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가 실종되면서 밝혀지는 비밀들
텅 빈 사각형의 무대. 바닥은 모눈종이 같이 구획되어 있다. 인물들은 마치 장기판 위의 말처럼, 체스판 위의 말처럼 일렬로, 혹은 외따로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조선 시대 궁중을 배경으로 하는 뮤지컬이지만, 인물들 외에는 어떤 소품도 배경도 없다. 최소화한 무대 장치 속에서 인물들은 동선과 연기만으로 보이지 않는 배경과 소품을 그렸다 지웠다 한다. 놀라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밤, 외로운 궁궐, 한밤중의 미스터리를 충분히 표현해낸다는 점이다. 빈 벽은 그대로 여백으로 작동해, 고전적인 분위기의 아름다움을 한껏 살려낸다.
어느 날 밤, 왕세자가 실종된다. 모두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 왕세자가 실종되던 시간에 나인 자숙이가 처소를 이탈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사건을 조사하던 최상궁은 그때 동국전 내관 구동이도 자리를 비워두었는데, 두 사람이 그 시간에 만난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용의자로 지목되어 취조를 당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숙이가 왕의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다는 어마어마한 비밀이 밝혀진다.
자숙은 갑작스럽게 신분상승을 하게 되고, 이에 질투심으로 달아오른 최상궁, 배신감에 사로잡힌 중전은 자숙과 구동 두 사람을 어떻게든 실종사건과 연관 지어 엄벌을 내리려고 한다. 이에 두 사람을 지키려는 왕의 갈등이 또 첨예하게 벌어진다. 제목은 왕세자 실종사건이지만, 왕세자가 실종되는 사건 때문에, 모든 갈등이 시작되고, 궁궐 내 숨겨져 있던 자숙이와 구동이의 기구한 사랑 이야기가 드러나게 된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감내하고 애써왔던 구동의 비밀, 그의 이야기가 밝혀진다.
사랑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사랑하기
구동과 자숙은 동네 친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자숙이 죽어야만 나올 수 있다는 궁에 불려 간다. 구동이는 좋아하는 자숙이의 뒤를 따를 방법을 고민하다가 내시가 되기로 한다. 거세까지 하고 궁궐에 들어갔지만, 구동은 사랑하는 자숙이가 왕의 간택을 받고 왕의 아이를 갖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다. 운명이다. 내시가 된 구동의 운명이고, 자숙을 사랑하는 그가 감당해야 하는 운명이다.
여기, 조선 시대라는 배경은 운명과 한계가 지배하는 세계다. 왕이라는 절대권력과 생물학적으로도 남자 역할을 할 수 없는 내시라는 계급이 구분된 궁은 그 정점에 있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명징하게 구분되어 있다. 사랑에 빠지는 일은 초자연적인 일이지만, 사랑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비극이 발생한다.
사랑을 이루려는, 혹은 사랑 가까이에 머물려는 구동이의 의지는 끊임없이 자신의 생을 단축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내놓으면서 자숙 곁에 머물고, 자숙이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그녀를 변호한다. 그게 구동이가 사랑을 지속해갈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어쩌면 이런 거대한 한계가 구동과 자숙의 순수한 사랑을 만들어낸다. 두 사람이 함께 뛰어넘어야 하는 한계가 크면 클수록 사랑은 더욱 순수해지고 순결해진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눈앞에 있어도 그리운 그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없고,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간신히 마련된 그 짧은 만남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할까. 서로 눈 마주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설렐까. 소위 뜨거운 사랑의 유통기한이 3개월이라는데 이런 ‘불가능한 세계’ 속에서는 그 3개월의 시간을 초 단위로, 분 단위로 나눠 쓰는 셈이다.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의 세계 역시 이런 이유로 순수해지고 지고지순해진다.)
