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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속절없이 사라지는 존재라 해도, 반딧불이 밤하늘에 빛을 뿌리며 날아다니는 이유를 생각하면 서로 사랑했던 그 시절조차 부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세상에 없다고 해도, 모래 한 알에도 무궁한 우주가 들어 있다면 찰나와 같은 짧은 순간에도 영원한 시간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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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기꺼이 고통을 견디는 힘
-이용범, 『연애편지』
철없던 시절의 나는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희망 없는 사랑에 자신을 걸어본 적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전자가 슬픔과 고통 속에서 진짜 생을 맛봤다면, 후자는 세상의 절반밖에는 살아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섣불리 단정 짓기도 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희망 없는 천길 나락의 사랑에 하루하루를 내맡기고 눈물짓는 연인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불행하게 될 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 혹은 그녀와 함께 세상 끝까지 걸어가보는 것이다. 그 파란의 여행은 어쩌면 온 삶을 전부 걸어야 할 만큼 길고 긴 여정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을 하며 동시에 현명하고 계산적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연인들은 세상 바깥으로 단둘이 걸어 나가고 있다. 헐벗은 서로의 손을 꼭 맞잡은 채로.
하나 됨이 불가능한 아픈 사랑 이야기를 그린 이용범의 소설 『연애편지』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서막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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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사랑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의 위험을 알면서도 그곳에 쉽게 뛰어들지요. 사랑의 고통이 뿌리가 된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중략)……오직 누군가를 사랑할 때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만 사랑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랑을 만나기는 어렵지요. 그래서 사랑은 늘 실패와 고통 속에서 열매 맺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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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허락한다면 반드시 내 심리의 근간을 이루는 것들을 조목조목 분석해보고 싶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나는 이상하게도 허락되지 않은 사랑, 찢어지게 아프고 상처 입은 사랑, 비통하리만치 공허하고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사랑에 끌려왔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처럼 잘생긴 주인공 남녀가 알콩달콩 사랑을 속삭이다 결혼하여 애 낳고 완벽히 잘사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인생을 저렇게 심하게 왜곡해도 되는 걸까, 싶어서였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혼하고 십 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는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면 부러움에 앞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다시금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언제나 행복하기만 한 사랑’이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은 진실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사랑에 대한 대외적인 홍보로 보였다. 티끌만큼의 매혹도 느끼지 못함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 감성을 쥐어짜는 소설들은 언제나 ‘어떻게 저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읽는 이로 하여금 감정의 탈진 상태에 이르게 하는 아픈 사랑들이었다. 여기, 이용범의 소설
『연애편지』 역시 내 온몸의 세포들을 아프게 찌른 사랑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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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시작할 때는 언젠가 그를 미워하게 될 것이란 걸 염두에 두고, 누군가를 미워할 때는 언젠가 그를 다시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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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열여덟 살 소녀인 주인공 ‘나’가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외삼촌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문을 연다. 그런데 뜻밖에도 외삼촌의 집에서 언제 만났는지도 까마득한 삼촌의 양자가 훌쩍 자란 소년의 모습으로 ‘나’를 맞이한다. 그는 어느새 ‘아픈 손가락을 내보이지 마라.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아픈 손가락을 찌를 것이다. 고통을 하소연하지 마라. 악은 늘 약점이 있는 곳을 노리니까. 신중한 사람은 결코 자신이 입은 상처를 말하지 않고, 자신의 불행을 드러내지 않는다’ 따위의 잠언이 가득한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의대생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렇게 한 공간에 머물게 된 ‘나’와 그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상대의 가슴에 쌓인 아픔의 재를 불어주며 함께 어른이 되어간다. ‘나’에게 ‘인생이란 길 위에서 만나고, 길 위에서 머물다, 길 위에서 떠나는 것’임을 알려준 이도 그였으며, 경이로 가득 찬 매일의 시간을 선물해준 것도 그였다. 그렇게 ‘나’의 숨 막히는 가슴앓이는 시작된다. ‘나’는 곁에 잡아둘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를 기다리고, 바라보고, 눈물지으며 시든 꽃잎처럼 하루하루 메말라간다. 