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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나?” 사랑의 기원에 관한 질문들 - 뮤지컬 『헤드윅』
“가장 상처 많은 이가 세상에 보내는 가장 뜨거운 위로”
“트렌스젠더가 주인공이지만, 그의 성적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근원적인 사랑에 관해 해드윅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랑의 이야기다. 하지만 어디 불가능한 사랑이 이뿐인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눈이 맞아 사랑에 빠지는 일이, 그래서 진실한 사랑에 닿는 일이 어디 쉬운가. <헤드윅>은 절망과 장애, 극복하지 못하는 상처가 있는 모든 관계, 모든 연인에 관한 이야기다.”
헤드윅 그리고 성난 1인치
암전되고 막이 오르면, 객석 통로에서 헤드윅은 화려하고 우아하게 등장한다. 커다란 가발, 짙은 화장,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혹은 불편해 보이는 타이트한 옷을 입고 나타난 헤드윅이지만 그의 애교 짙은 눈빛이라던가 관능적인 몸짓을 보면, ‘언니’ 소리가 절로 나온다. 어린 시절에는 예쁜 소년이었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 성전환 수술을 받은 헤드윅은 트렌스젠더 록가수다.
무대가 되는 공연장은 타이타닉 생존자들이 머물렀다는 허드슨 강가의 낡은 호텔 ‘리버 뷰’다. 여기, 호텔 공연장에서 헤드윅의 작은 콘서트에 관객들은 초대받았다. 동독의 소년이 이곳 허름한 무대 위 화려한 록스타가 되기까지의 속사정, 유명 록가수 토미와의 스캔들, 그의 상처와 아픔까지 헤드윅은 오늘 다 털어놓겠다며 공연을 시작한다.
헤드윅, 어린 한셀은 어린 시절부터 하얗고 예쁜 미모 덕에 여러 사람의 손(!)을 타고 자랐다. 좁은 아파트에서 미군 방송으로 흘러나오는 데이빗 보위, 루 리드, 이기 팝의 록음악을 들으며 생활하던 어느 날, 미군병사 루터를 만나게 된다. 여자가 되는 조건으로 루터와 결혼한 한셀은 싸구려 성전환 수술을 받고, 엄마의 이름인 헤드윅이라는 이름으로 동독을 빠져나간다.
헤드윅, 그 사랑의 대가
해피 엔딩이었다면 헤드윅을 우리가 만날 일도 없었을 텐데. 헤드윅은 미국으로 오자마자 남편 루터에게 버림받고, 매춘, 보모 생활을 하며 생활을 이어가다 다시, 음악을 시작한다. 헤드윅과 엥그리 인치 밴드. 엥그리 인치란, 성전환 수술에서 실패해 6인치였던 성기가 5인치만 잘려나가 남겨진, 어정쩡한 모양새의 일 인치를 말한다.
헤드윅의 음악은 에너지가 넘친다. 그것은 분노와 슬픔의 에너지다. 때때로 헤드윅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견딜 수 없어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보인다. 풀 메이크업의 화장은 때때로 웃는 듯 우는 듯 보인다. Tear me down에서는 세상을 향해 덤벼보라고, 나를 부숴보라고 외치고, 개판 된 성전환 수술 이야기는 고스란히 노래 가사로 내지른다.
과거로부터 시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헤드윅은 그의 몸을 통과해 간 거친 감정들, 거친 사건들 속에서 점차 너덜너덜해진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이고 싶고, 가장 사랑받고 싶은데, 현실 속 그의 모습은 풍파에 쓸리고 뜯겨, 너덜너덜한 모습일 뿐이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인식할 때마다 헤드윅은 날카로워진다. 동료들을 무시하고, 자신만 돋보이려고 애쓴다. 그의 더 뾰족하게 굴 때마다 그가 더 안쓰럽게 보이는 건 왜일까.
