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보다 최대 30% 저렴한 ‘국민 할인마트’ 인기폭발 - 카를 알브레히트(Karl Albrecht)
235억 달러 ‘세계 10대 부자’ 형제 생사여부는 아무도 몰라 생사여부마저 베일에 싸인 독일 최고부자 탄광촌의 작은 식료품점이 ‘국민 마트’로…
1950~1960년대 형제가 부를 쌓아 점포를 늘릴 수 있었던 기반은 가난 덕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나 이탈리아 등에서 서독으로 이주해온 노동자 등 가난한 이들의 구매를 통해 형제는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알브레히트 가족들은 알디가 세계적인 할인마트 체인이 된 후에도 절대 부를 과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독일 최고의 부자는 어떤 사람일까? 독일의 대표 산업인 자동차나 전기전자 관련 인물을 떠올렸다면 틀렸다. 미국의 빌 게이츠 같은 IT 분야의 인물도, 인도나 한국처럼 재벌기업 총수도 아니다.
독일의 최고 갑부는 할인마트 체인 알디의 창업주 카를 알브레히트(Karl Albrecht, 1920년~ )다. 카를이 동생 테오 알브레히트(Theo Albrecht, 1922~2010년)와 함께 세운 알디는 독일의 ‘국민 할인마트’라고 보면 된다. 독일 만이 아니라 전 세계 20개국에 9,400여 개 점포가 진출해 있다. 「포브스」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235억 달러(약 27조 3,300억 원)에 달한다. 세계 열 번째 부자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를 억누르고 있는 장기 침체 속에서 초저가 전략을 채택한 알디가 전성기를 누리면서 카를의 순위는 매년 올라가고 있다.
탄광촌의 작은 식료품점이 ‘국민 마트’로
카를과 테오는 에센에서 태어났다. 형제의 어머니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탄광촌에 연 작은 식료품점이 알디의 시작이다. 2010년 동생 테오가 숨지기 전까지, 형제의 아버지는 탄광 노동자로 알려졌고 아직도 여러 매체에서 이들을 탄광 노동자의 아들로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테오의 아들인 카를2세가 「슈피겔」에 형제의 아버지는 사실 제과제빵사였다고 밝혔다. 형제의 아버지는 1913년부터 제과점을 운영했는데, 바로 이듬해 징병되면서 어머니 안나가 상점을 운영하게 되었다. 안나는 스타우텐베르크의 빵 공장에서 빵을 받아다 팔았는데, 이 업체는 현재도 알디에 빵을 납품하고 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46년, 형제는 어머니의 점포를 물려받았다. 형제는 그 작은 점포에서부터 ‘최저가’ 판매의 비결을 연구했다.
1950년대 들어서면서 독일에 냉장고가 도입되었다. 점포 수를 조금씩 늘려 가던 형제에게 냉장고는 너무나 고가의 상품이었다. 대신 점포마다 지하 저장고를 만들어 우유와 버터의 신선도를 최대한 유지했다. 여기에 그날의 수요를 정확히 예상해 공급했다. 비용을 줄이고 수요를 정확히 예측해 재고도 거의 제로(0)로 유지하는 이 같은 방식으로 알디는 경쟁사보다 훨씬 싼 값에 제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소비자들은 저가에 열광했고 1960년에는 점포가 300개까지 늘어났다. 이듬해 형제는 ‘알디(Aldi)’라는 상호를 내걸었다. 알디는 ‘알브레히트 디스카운트(Albrecht Discount)’의 줄임말이다.
상호에서 알 수 있듯 알디의 경쟁력은 대형마트보다도 15~30% 저렴한 가격에 있다. 카를은 “저렴한 가격이 알디의 광고”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철저한 비용절감 정책에서 비롯된다. 점포는 가능한 작게 만들고 직원도 최소 인원만 뽑는데다가 광고도 하지 않는다. 매장 내부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고 물건은 배달 온 상자 그대로 진열되어 있다. 가맹점 수수료를 절약하기 위해 신용카드는 받지 않고 종이봉투도 사용하지 않는다. 매장에 바코드 스캔방식이 도입된2000년 이전에는 일손을 줄이기 위해 상품에 가격표를 붙이지 않았다. 대신 점원이 모든 상품의 가격을 외워 계산기를 두드렸다.
