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환자를 보자마자 완벽한 진단 내리던 의사 - 아서 코난 도일 <셜록 홈즈, 1887~1927>

죽음마저 가뿐히 무시하고 화려하게 귀환한 이 명탐정의 정체는?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졸업 직후 코난 도일은 영국 포츠머스에서 의사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문학 애호가들에겐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환자들이 좀처럼 그를 찾지 않았다. 덕분에 대체로 한가했고, 낮에도 병원에서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렇게 집필한 몇몇 단편들이 성공을 거두자, 1886년에 드디어 운명적인 새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일단 장르는 추리소설로 정했고, 관건은 주인공이었다. 그에겐 어려운 사건을 척척 해결하는 매력적인 주인공이 필요했다.

조셉 벨 박사가 의대생으로 가득 찬 강의실 단상 위에 섰다. 뾰족한 콧날 위로 그의 눈이 짓궂게 반짝였다. 오늘은 학생들의 감각 활용능력을 시험해보기로 한 날이다. 그들을 위해 정체 모를 불결한 혼합액이 준비됐다. 형언할 수 없는 혼탁한 색과 고약한 냄새. 학생들은 맛과 냄새로 그 액체의 정체를 알아맞혀야 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하지만 벨은 공정한 사람이었다.

“나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학생들에게 요구하진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이걸 돌리기 전에 내가 먼저 맛을 보도록 하지요.”

그는 비커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가 꺼내어 혀에 대고 핥았다. 이로써 이 누런 액체가 비록 지독하게 쓰긴 해도 인체엔 아무런 해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잠시 후 학생들도 차례로 이 액체를 맛봤다. 다들 코를 쥐고 인상을 찌푸렸지만, 누구도 선뜻 액체의 정체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이윽고 벨이 선언했다.

“여러분 모두 실패했습니다.”

모두가 액체를 맛보고 냄새 맡는 데에만 정신이 팔린 탓이었다. 미각과 후각에만 집중하고 ‘시각’을 간과한 것이 그들의 패인이었다. 애초에 벨은 학생들을 속였다. 비커에 담근 손가락 대신 깨끗한 다른 손가락을 핥았던 것이다. 학생들 중 그 누구도 이 사소하지만 중요한 사실에 주목하지 않았다. 교수가 작은 손재주로 학생들의 눈을 속인 것은 바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강조했다.

“의사는 가장 사소해 보이는 단서까지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진단을 내릴 수 있으니까요.”

벨은 에든버러 대학교 교수이자 영국 왕립병원의 의사였다. 영국 의료계에서 그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가장 애매한 질병조차 정확히 짚어내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벨의 진료실로 들어간 환자들은 단 몇 분 만에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간파해버리는 의사의 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 번은 벨이 사복 차림의 한 환자를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물었다.

“전직 장교시군요. 최근에 해고당하셨죠? 스코틀랜드 고지의 육군 하사관 출신이시네요.”

여기까지의 추론도 모자라 그는 환자가 바베이도스에서 복무한 적이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언뜻 보면 그저 대충 어림짐작으로 말한 것이 운 좋게 맞아 떨어졌거나 어떤 속임수가 개입됐을 것 같지만, 실상은 아주 논리적인 사고과정의 결과물이었다. 벨이 밝힌 추론과정은 다음과 같다.

“모자를 벗지 않은 채 예를 갖추시더군요. 군대식이죠. 오래 전에 제대했다면 민간사회의 방식을 익히셨을 텐데, 제대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아직 몸에 익지 않은 거예요. 그리고 그분이 지닌 권위적인 분위기가 스코틀랜드 군인이란 사실을 여실히 드러냈고요. 마지막으로 바베이도스에 관한 것은, 상피병을 치료하려고 병원을 찾으셨기 때문이에요. 영국에선 상피병에 걸리지 않아요. 서인도 제도의 풍토병이거든요. 현재 스코틀랜드 육군이 바로 그곳에 주둔하고 있지요.”