장애물은 두 사람 밖에 있어야 한다
베로나의 원수 집안 커플 로미오와 줄리엣, 침몰하는 타이타닉에서 사랑에 빠진 잭과 로즈 등 순수한 사랑으로 기억되는 세기의 커플들의 사랑은 늘 엄청난 장애물 앞에서 만들어졌다. 이 장애물은 두 사람에게 비슷한 강도의 고난을 주고, 이 고난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사랑을 합쳐서 극복해나가야 한다.
두 사람 앞에 이런 장애와 고난이 없으면,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 사이에 고난이 생긴다. 구동이와 자숙이는 두 사람을 둘러싼 세계에 장애물이 많아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논하거나, 니가 더 사랑하니 내가 더 사랑하니 밀고 당길 시간조차 없다. 틈나는 대로 사랑한다.
누구든 자유롭게 만날 수 있고, 한계가 적은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순수한 사랑은 환상 속에나 존재한다. 자유민주주의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수많은 한계를 빚어내면서 사랑한다. 스스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기준과 한계를 설정하고, 그에 맞는 사람을 간택하느라 요즘엔 첫눈에 반하기도 어렵고, 첫눈에 씨인 콩깍지를 유지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우리는 조선시대보다 더 채워지기 어려운 사랑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지켜만 봐도 좋을, 구동이의 사랑을 그 가슴을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해볼 수 있을까? 사랑받는 자숙이도 부럽지만, 온 존재를 내걸고 사랑 하나만 보고 살아가는 구동이의 가슴이 더욱 위대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1분 1초 가슴 뛰며 연애하는 순수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 없는 장애물도 만들어 내야 하는 걸까?
『호모 에로스』의 고미숙 선생님은, 연인이라면 두 사람이 같이 공부하고, 발전하고, 변화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공부란, 책상 앞에서 교과서를 읽는 공부가 아니다. 관계에 관해서, 세상에 관해서 주변에 함께 공부할 것들은 널렸다.
두 사람을 성장시키며 함께 할 수 있는 일들. 봉사한다든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갈등을 함께 풀어나갈 과제로 설정해 해결해 나간다든지, 취미가 되는 활동을 함께 배운다든지, 같이 노력해서 풀어나갈 분명한 목표를 설정해, 내부의 장애물을 외부로 치환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함께 있는 시간을 좀 더 귀하고 즐겁게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을 움직이는 소리의 체험,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내시가 된 남자의 이야기. 어쩌면 그리 새로운 이야기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왕세자 실종사건>이 그 사랑을 무대 위에 그려내는 방식만큼은 놀랍도록 새롭다. 특히 시간도 공간도 툭툭 끊기는 이야기를 한 맥락으로 엮어내는 북소리, 새소리, 짐승 소리 등 소리의 활용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공연 무대 위에는 멈추지 않는 것이 있는데, 하나는 소리고, 하나는 배우들의 움직임이다. 죽도록 달린다는 극단의 이름답게, 배우들은 내내 무대 위에서 움직인다. 퇴장도 드물다. 중심에 두 사람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을 때도 모든 배우가 무대 어느 부분에서인가 자신의 시간을 살고 있다. 조명을 비추지 않는 순간에도 모든 인물의 삶은 이어지고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만나고 부딪치고 헤어진다.
때때로 슬로우 모션 혹은 거침없는 달리기는 느려졌다 빨라지는 북소리에 맞춰 이뤄진다. 무대 위에서 소리가 시간을 늘였다 당겼다 하는 효과를 낸다. 리듬감 넘치는 소리와 움직임은 마치 한 편의 무용 같고, 그 리듬감은 끊임없이 긴장감과 재미를 일으킨다. 어쩌면 익숙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척이나 우아하고 세련되게 전달된다. 배우들이, 이 연극이 관객에게 말을 거는 방식은, 새로운 체험이다. 공연을 좋아한다면, 아니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당신도 꼭 한번
<왕세자 실종사건>, 체험해 봤으면 좋겠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