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친 아들을 손수 죽였다. 실수가 아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죽였다. 갑자기 왠 아침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냐고? 아니다. 엄연히 동양 고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동양 고전, 2012년을 말하다>의 아홉 번째 고전은 한중록이었다.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마음속에 담긴 한을 풀어 쓴 책이다. 한중록의 주요 내용은 시아버지(영조)가 지아비(사도세자)를 죽이는 이야기다. 참으로 패륜적인 상황이지만 호기심이 동한다. 어쩌다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을까? 서울대 정병설 교수와 사도세자 죽음의 궁금증을 풀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중록은 아직 고전이 아니다
“대학에서 <동양고전, 2012년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개설하면 폐강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겁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어떻게 모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한중록은 특별한 고전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중록은 고전이 아닙니다. 우선 고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한중록이 대중에게 알려진 건 60~7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한 중국인 학자는 한중록에 대해서 ‘한국에서 고전이 되려고 한다.’고 평가했습니다. 고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대중들에게 오랫동안 읽혀야 합니다. 또한 대중들에게 읽힐 만한 요소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과연 한중록이 그런 텍스트 일까요?
한중록에는 일반인들이 읽기에 좋은 내용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고전에는 어떤 말이 담겨있어야 합니까? 좋은 말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위로해주고 가다듬거나 윤리 도덕을 강화시키는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중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한중록에는 끓어오르는 욕망, 증오, 시기, 질투, 살인 등 인간 사의 온갖 부정적인 내용만 담겨 있습니다. 이런 한중록을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저는 한중록이 고전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삶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보여준 텍스트는 조선시대에도 없었고 현대에도 드뭅니다.”
거대한 권력의 실상은 베일에 싸여 있어서 일반인은 알기 어렵다. 지금은 매스미디어가 발달되어 알기 쉽지 않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보도 되는 내용이 전부는 아니기에 외부인이 모르는 무언가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임금이라는 절대 권력이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조선시대에는 아마 지금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그런데 베일에 싸인 권력의 실상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살인사건이나 가족 내부의 소송 문제 등 극단적인 문제가 외부로 알려졌을 때, 우리는 거대 권력의 실상을 알게 된다. 권력 내부에서 균열이 생길 때 외부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 틈이 생긴다. 정병설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사건이야 말로 조선 왕실의 내면과 거대 권력의 실상이 가장 잘 들어난 사건이라고 말한다. 정병설은 한중록은 영조가 사도세자가 죽인 과정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책이며, 그렇기에 권력의 이면과 권력의 실상을 아주 잘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사도 세자 죽음에 대한 두 가지 가설
일반적으로 권력 맛을 보면 사람이 완전히 변해버린다고 말한다. 그런 변화를 당연하게 여기더라도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행위가 이해되기란 어렵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미쳐서 죽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들이 미치면 죽여야 할까? 그보다는 좋은 곳으로 요양을 보내서 치료를 해야 함이 정상적인 생각 아닐까?
사도세자의 죽음은 일반인의 상식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상황이기에 많은 이들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의문이 생기면 속 시원하게 풀어주면 좋을 텐데, 조선 시대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조차 금기였다. 사도세자가 죽은 해는 모년(某年) 이라고 표현되었고, 사도세자가 갇혀 죽은 뒤주는 일물(一物)이라고 표현되었다. 이런 표현 자체도 목숨을 걸고 해야만 했다. 실제로 정조 시대의 한 신하는 뒤주를 목기(木器)라고 지칭했다가 죽고 말았다.
의문이 있으나 속 시원하게 해결이 되지 않으니 사람들은 가설을 세우기 시작한다. 정병설은 사도 세자 죽음에 대해서 설명하는 가설이 크게 두 가지라고 말한다. 하나는 사도세자가 미쳐서 죽였다. 즉, 사도세자 광증설로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의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사도세자는 어질고 좋은 세자였는데, 주변 노론들의 핍박으로 죽었다는 견해다. 소위 말하는 당쟁희생설로 정조가 쓴 현륭원행장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사도세자가 당쟁 때문에 죽었다고 많이 알려져 있다. 적지 않은 역사가들도 이런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정병설은 사도세자가 당쟁의 희생양이라는 견해보다는 미쳤다는 견해를 펼친다. 정병설은 현륭원행장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높이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쓴 글이기 때문에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성낙훈 선생은 정조는 명찰한 임금이니 현륭원행장은 믿고 시작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이은순 선생도 정조가 그래도 군왕인데 거짓말을 했겠냐고 말씀하십니다. 정조가 현륭원행장에 거짓을 쓰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결함이 있다고 쓸 수도 없습니다. 결국 굉장히 모호하게 씁니다.