흐릿한 문신 자국, 조금 특이한 발자국, 바지의 구김이나 닳은 흔적……. 이 모든 것이 벨에겐 타인의 삶에 숨은 비밀을 알려주는 특징적인 단서였다. 이러한 추론을 근거로, 그는 수많은 동료의사들을 쩔쩔매게 한 의학적 난제들을 척척 해결해냈다.



드라마 속 <셜록 홈즈>의 모습들

만약 오늘날 누군가가 벨을 만난다면, 그가 셜록 홈즈를 추앙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큰 키에 마른 몸매, 그리고 모난 성격. 마치 벨이 그 잘생긴 탐정을 똑같이 따라한 것 같지 않은가. 심지어 깊은 생각에 잠길 때면 의자에 기대어 앉아 양 손가락 끝을 맞대는 습관까지, 정말이지 벨은 홈즈와 똑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오히려 벨이 그 독특한 탐정의 원형이었던 것이다. 《셜록 홈즈》의 저자 아서 코난 도일은 언젠가 이렇게 밝혔다.

“이런 표현이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셜록 홈즈는 내 대학 시절 은사님의 문학적 화신(化身)이다. 에딘버러 대학교의 의과대 교수님이었던 그분은 환자 대기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곤 하셨다. (……) 교수님은 진료실에 환자가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진단을 내리셨다. 그 환자가 뭐라고 운을 떼기도 전에 말이다.”


코난 도일은 벨의 강의실로 걸어 들어간 순간에 이미 이 괴짜 교수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니 벨의 외래진료 보조원으로 뽑혔을 때 그가 얼마나 기뻤겠는가. 당시 벨의 나이는 40대 초반, 의사로서 한창 왕성하게 활약하는 시기였다. 코난 도일로선 존경하는 교수님의 독보적인 기술들을 강의실과 병원 두 곳에서 마음껏 관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아마 그는 틀에 박힌 의과대 공부보다 벨을 보조하는 일에 훨씬 더 열성적으로 임했을 것이다. 그러나 코난 도일이 그토록 열광했던 교수님을 소설 작품 속에 옮긴 것은 그로부터 거의 10년이나 흐른 뒤의 일이다.

졸업 직후 코난 도일은 영국 포츠머스에서 의사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문학 애호가들에겐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환자들이 좀처럼 그를 찾지 않았다. 덕분에 대체로 한가했고, 낮에도 병원에서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렇게 집필한 몇몇 단편들이 성공을 거두자, 1886년에 드디어 운명적인 새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일단 장르는 추리소설로 정했고, 관건은 주인공이었다. 그에겐 어려운 사건을 척척 해결하는 매력적인 주인공이 필요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바로 대학 시절의 옛 은사님이었다. 거의 초인적이라 할 만큼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력, 괴팍한 성격, 독특한 습관-모든 특징이 완벽했다.




이 젊은 의사는 3월 초부터 4월 말까지 열정적으로 셜록 홈즈 이야기를 썼다. 이렇게 완성된 중편소설 <주홍색 연구>는 1887년 《비튼의 크리스마스 연감Beeton’s Christmas Annual》에 실려 독자들에게 첫 선을 보였다. 코난 도일은 그 후로도 셜록 홈즈와 그의 동료 왓슨 박사가 주인공인 작품들을 써서 1891년 초부터 <스트랜드 매거진Strand Magazine>에 연재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독자들이 늘어날수록 코난 도일의 홈즈에 대한 열정은 시들해졌다. 인기에 부응하기 위해 쉴 새 없이 탐정 이야기를 쓰느라 ‘더 나은 것’에 집중할 틈이 없다고 느낀 것이다. 결국 그는 홈즈를 없애기로 마음먹고, <최후의 사건>에서 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했다. 1893년, 이 단편은 발표와 동시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홈즈 추종자들은 슬픔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실재하지도 않는 탐정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팔뚝에 검은색 띠를 두르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상실감을 느끼는 건 독자들의 몫일 뿐, 정작 작가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최후의 사건>을 탈고한 날, 그는 일기에 간단히 ‘홈즈를 죽였다.’고만 기록했다.