가격은 최저, 품질은 최고
내셔널 브랜드(NB)를 취급하지 않고 98%를 알디 자체 상표(PB) 제품만으로 구성한 것도 초저가 전략의 비결이다. 예를 들어 알디 매장에는 ‘코카콜라’ 대신 ‘알디 콜라’가 있다. 세계적 식품회사인 네슬레도 자체 상표 제품이 아닌 PB제품을 제조해 납품한다. 물론 가격이 저렴한 만큼 제품에 약간의 차이는 있다. 예를 들어 NB 치즈는 7일 숙성한다면 PB 치즈는 6일 숙성하는 식이다. 하지만 실제 소비자들이 먹었을 때 품질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다.
대부분의 상품을 PB 상품으로 구성하다 보니 상품 종류를 다양하게 유지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올리브기름을 사려고 이마트에 갔다고 하자. 기름 코너에는 대부분의 식품회사가 내놓은 올리브기름이 진열되어 있다. 많은 올리브기름 중에서 소비자는 자기가 선호하는 브랜드를 고른다. 하지만 알디는 PB제품 하나 또는 PB와 NB제품 하나씩 정도만 두는 식으로 매장 내 상품 가짓수를 매우 적게 유지 한다. 월마트가 5만 가지 상품을 구비해 놓는 반면 알디에는 상품 수가 1,000여 개 밖에 없다. 전자제품도 마찬가지다. 디지털 카메라, 디지털 캠코더, 노트북 등 전자제품 역시 PB로 제조해 값싸게 판다.
하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는 PB에 대한 편견과 달리 알디의 제품은 품질도 매우 좋다. 이는 독일 정부가 매달 발행하는 공신력 있는 「제품 평가(www.test.de)」 보고서가 큰 영향을 미친다. 보고서는 알디의 PB제품이 세계적인 유명 브랜드 P&G나 유니레버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하고 있다. 「제품 평가」는 시중에 판매되기 하루 전에 독일 전역의 알디 매장에 배달된다. 보고서에서 품질기준에 못 미치는 것으로 평가받은 제품은 곧바로 매장에서 철수한다. 이 때문에 알디는 저소득층만 이용하는 매장이 아닌 부자들도 오는 독일의 ‘국민 마트’가 되었다.
물론 부작용도 따른다. 직원 수가 적다 보니 초과 근무가 빈번해 직원들은 불만을 제기한다. 또 알디의 확장에 소규모 소매점들의 설 자리가 줄고, 낙농업자들은 우유 가격 급락으로 생존을 위협받는다. 제3 세계에서 수입되는 싼 공산품들은 노동 착취의 결과물이라는 비판도 있다.
베일에 싸인 은둔형 경영자
형제는 1966년 회사를 둘로 분리했다. 독일 남부 지역은 형 카를이, 북부 지역은 동생 테오가 맡았다. 1970년대부터 시작한 해외 진출 때도 나라를 둘로 나눴다. 카를은 미국, 스위스, 호주 등지에, 테오는 프랑스, 스페인, 폴란드 등에 진출했다. 그렇다고 둘이 완전히 갈라선 건 아니었다. 법적으로는 두 회사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만, 운용 전략은 이사회에서 함께 짜고 물건도 함께 구매하고 있다.
독일인의 일상에서 알디가 거의 떼어 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된 반면, 형제는 철저하게 은둔생활을 해 왔다. 언론 등 공식석상에 나타난 적이 전혀 없고 사생활에 대해서도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사진조차 찾기 힘들다. 형제가 제대로 찍힌 사진은 파파라치가 찍은 것을 제외하고 1971년 것이 유일하다. 앞서 언급했던 “싼 값이 알디의 광고”라는 표현은 카를이 1953년에 한 말로, 공식석상에서 한 거의 유일한 말로 알려져 있다.