사도세자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청소년기에는 칭찬이 많습니다. 그런데 텍스트에 쓰여진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아부가 90이고 사실이 10입니다.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전두환 대통령이 민주화 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 분의 말만 들으면 전두환 대통령은 퇴직 후에도 27만원만 가지고 아주 청렴한 생황을 한 대통령이 됩니다. 반대편이 칭찬하는 내용을 찾아봐야 합니다.
이덕일은 사도세자가 역사의 패자, 역사의 희생양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과연 사도세자가 역사의 패자일까요? 사도세자가 비록 죽기는 했지만, 역사의 패자는 아닙니다. 자기 아들이 되었는데 어떻게 역사의 패자가 됩니까? 실제로 조선 후대의 임금들은 전부 사도세자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니 사도세자를 높이는 견해를 펼치는 게 편했을 겁니다.”
정병설은 정조가 사도세자를 강제로 띄우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피해를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배제가 된 집안이 바로 혜경궁 홍씨의 집안이다. 정병설의 의견에 따르면 정조는 권력이 자기 자신에게 나와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그 결과 외척을 배척하려 했다. 자신의 외가를 반 사도세자 측에 끼워 넣은 셈이다. 하지만 혜경궁 홍씨는 억울했고, 아들이 펼치는 논리를 비판하기 위해서 한중록을 쓰게 되었다.
하지만 한중록은 오랫동안 사료로써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도세자가 미쳤다고 주장한 텍스트가 한중록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한중록이 노론의 입장에서 쓴 책이며 거짓된 주장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병설은 이런 통념에 대해서 강한 반론을 제기했다. 정병설은 한중록이 아니라 영조실록과 폐세자반교를 통해서 사도세자가 미쳤음을 설명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사도세자가 미쳤다고 주장하는 사료가 한중록 외에도 존재한다.
영조실록에 담겨있는 사도세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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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만들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처음에 효장세자가 죽으니 임금에게 오랫동안 후사가 없었다. 그러다 세자가 탄생했다. 세자는 타고난 성품이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했다. 그런데 열 살이 넘자 점차 학문을 게을리했고, 대리청정을 한 다음부터는 병이 생겨서 본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아서 신민들이 낫기를 바랐다. 1757년과 1758년 이후 병증이 더욱 심해져 병이 발작하면 내인과 환관을 죽였고, 죽인 후에는 바로 후회했다. 임금이 매번 엄히 꾸짖으니, 세자가 걱정스럽고 두려워 병이 더했다. 그러다가 임금이 거처를 경희궁으로 옮기자 임금과 세자, 두 분 사이가 멀어져 더욱 의심하면서 소통하지 않았다. 또 세자는 환관, 기생들과 절도 없이 놀면서 하루 세 차례 임금께 드리는 문안 인사도 전혀 하지 않았다. 세자가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다른 아들이 없었으므로, 임금은 나라를 위하여 매번 근심했다. 나경언이 고변한 이후부터 임금이 세자를 폐위하기로 결심했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불쑥 뜻밖의 말이 안에서 나오니 임금이 놀랐다. 이에 창덕궁에 나아가 선원전에 참배했다.
-「영조실록」 1762년 윤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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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는 졸기라 불리는 기록이 있다. 어떤 유명한 인물이 죽었을 때 간략하게 생애를 요약하고 평가하는 글을 쓴 것을 졸기라고 부른다. 사도세자에 대한 졸기도 영조실록에 존재한다. 정병설은 이를 근거로 사도세자가 미쳤음을 주장한다.