그러나 그런 ‘나’의 열병에는 아랑곳없이 그는 다른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계획하고, 일상을 영위해 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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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당신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렇듯 가슴 졸이는 목 메임도 그저 철없는 시절의 동경이라 믿었지요. 그리하여 언젠가는 우리에게 씌운 굴레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없는 당신에 대한 그리움도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중략)……사랑은 뜨겁고 격렬하긴 하지만 맹목적이고 경망스럽고 동요하기 쉬운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금세 타오르다가 꺼져버리는 열병 환자의 불길 같은 것이라 아무리 열정적인 사랑도 끝내 포만을 느낄 수 없는 욕망일 뿐이라고…….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전신을 고르게 휘감고 있는 온열(溫熱)이며, 견고하고도 매우 부드러운 열망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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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일까. 사랑은 뜨겁고 격렬하긴 하지만 맹목적이고 경망스럽고 동요하기 쉬운 것에 불과할까.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 한바탕 로맨스에 불과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란 아픈 사랑의 운명 속에 자신을 온통 내맡긴 이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인간이란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통틀어 유일하게 낭떠러지를 향해 스스로 발을 옮길 수 있는 족속인지도 모른다. 10미터 앞에 불구덩이가 있음을 알면서도 고통을 참고 돌진할 수 있는 이들. 그것이 바로 사랑이 위대하다는 가장 큰 증거다. 주어진 운명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사랑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감히 품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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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야말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중 가장 완전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의 씨앗이 움을 틔워 뿌리를 내리고, 제 몸을 스스로 길러내 꽃을 피우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중략)……나도 나무처럼 살고 싶었습니다.……(중략)……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남녀 사이라는 것은 결국 말없는 나무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한마디 말이 없어도 항상 의지하고, 마주 서서 바라보기만 해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진실한 사랑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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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무와 같은 마음으로 오래 그의 곁을 지킨다. 자갈밭이나 모래언덕, 혹은 바위틈 어느 곳에 내던져지든 아무런 불만 없이 살아가는 나무처럼, 스스로 뉘여 몸을 낮추고, 잎사귀를 길러 그늘을 만드는 나무처럼 말이다. 작가의 말처럼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중 나무만큼 완전한 존재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사랑 역시 그렇다. 언제나 한 자리에서 기댈 수 있는 기둥을 내어주며 따가운 햇살을 드리워주는 나무와 같은 사랑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다다라야 할 사랑의 마지막 모습인지도 모른다. 오랜 기다림의 세월 끝에 그도 마음을 열고 둘은 사랑을 시작한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알고 보니 그는 ‘나’의 배다른 형제였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이 사실을 끝내 숨기고 악역을 맡은 채 고요히 그의 곁을 떠난다. 삶의 아픈 비의(秘義)를 결국 혼자서 짊어지고 이별하는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사랑은 감미로운 꽃이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천 길 낭떠러지 끝에 올라가 그 꽃을 딸 만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그렇다. 어느 누구도 사랑이라는 꽃을 대신 꺾어서 내 앞에 들이밀어줄 수는 없다. 온몸에 상처가 나고 찢겨도 반드시 스스로 기어 올라가 꽃을 꺾어야만 한다.
너무나 드라마틱한 결말 탓에 약간 현실감이 부족했지만 이 책이 내 마음에 들어온 것은 주인공들의 강인함 때문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엇갈린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인간의 강한 의지. 그것이 나를 매혹했다.
진짜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운명이 엇갈려 이별하게 된다 해도 돌아서는 그 사람의 뒷모습에 축복의 언어들을 뿌려줄 수 있는 사랑. 그 사람의 곁에 머무르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힘겨울 때 한 걸음 내디딜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사랑.
깨어지지 않는 사랑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플로렌티노. 그는 어느 날 생을 뒤흔들 벼락같은 사랑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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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매력적이었으며, 보통 사람들과는 너무나 달라 보였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구두가 딱딱거리면서 돌길 위를 걸을 때 왜 아무도 자기처럼 정신을 잃지 않는지, 그녀의 베일에서 나오는 숨소리에 왜 아무도 가슴 설레지 않는지, 그녀의 땋은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거나 손이 공중으로 날아오를 때 왜 모든 사람들이 사랑에 미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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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송두리째 훔쳐갈 사랑이 시작되고, 그의 삶의 역사가 다시 펼쳐지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보는 순간 사랑에 미쳐버렸다지만, 그는 알고 있었을까? 이후 자신의 삶이 그 짧은 순간을 축으로 완전히 뒤바뀌어 나뉘게 된다는 사실을. 그렇게 플로렌티노는 콜레라보다 더 무서운 사랑의 질병으로 몸과 영혼을 완전히 빼앗긴다.