은둔에는 이유가 있다. 1950~1960년대 형제가 부를 쌓아 점포를 늘릴 수 있었던 기반은 가난 덕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나 이탈리아 등에서 서독으로 이주해온 노동자 등 가난한 이들의 구매를 통해 형제는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알브레히트 가족들은 알디가 세계적 할인마트 체인이 된 후에도 절대 부를 과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무엇보다 1971년 테오의 납치 사건은 그들의 은둔 성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당시 테오는 변호사에게 납치되어 몸값 467만 달러(약 54억 원)를 치르고 17일 만에 풀려났다.
형제는 1955년과 1957년에 에센시의 살기 좋은 구역에 저택을 세워 그 집에서 가족과 50년 이상 살았다. 하지만 세계 10위권 부자가 된 후에도 그곳 에서 검소하고 소박한 은둔생활을 계속 하고 있다. 「슈피겔」에 따르면 그 집의 좁은 복도에서 단단한 강철로 된 현관문까지는 5~6미터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대 부호의 저택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규모다.
2010년 7월 24일 동생 테오가 먼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장례식도 그들다웠다. 가족과 가까운 친구 서른 명이 참석한 가운데 복잡한 절차 없이 조용히 치렀고, 장례식이 다 끝난 후에야 회사 측이 테오의 사망을 발표했다.
「슈피겔」이 테오의 장례식과 관련해 보도한 내용을 보면, 그들이 심지어 ‘죽음’마저도 ‘알디식’으로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형제는 1997년 에센시의 한 시립공원 묘지에 있는 장지를 자신과 가족을 위해 구입했다. 하지만 형제는 한참 동안 묘지를 관리하지 않았다. 잡초가 너무 많이 자라자 묘지 관리 담당자가 형제에게 경고장을 보냈다. 「슈피겔」은 “그 뒤에야 알디의 트럭이 나타나 주목과 철쭉, 그리고 측백나무를 내려놓았다. 알브레히트 일가는 자기네 매장에서 묘목을 특가 판매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라고 전했다.
형제는 이 거대한 부를 어디에 사용할까? 「슈피겔」이 전한 카를2세의 말에 따르면, 알브레히트 일가는 그들이 가진 돈으로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크고 작은 분야를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돈을 받는 사람은 그 일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 비밀을 지키지 못하면 돈을 받을 수 없다. 일례로 형제의 고향 상트마르쿠스 구역에 살고 있는 한 병든 여성은 매달 1,000마르크를 지원받았지만, 이 사실은 그녀가 죽은 뒤에야 밝혀졌다. 브레드네이 지역에 있는 괴테학교의 새로운 건물은 거의 알브레히트 일가의 지원으로 지어졌다. 이밖에도 카를은 암 연구에 많은 돈을 기부하고 있다. 현재 카를2세는 아버지의 전기를 쓰고 있다고 한다. 이 전기가 발간되면 베일에 가려져 있던 알브레히트 형제의 삶이 드디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셈이다.
[ 부자 DNA ] ☞ 선택과 집중의 DNA 선택과 집중의 DNA 알디에는 ‘서비스’라는 개념이 없다. 물건은 찌그러진 박스에 담겨 진열되어 있고, 계산을 하려고 10분 넘게 줄을 서는 일은 다반사다. 물건의 종류도 품목 당 두세 가지가 전부다. 서비스를 최소화하고 다양한 상품의 구성을 포기하는 대 신 소품목을 최저가에 판매함으로써 ‘가격’과 ‘품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 시에 잡을 수 있었다. 실제로 슈퍼마켓에서 취급하는 품목의 4분의 1은 한 달간 한 개도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알디의 모든 전략은 가격과 품질, 이 두 가지로 소비자에게 최고의 만족을 주는데 최적화되어 있다. 누구보다 선택과 집중의 전략을 정확히 구사한 형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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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2009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경제부를 거쳐 지금은 사회부에서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를 담당하고 있다. 수개월 동안 많은 슈퍼 리치를 ‘뒷조사(?)’한 끝에 ‘가장 아름다운 부자’는 정직하게 부를 쌓아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까지 준 인도의 아짐 프렘지(Azim Premji)라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최진주>,<문향란>,<남보라> 공저14,4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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