영조실록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건 사도세자가 공부를 싫어했다는 사실이다. 사도세자와 영조는 이 문제로 매번 부딪혔던 모양이다. 영조는 온갖 고생을 다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왕위에 오르면서 받은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그래서인지 영조는 사도세자를 곧장 세자의 자리에 앉혔다. 문제는 공부 안 하는 아들의 모습을 영조는 보기가 싫었다. 그래서 구박을 하기 시작했다. 전후 관계야 어찌 되었던 간에 영조실록에 적힌 대로 사도세자를 살펴보면 정상은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사도세자는 병이 심해지면 주변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병에 들고 어떤 병이 심해져야 주변 사람들을 죽이게 될까? 미쳤다는 표현은 없지만 영조실록은 사도세자가 미쳤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아들이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행위는 쉽사리 이해되기 어렵다. 영조의 본심이야 모르지만, 영조실록에 적힌 걸 보면 영조 또한 사도세자를 죽일 때 처음에는 주저한 모양이다. 하지만 ‘뜻밖의 말’이 안에서 나온 다음에 영조는 태도를 돌변하여 사도세자를 죽인다. 그렇다면 이 ‘뜻밖의 말’이 도대체 무엇일까? 구체적인 내용은 폐세자반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폐세자반교에 담겨있는 사도세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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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내관, 내인,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일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 형구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 것인데 한도 없이 갖다 썼습니다. 또 장번내관은 내쫓고 다만 어린 내관, 별감들과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가져온 재화를 그 놈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기생, 비구나와 주야로 음란한 일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제 하인을 불러 가두기까지 하였습니다. 근일은 잘못이 더욱 심하여 한번 아뢰고자 하나 모자의 은정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했습니다. 근일 궁궐 후원에다가 무덤을 담들어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을 묻고자 했으며, 하인에게 머리를 풀게 하고 날카로운 칼을 곁에 두고 불측한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지난번 제가 창덕궁에 갔을 때 몇 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겨우 제 몸의 화는 면했습니다만, 지금 비록 제 몸이야 돌아보지 않더라도 우러러 임금의 몸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지난번 어문 노처에서 기우제를 올릴 때 마음속으로 축원하기를 ‘임금이 무사하게 된다면 사흘 안에 비를 내려주시고, 패악한 아들이 뜻을 얻는다면 비를 내리지 마소서’했는데 과연 비가 내렸고, 이로부터 제 마음이 어느 정도 정해졌습니다. 지금 임금의 위험이 숨 쉴 사이에 있으니, 어찌 감히 제가 사사로운 모자에 정에 이끌려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폐세자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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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는 다음 임금이다. 임금 못지 않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자리이며 작은 임금으로 대접을 받았다. 작은 임금이라도 임금이니 함부로 죽일 수는 없다. 죽이기 위해서는 우선 세자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해야 한다. 그냥 마구잡이 식으로 세자의 자리에서 끌어 내릴 수는 없다. 나름의 절차가 필요한데 그 때 쓰여진 글이 폐세자반교이다. 이 폐세자반교는 영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정병설은 폐세자반교가 무척 중요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기록되지 않았다며, 이것은 의도적으로 삭제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영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폐세자반교가 실려있지 않지만, 워낙 전국적으로 많이 뿌려진 글이기 때문에 다른 서적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폐세자반교에는 사도세자가 죽은 이유가 영조실록보다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화자가 독특하다. 위에서 언급된 부분을 말한 이는 선희궁이다. 선희궁이 누구냐 하면 사도세자의 생모다. 폐세자반교에 따르면 선희궁은 사도세자가 자신을 몇 번 죽이려고 시도했으나 그것은 참았다. 하지만 영조를 죽이려는 시도를 하려고 하자 차마 지나칠 수 없어서 영조에게 고하게 된 것이다. 무엇을 고했을까? 영조실록에 적힌 ‘뜻밖의 말’이다. 정병설은 이를 사도세자를 죽여달라는 청원이라고 풀이한다. 미친 아들의 모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기에, 남편에게 자신의 아들을 죽여달라 요청한 것이다. 이쯤 되면 왜 ‘뜻밖의 말’인지, 어째서 영조실록에는 구체적인 내용을 쓰지 않았는지 짐작이 간다.
“세자가 그리하여 미쳐버렸습니다. 사료에서 이렇게 쓰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이 정도만 써도 쓴 사람의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표현을 읽어주어야 합니다.”