그러나 가진 것 없는 플로렌티노가 그녀, 페르미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담아 편지를 꾹꾹 눌러 쓰는 일뿐이었다. 플로렌티노는 수년에 걸쳐 그녀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그런 그의 사랑에 감격한 페르미나 역시 종래는 마음을 열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둘은 이별을 하게 된다. 이후 페르미나는 감정의 문을 걸어 잠그고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하는 의사와 결혼해 무미건조한 부르주아의 삶에 고요히 정착한다. 그러고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자가 결혼해 떠났으니 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을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이후 플로렌티노는 무려 51년 9개월 4일 동안 그녀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삶의 목표가 오로지 한 여자에게 집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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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때문에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예와 재산을 손에 넣었고, 그녀 때문에 건강을 유지했으며, 당시의 다른 남자들에게는 별로 남성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자기의 외모를 엄격히 관리했으며,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나 그 어느 것도 그토록 기다리지 못했을 정도로 한시도 절망하지 않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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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 이토록 치열하게 한 사람을 열망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정말 51년 9개월 4일 동안 매일 한 사람을 가슴에 품으며 살 수 있는 그런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느냔 말이다. 그는 ‘단 하루도 그녀를 기억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지나가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잊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믿고 싶다. 그런 사랑은 충분히 존재한다고. 인간의 마음이란 너무도 기기묘묘하고 변화무쌍하여 몸서리쳐지게 잔인하고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반면에 아무런 대가도 희망도 없는 기다림뿐인 사랑에 인생을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만큼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놀라운 수수께끼는 또 어디 있겠는가.
페르미나를 기다리는 반세기 동안 플로렌티노는 놀랍게도 육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600여명의 여자들과 정사를 나눈다. 실제로 이런 일이 가능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중남미 소설 에 가득한 마법과 환상성을 생각한다면 크게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중남미 소설 속에는 자주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마법의 가루 같은 것이 묻어 있으니까. 그럼에도 플로렌티노의 영혼은 페르미나 외의 다른 여인에게 머물기를 거부한다. 이 사랑은 마치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과도 같은 것으로 플로렌티노는 단순히 페르미나의 육체만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순수한 영혼을 찾고 있다. 책이 영화화되면서 주인공 플로렌티노 역을 맡았던 배우 바뎀은
“그런 의미에서 플로렌티노는 600명의 여인과의 접촉에도 불구하고 숫총각”이라고
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섹스란 사랑을 얻지 못했을 때 가지는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고.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 플로렌티노의 수많은 섹스는 사랑이 빠진 육체적 운동 혹은 체조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진정한 섹스는 마지막에 강 위를 운항하는 증기선 위에서 자신들의 마지막 방어와 허위의 상징인 옷을 훌훌 벗어던지는 장면으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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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이 (사랑의)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우리 생이 다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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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삶의 시작과 끝
왜 하필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었을까? 알다시피 콜레라는 19세기 초 세계 전역을 휩쓸며 한 시대와 대륙을 파멸로 이끈 치명적인 질환이었다. 그리고 주인공 플로렌티노에게 있어 사랑이란 콜레라보다 더 치명적이고 강렬한 삶의 시작과 끝이었다.
한 평론가는 이 소설이 위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플로렌티노의 숱한 육체적 사랑은 그저 작가의 설정이 아니다. 그 안에는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온갖 사랑의 형태들이 등장한다. 육체적인 관계가 없거나 그 관계만 있는 사랑, 지나친 소유욕 때문에 상대를 파멸시키는 사랑, 미성숙하거나 지나치게 성숙한 인격과의 사랑, 광기에 넘친 사랑,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지나쳐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진 사랑……. 이것은 남성 판타지가 아니라 수많은 사랑의 실례이다.
이렇듯 거장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단 한 편의 소설 속에 세상의 모든 사랑 이야기를 집어넣어 각자의 사랑을 돌아보고 고민할 수 있게 만들어놓았다. 당신에게 사랑은 무엇인가? 직업과 자동차와 은행 계좌처럼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일상적 도구일 뿐인가? 그게 아니라면 과연 사랑으로 인해 희망과 정열을 품고 스스로를 더 찬란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기억이 있는가?
