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미녀정신과의사의 소곤소곤
“야구, 타임아웃이 없는 시합의 재미를 가르쳐 드리지요.”
“(이대로…) 여름을 좋아합니다.”
아다치의 만화를 보며 생각한다. 인생의 아름다움은 첫키스를 하고 갑자원에 진출하는 열띤 순간들만이 아니라 그 사이사이, 숨돌리고 꿈꾸고 회상하고 혼자 미소짓는, 거기에 있는지도 몰라.
“야구가 어떻게 로맨틱하지 않을 수가 있어. (It’s hard not to be romantic about baseball.)”
영화 <머니볼>에서 빌리 빈 단장 역의 브래드 피트 오빠가 이 대사를 말했을 때,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었다. 그래, 야구는 정말 우아하고 감상적인 스포츠다.
유일하게 공이 아니라 사람이 들어와야 득점이 인정되는 종목, 복합적인 요소들로 거대한 심리전을 벌이는 게임, 푸른 잔디밭과 멋진 유니폼과 응원전, 밤하늘을 가르는 홈런볼을 보고 있자면 세상에 그 공과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마력… ‘야구는 왜 이렇게 매력적일까요?’ 라는 탄식에 대한 트친들의 대답마저 하나같이 로맨틱했다.
이렇다보니, 사춘기부터 간직해온 야구에의 애정의 근원을 그럴싸하게 설명해보다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고, 몇날 몇일을 말 그대로 낑낑대며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떠오른 것은, 생뚱맞게도 『터치』의 얄미운 감독대행이 타츠야가 준 갑자원 진출구를 손에 쥔 채 읊조리던 말.
“(이대로…) 여름을 좋아합니다.”
응? 여름? 여름이 왜? 야구가 왜? 아, 그렇구나…
나에게 야구는, 영원한 여름과 청춘의 스포츠였던 거다. 어쩌면 내가 낮술을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끝나지 않을 듯한, 영원히 지속될 듯한 여유와 충만감, 그리고 여백들.
야구는 팀 전체가 한꺼번에 나와 치고 달리는 경기가 아니다. 단체 경기이지만, 투수와 타자 한 사람 한 사람과의 대결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한 경기 안에도 수많은 작은 승부와 기회들이 있다. 투수가 던지는 하나하나의 공들, 수많은 타석들, 삼진, 안타, 홈런의 가능성들, 도루와 수비기회들, 득점 찬스들……. 이들이 모여 경기의 독특한 리듬과 흐름을 만들어낸다.
7회말 이사 만루, 볼카운트 쓰리볼 투스트라이크, 투수 와인드업. 투수가 팔을 올리고, 타자는 호흡을 가다듬고 공을 노려보고, 벤치도 관중도 중계석도 숨을 죽이고 그들을 주시한다. 투수가 볼을 뿌린다. 타자가 방망이를 힘껏 휘두른다. 네! 쳤습니다! 아~, 파울이네요. 다들 긴장을 풀며 살짝 한숨 돌린다. 이 틈을 타 3루쪽 외야석의 김영수 씨는 처음 야구장에 함께 온 애인의 뺨에 입을 맞춘다.
그렇다. 야구에는 많은 기회 사이마다, 그만큼 많은 쉼이 있다. 공과 공 사이, 타자 사이, 공수교대 사이, 이닝 사이, 경기 사이에. 혹자는 이 쓸모없는 시간들 때문에 야구가 지루하다고 하지만, 나는 야구의 로맨스는, 바로 이 여백에서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서정적인 여백, 하면 바로 떠오르는 작가가 『터치』와 『H2』의 아다치 미츠루다. 이른바 야구만화의 탈을 쓴 본격감성순정만화. 물론 그의 등장인물들도, 학원스포츠물의 주인공답게 함께 등교하고 대화를 나누고 시합을 하고 중간중간 키스도 한다. 그러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항상 별 것 아닌 장면들이다. 피칭연습을 하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볼 때, 늦은 밤 창 밖을 내다볼 때, 편지나 야구공을 바라볼 때, 그들은 상대의 얼굴을 떠올리거나 전날의 대화를 되새기며 중얼거리거나 미소 짓는다. 이 여백의 시공간과 마음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독자는 그들의 섬세한 감정에 젖어들고 추억에 빠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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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야구, 머니볼, 터치, H2,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늘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한, 밝고 다정한 정신과의사 안주연입니다. 우울증과 불안증, 중독을 주로 보고 삶, 사랑, 가족에 관심이 많아요. 책읽기와 글쓰기, 고양이와 듀공을 좋아합니다. http://twitter.com/mind_man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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