미안해」에서 서른 중반의 그는 더 이상 끝난 사랑을 애걸하지 않았다. 이 독립적인 여성은 성장된 캔디이자 그 자신의 투영이었으며, 사회 속 달라진 여성상의 반영이었다. 이렇듯 박정현은 자신을 꼭 닮은 음악으로 스스로를 표현해 왔고 동시대의 여성을 대변해 왔다. 앞으로도 그 역할은 유효할 것이다. 어쩌면 더욱 중요해질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연금술로 자아의 신화를 써 오는 가수가 주는 귀감은 생각 이상으로 크고 찬연하기 때문이다.
글/ 윤은지 (theotherso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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