당신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숨이 타들어갈 정도로 강렬히 열망했으나 소유했다고 안심하는 순간 불꽃이 꺼지는 일시적인 감정의 노름인가? 한 사람을 만나고 그리워하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살다가, 더불어 사랑과 탄생과 이별의 순간들을 맞이하다가 때론 심장을 흔드는 아찔한 이성의 유혹 앞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때론 내가 사랑한 그 사람의 모습을 외면하고 파괴하고 싶은 충동에 자책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그러다 일 년, 삼 년, 십 년이 흐르고 더 이상 감정을 계산할 수 없는 시간이 째깍째깍 흐르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같이 산 세월이나 자식 때문에 결혼을 유지한다고. 더 이상 그 사람 때문에 노여워하거나 아파하거나 감사하거나 희망을 품지 않고 덤덤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했던 사랑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스스로의 삶은 각자가 설계하듯이 스스로의 사랑 역시 각자의 손끝에서 나오는 것. 모두가 소금이 빠진 음식처럼 사랑을 한다 해서 자신 역시 지리멸렬한 사랑을 영위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사랑을 비웃고 그 가치를 땅에 떨어뜨린다 해서 내가 품고 있는 사랑의 가치마저 던져버릴 필요는 없다. 나는 언젠간 사랑 속에 나 자신을 전부 걸어보고 싶다. 먼 훗날 뒤돌아봤을 때 그 시간들이 오로지 공백이고 후퇴였다 해도 어쩌면 눈을 감을 때 후회하는 것은 사랑에 전부를 걸고 실패해 처절히 흐느낀 사람이 아니라 단 한 순간도 이 세상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다고 믿지 못한 사람일 것이기에.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사랑은 모든 문제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답변
-신경숙, 『깊은 슬픔』
모든 불행의 기원은 사랑의 상실일 것이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그것이 떠나가는 순간 우리는 긴긴 잠에서 깨어나 또 다른 눈으로 세상의 이면을 보게 된다. 심리학자들은 심지어 세상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사랑에 있다고 말한다. 모든 심리적 문제의 이유가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랑의 결핍, 사랑의 부재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 불능’ 진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거부당한 사랑의 경험, 무참히 등을 돌린 옛 연인의 뒷모습 같은 것들을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 그 상처들은 껴안을수록 심장을 깊숙이 찔러 상처를 내는 날카로운 가시 같은 것이어서 떨쳐내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떨쳐내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사랑이다. 에리히 프롬 역시 인간 존재의 문제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은 사랑뿐이라고 말했다. 사랑으로만 사랑을 치유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여기, 그 사랑의 아픔이 너무 커 도저히 치유가 불가능할 것 같은 남녀들이 있다. 신경숙의 소설 『깊은 슬픔』 속 주인공들이 바로 그들이다. 늘 그렇지만 나는 신경숙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마음가짐을 단단히 한다. 정적이 흐르는 어두운 방 안에서 텅 빈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그녀의 문체 때문이다. 읽는 내내 아프고 너무 아파서 머리가 무겁고 심장은 더 무겁다. 읽은 후의 후유증도 만만치 않다. 마라톤을 하고 난 뒤에도 한참이나 헉헉대는 숨을 골라야 하듯이 책을 덮은 뒤에도 한참 동안 차갑고 어두운 감정을 스스로 다스려야만 한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하게도 나는 그녀의 그 절망적이고 쓸쓸한 외침 속에서 희망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리고 차가운 현실과 사랑을 마주한 주인공들에게서 아직도 희망이, 사랑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사랑은 거대한 기다림
누군가에게 사랑은 시기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 스포츠 같은 것이고, 이별 역시 때가 되면 폐장하는 스키장처럼 찰나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무슨 거대담론인가. 그저 화학적 작용에 의해 몸과 마음을 쏟다가 약발이 떨어지면 서서히 무뎌져가는 것뿐이라 여기는 것이다. 반면 누군가에게 사랑은 일생을 건 모험이자 생의 목적일수도 있다.
제목부터 차가운 물줄기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소설 『깊은 슬픔』은 하나의 사랑에 생을 걸었던 한 여자의 이야기다. 언젠가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라는 질문을 받고서 ‘첫사랑을 끝까지 간직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는데 주인공 은서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은서와 완, 그리고 세. 이 세 사람은 고향 이슬어지에서 함께 자랐고 성장해 서울에 정착한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이들의 운명은 예견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완을 사랑하는 은서와 그런 은서를 사랑하는 세. 셋은 엇갈린 운명 앞에서 서로의 등만 바라보며 세월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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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되어버렸지. 어느 날 우연히 내 눈을 거울에 비춰보다가 언젠가 네가, 네 속눈썹을 세어봤는데 마흔두 개야, 했던 말이 생각나면 그 생각 하나로 세상을 다 얻은 듯이 살아가지. 그걸 세어볼 정도면 너는 틀림없이 나를 사랑한다 여겨지기에.