드라마<셜록(2010)> 中

그렇게 코난 도일은 홈즈에게서 벗어난 것 같았다. 이제야 비로소 더 나은 작품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지한 비소설부터 역사와 모험을 버무린 소설까지, 그는 그동안 미룰 수밖에 없었던 소재들을 마음껏 활용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들을 썼다.

하지만 홈즈는 역시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상대하기 가장 어려운 숙적, 즉 자신을 창조한 작가조차 능가할 정도로. 코난 도일은 결국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는 다시 펜을 들고 1901년부터 1927년까지 셜록 홈즈의 새로운 활약상을 꾸준히 발표했다. 이 명석하고 비범한 탐정은 <최후의 사건>에서의 죽음마저 가뿐히 무시하고 화려하게 귀환했다. 그의 전매특허인 파이프담배를 입에 물고 허연 연기를 뿜어내면서.






아서 코난 도일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 1859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났으며, 의대를 졸업하고 개업의로 일하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에드거 앨런 포와 에밀 가보리오를 동경하다가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인물인 셜록 홈즈를 탄생시켰다. 《셜록 홈즈》 연재물은 몇 번이나 중단되었지만 독자들의 성화 덕에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할 만큼 큰 인기를 얻었다.


img_book_bot.jpg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실리어 블루 존슨 저/신선해 역 | 지식채널

작가들의 문학적 영감에 대해 늘 궁금해하던 편집자 실리어 블루 존슨은 어느 날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소설의 첫 줄이 탄생하기 이전의 일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우아한 사교계 명사를 창조하기 위해 밟았던 과정을 직접 따라가면서, 그녀는 시대를 초월하여 사랑받는 문학작품을 품은 작가들의 반짝이는 영감을 캐내보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작가들의 공통점은…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실리어 블루 존슨

미국 뉴욕대학교에서 영미문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출판사 랜덤하우스와 그랜드 센트럴 퍼블리싱에서 편집자로 근무했다. 비영리 문예지 「슬라이스Slice」를 공동 설립, 운영하면서 수많은 베스트셀러 작가들과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평소 많은 작가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어떻게 문학적 영감을 얻고 아이디어를 글로 옮기는지에 관심이 많았던 존슨은 《댈러웨이 부인》, 《오만과 편견》, 《노인과 바다》, 《어린 왕자》 등 위대한 문학작품들의 흥미진진한 뒷이야기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을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에 오롯이 담아냈다. 현재는 유명 작가들의 독특한 글쓰기 기술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오늘의 책

트럼프의 귀환, 위기인가? 기회인가?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거머쥔 트럼프. 글로벌 무역 질서를 뒤흔들 트럼프 2기 정부의 명암과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국제 정세에 미칠 영향에 대해 설명하는 박종훈 저자의 신간이다. 강경한 슈퍼 트럼프의 시대에 직면한 대한민국이 어떠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지 그 전략을 제시한다.

이래도 안 읽으실 건가요

텍스트 힙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독서가 우리 삶에 필요해서다. 일본 뇌과학계 권위자가 뇌과학으로 입증하는 독서 예찬론. 책을 읽으면 뇌가 깨어난다. 집중력이 높아지고 이해력이 상승하며 즐겁기까지 하다. 책의 장르는 상관 없다. 어떤 책이든 일단 읽으면 삶이 윤택해진다.

죽음을 부르는 저주받은 소설

출간 즉시 “새로운 대표작”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 관련 영상을 제작하려 하면 재앙을 몰고 다니는, 저주받은 소설 『밤이 끝나는 곳』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등장인물들이 함께 떠난 크루즈 여행 중 숨겨진 진실과 사라진 작가의 그림자가 서서히 밝혀진다.

우리 아이 영어 공부, 이렇게만 하세요!

영어교육 전문가이자 유튜브 <교집합 스튜디오> 멘토 권태형 소장의 첫 영어 자녀 교육서. 다년간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초등 영어 교육의 현실과 아이들의 다양한 학습 성향에 맞는 영어 학습법을 제시한다. 학부모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지침과 실천 방안을 담았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