정병설은 영조실록과 폐세자반교를 바탕으로 사도세자가 미쳐서 죽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도세자 광증설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영조실록과 폐세자반교를 동시에 비판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병설의 의견에 따르면 사도세자가 미쳐서 죽은 것이 확실한데 왜 지금까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 오해가 있었을까? 정병설은 정조가 아버지를 미화하는 작업을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정병설의 의견에 따르면 당쟁희생설은 사료에는 없는 억측에 가까운 내용이며,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르는 구체적인 내용은 한중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정병설은 전후맥락을 알고 한중록을 읽으면 사도세자가 영조를 죽이고 싶어함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 뒤주였을까? 선희궁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다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서 죽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뒤주는 흉기로는 참으로 독특한 물건이다. 영조는 좀 더 평범한(?) 방법으로 사도세자를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독특한 방법을 사용해야만 했을까? 정병설은 이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주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이야기는 동서고금에 많습니다. 하지만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는 이야기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창의적인 발상입니다. 처음부터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려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세자에게 자진하라고 칼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신하가 말렸습니다. 그러자 사도세자가 돌에 머리를 박으려 했습니다. 또한 옆에 있는 신하가 말렸습니다. 신하들이 특별한 충성심이 있어서 말린 건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세자가 자결하는 걸 말리지 않으면 대역죄가 됩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 누구보다 열심히 말렸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누군가 뒤주라는 말을 꺼냈습니다. 처음 가져온 뒤주는 사도세자가 너무 뚱뚱하여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대에서 쓰는 뒤주를 가져왔습니다. 신하들은 안 말렸습니다. 설마 여기서 죽겠냐고 생각했습니다. 사도세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젠가는 꺼내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룻밤이 지나도 꺼내주지 않자, 사도세자는 뒤주에서 뛰쳐나옵니다. 이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붙잡아 뒤주에 다시 가두고, 뒤주에 망치질을 합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합니다. 그리고 사도세자가 죽을 때까지 옆에서 지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아들을 죽여달라 말한 선희궁은 어찌되었을까? 아무리 미친 자식이라지만 자식은 자식이다. 그런 자식을 죽여달라고 말하기가 쉽지는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선희궁은 사도세자가 죽고 2년 2개월 뒤에 죽는다. 이는 사도세자의 탈상이 끝난 직후이다. 각종 사료에는 선희궁이 가지고 있었던 오랜 질병 때문에 죽었다고 적혀있다. 한중록에는 마음의 병이 몸으로 옮겨갔다고 적혀있습니다. 하지만 정병설은 그런 기록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병설은 선희궁의 사인을 자살이라 주장한다.
“선희궁과 혜경궁 홍씨는 사이가 좋았습니다. 좋은 시어머니, 며느리 관계였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선희궁에게 자주 문안을 갔습니다. 만약 선희궁이 질병을 앓고 있었다면 병문안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선희궁이 죽기 직전까지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오히려 선희궁이 죽고 난 다음에 공황 상태에 빠진 혜경궁 홍씨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선희궁은 질병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 자살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중록은 고전이 될 수 있다.
한중록이 조선 시대의 절대 권력을 온전히 보여주는 텍스트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아주 극단적인 상황에서 볼 수 있는 절대 권력의 일면이다. 삼성가의 장남 이맹희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정상의 권력이 갖는 속성은 얼음장처럼 차다는 것이다. 그것은 냉혹하다.” 말했다. 애덤 스미스는 현명한 사람이라면 야심을 줄어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말을 보면 그저 야심 없이 조용히 사는 것이 최선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병설은
“여러분은 권력이 없으니 지금 행복한 겁니다.”라고 말하며 마무리하고 싶어하진 않았다. 정병설은 한중록은 무언가를 깨우치고 알려주는 텍스트는 아니지만, 한중록이 그리고 있는 세계를 보고 있으면 우리의 삶을 때때로는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고 말한다.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의 자취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 책. 그것만으로도 한중록은 고전이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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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록 혜경궁 홍씨 저/정병설 역 | 문학동네
어려서 궁궐에 들어가 조선 최고의 지존이 되었던 혜경궁이, 자신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을, 때로는 담담히, 때로는 격정적으로 회고하고 비판하며 분석한 글이다. 뒤주에 갇혀 죽은 남편 사도세자를 가슴에 묻고 첩첩한 아픔을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혜경궁 산문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책은 기획 기간만 5년일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한국고전문학 전집 시리즈 중 하나로, 고전의 이본들을 철저히 교감해 연구자를 위한 텍스트로 만들었을뿐 아니라 현대 독자들을 위해 살아 있는 요즘의 언어로 최대한 쉽게 풀어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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