“난 그래. 그렇게 되어버렸어.”
난 그렇게 되어버렸지. 너에 의해 죽고 싶고 너에 의해 살고 싶게 되어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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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의 사랑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성이며 눈물지었다. 너무 아파서 울었고 너무 아름다워서 울었던 것 같다. 한 사람을 생의 중심축에 세워두고 그 사람에 의해 살고 싶고 죽고 싶어지는 여자의 내면에는 어떤 정열이 숨어 있는 것일까. 전화를 하겠다는 형식적인 말 한마디에 전화기 앞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고, 평생 자신을 기다리고 그리워한 여자에게 불현듯 나타나 다른 여자와의 결혼 소식을 알리는 남자. 그런 남자를 품고 사는 여자의 사랑을 어리석다고 손가락질만 할 수 있을까? 우리 중 과연 어느 누가 그렇게 온전히 사랑에 전부를 걸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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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렇게 힘들어?”
“구두 가게에 가선 구두 파냐고 물어보게 해. 미장원에 가서는 머리 자르냐고 묻게 하고.”
“그게 무슨 소리냐?”
“바보가 되어간다는 얘기지. 너에게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 그 이외에는 모두 공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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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했다. 엇갈리고 겹치고 자꾸만 어긋나는 운명. 아무리 사랑한다 외쳐도 돌아봐주지 않는 사람을 미워할 수 없는 자신을 미워하며 살아가는 은서의 그 영혼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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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를 지나는데 무슨 벽보에 사랑이란 서로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게 아깝지 않은 것, 이라고 써 있었지. 금방 너를 생각했어. 언제부턴가 내게 시간을 내주지 않는 너를. 그 풀칠이 덕지덕지한 벽보 앞에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얼마나 절망했는지. 매사가 이런 식이야. 나는 그렇게 되어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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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서 은서는 끊임없이 완을 기다린다. 밥을 짓고 그를 기다리고 아침에 눈을 떠 그를 기다린다. 기차역에서도 그를 기다리고 놀이터에서도 그를 기다린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기다리고 서성이는 은서를 보는 내 마음은 너무나 조급했다. 은서야, 제발. 은서야, 부탁이야. 은서야, 그러지 마. 외쳤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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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기다림만 배우면 반은 안 것이나 다름없다는데……. 그럴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뭔가를 기다리지. 받아들이기 위해서 죽음까지도 기다리지. 떠날 땐 돌아오기를, 오늘은 내일을, 넘어져서는 일어나기를. 그리고 나는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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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독한 사랑 앞에 통증을 느끼고 끝없이 매워지는 코끝을 감싸 쥐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믿고 있던 ‘현명한 사랑’의 가치들이 기우뚱 스러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사랑을 듣거나 읽을 때마다 나는 피식 웃어젖혔다. 마치 세상과 사랑에 정통한 조숙한 여자처럼 보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세상을 향해 “사랑? 그까짓 것에 목숨 거는 것처럼 구질구질하고 구차한 짓은 없어!”라고 외치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쳇, 어떻게 사랑이 안 변하냐” 쿨하게 외치고 멋있는 척을 해보고 싶었던 것도 같다. 많은 사람들처럼 한때 나도 사랑을 처참히 평가절하했다. 많은 사람들처럼 인생의 목적을 부나 명예나 권력이 아닌 사랑에 두는 사람들을 보며 코웃음 쳤다. 그런데 이 바보 같은 사랑 앞에서 펑펑 눈물을 쏟은 것은,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사실은 뿌리 깊이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아픈 깨달음 때문이다.
가끔 생각한다. 아직 채 여물지 않았던 학창시절에 선생님들이 우리들에게 ‘열심히 공부해야 성공한다. 죽어라 공부해라’라는 말 대신 이런 말들을 들려주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크게 달라졌을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너희들 중 삼분의 이는 언젠가 닥칠 사랑의 아픔에 생이 위태로워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죽음보다 더 아픈 연인과의 이별이나 심지어 이혼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 크나큰 고통과 분노와 절망을 경험하게 될 거다. 너희들 중 삼분의 일은 어쩌면 작은 사랑의 시련만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다고 결코 얕잡아봐선 안 돼. 그것 역시 많이 아플 거란다. 그 아픔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억지로 맞서 싸우려 하지 마라. 사랑의 아픔은 자연스러운 거란다. 그것은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워 꽁꽁 숨겨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 한 번 아팠다 해서 사랑에 다시 속지 않기 위해 사랑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길 바란다. 차라리 속으며 살아라. 속지 않으려 고뇌하고 부정하는 불행한 삶을 선택하는 어른들이 참으로 많단다. 아플 때는 생의 밑바닥까지 아파하고, 다시 일어나 새롭게 사랑해라.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랑을 의심하는 마음, 그것뿐이란다.
불행한 시절을 견딜 수 있는 사랑
『깊은 슬픔』의 앞장에 작가 신경숙은 다음과 같은 문구를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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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날, 세상에 당신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사랑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 이들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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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은 이들. 끝내 은서와 완과 세의 사랑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은서는 계속해서 괴로움에 한밤중에 홀로 잠이 깨다가 자신의 존재를 체념해버린 채 세상을 지워버린다. 그의 존재 자체가 너무 아름다워 살아갈 힘을 얻던 그녀에게, 그러나 이 사랑은 생을 마감시킬 사약 같은 것이다. “사랑해, 네 예측할 수 없음, 네 단호함, 네 조심성, 내 눈에 이제 너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어”라 속삭이던 은서의 아픈 고백이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그런 은서의 고백 앞에 완은 냉철히 이야기한다.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 사랑이란 말이 가능하기는 할까? 이 도시에서 누군가 한 사람을 죽도록 사랑하고 마음에 품고 살기에는 이미 늦은 것이 아닐까?
기억할 이가 없는, 그리움이 없는 곳이 바로 지옥이라고 했던가. 그 지옥 같은 완의 마음을 봐버린 은서는 피투성이 욕망에 몸을 맡긴 채 꽃잎이 아스라이 흩날리던 봄의 어느 날 단 한 번도 제 것인 적이 없었던 사랑을 놓아두고 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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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 이외의 다른 것에 닿으려 하지 말라. 오로지 너에게로 가는 일에 길을 내렴. 큰 길로 못 가면 작은 길로, 그것도 안 되면 그 밑으로라도 가서 너를 믿고 살거라.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며 살거라.
나, 그들을 만나 불행했다. 그러나 그 불행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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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의 마지막 고백들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잊혀지지 않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도 붙박이장처럼 오래 한 자리에 서 있었다. 한때 사랑은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투쟁하여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 여긴 적이 있었다. 그가 밤하늘의 별을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온몸에 생채기를 내며 저 하늘까지 기어 올라가야 그게 제대로 사랑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죽음을 각오하게 만들 정도의 사랑이라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결코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아닐 테니까. 피폐해지고 시들어가는 고난의 여정도 아닐 테니까. 암흑 속에서 스스로를 놓아버리고 싶어지게 하는 두려움도 고통도 아닐 테니까.
당신의 영혼에 수도 없이 따귀를 때리고 돌아서려는 순간 사랑한다 외치는 사람이 있는가? 아무리 닿으려 노력해도 멀어져만 가는 사람이 있는가? 그가 원한다면 때로는 가만히 손을 놓아주고 돌아서보자. 그게 진짜 사랑이었다면 그는 어떻게든 내 운명 속에 다시 들어올 테니. 사랑은 결국 원점으로 다시 돌아갈 테니.
가슴으로 뜨겁게 사랑하기를 누구보다도 갈망하지만 상대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희생할까 봐 지레 겁부터 먹고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는 수많은 현대인들. 그들의 그 어떤 비극적인 사랑보다 더 슬프고 참담한 사랑 앞에서 은서와 완, 세. 이 세 사람의 순애보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두드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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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언제나 내 편이었어 김애리 저 | 퍼플카우
작가 김애리는 ‘책’을 ‘내 편’으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마르케스, 카잔차키스에서 산도르 마라이……. 고전부터 근래의 베스트셀러까지 100여 권의 책들이 작가를 통해 방황의 터널을 먼저 지난 선배로, 나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로, 혹은 나보다 더 방황하고 있는 친구로 다시 태어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새로운 친구(책)를 소개받고, 잊고 지낸 친구(책)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김애리라는 청춘이 길어 올린 찬란한 ‘인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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