헤드윅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언제나 이별로, 배신으로 귀결됐다. 신체 일부분을 잘라가면서까지 선택한 결혼은 이혼으로 끝났고, 헤드윅이 음악과 사랑을 알려준 소년 토미는 가수로 성공하고 나서, 그를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헤드윅이 분통이 터질 수밖에.) 무엇이 문제였을까? 헤드윅이 더 사랑해서 받은 대가라고 하기에는, 그녀가 감당해야 할 죗값이 너무 크다.
후회는 없을지 몰라도 아픔은 존재한다
한셀의 엄마는 말했다. 원하는 걸 가지려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그게 세상의 이치라고. 하지만 헤드윅은 무언가 간절히 바라고 최선을 다했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배신과 절망의 세계. 한 번쯤 무언가 간절히 바란 적 있었으나, 그 바람에 배신 당해본 사람이라면 헤드윅의 슬픔이 어떤 것인 줄 잘 알 것이다.
간절히 원하고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가 없다? 후회는 없을지 몰라도 아픔은 분명히 존재한다. 진심이었기 때문에, 버림받고 배신을 당하고서도 차마 놓지 못하는 한 줄기 기대를 놓지 못한다. 그 ‘혹시나’가 얼마나 사람을 옥죄는지, 루터와 토미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 헤드윅에게 자유와 평화란 없다.
그렇다면, 그 세계 속에는 온전히 불행만 존재하는 것인가. 뮤지컬 헤드윅은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삶이라는 건 내게 소중한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서, 그것이 훼손되고 사라진다고 해도 삶은 이어진다. 그 아픈 가슴에서 또 다른 사랑의 싹이 트기도 하고, 다른 기회가 불어와 나를 생각지도 못한 곳에 옮겨놓기도 한다. 사랑이 떠난 자리에 헤드윅은 음악이 남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만들고, 무대에서 그 아픔을 고백한다. 그에게는 꼭 해야 하는 간절한 이야기. 그의 고백은 자신의 가슴에 바르는 약이고, 듣는 이에게 건네는 치유의 음악이다.
상처 있는 모든 관계, 모든 연인에 관한 이야기
트렌스젠더가 주인공이지만, 그의 성적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근원적인 사랑에 관해 해드윅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사랑의 기원과 그보다 깊은 아픔에 관한 이야기다.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랑의 이야기. 하지만 어디 불가능한 사랑이 이뿐인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눈이 맞아 사랑에 빠지는 일이, 그래서 진실한 사랑에 닿는 일이 어디 쉬운가. <헤드윅>은 절망과 장애, 극복하지 못하는 상처가 있는 모든 관계, 모든 연인에 관한 이야기다.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내 그곳까지 사랑해줘.”라고 말하는 헤드윅의 대사는 모든 사랑의 기초문법이다. 내 ‘그곳’이란, 누군가에게는 가난, 누군가에게는 장애, 누군가에게는 추한 외모, 누군가에게는 취향이다. 내 앞에 마주한 한 명의 인간을 아무런 이름표 없이 수식어 없이 온전히 본 적이 있나. 짙은 화장을 지운 맨 얼굴, 상대방 영혼의 표정을 본 적이 있나. 우리는 극중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헤드윅이 됐다가, 그의 ‘그곳’을 보고는 지레 겁먹고 달아나는 토미가 되기도 한다.
7년 만에 헤드윅으로 돌아온 오만석의 연기 매우 디테일하다. 얼굴을 찡긋거린다든지, 소소한 행동 디테일을 보면, 배우가 아닌 그 안에 헤드윅이 보인다. 오만석의 얼굴에는 세상의 쓴 맛, 단 맛을 다 본, 좋은 시절을 보내고 난 뒤의 헤드윅의 얼굴이 있다. 늙었다는 말이 아니다. 깊고 깊은 희로애락의 표정을 그 하나의 얼굴이 인상으로, 주름으로, 눈빛으로 담고 있다.
오드윅이 예민하고, 까칠한 헤드윅이라면, 반면 건드윅은 그보다 애교가 많고 사랑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환상에 또 무언가를 걸 것 같은 로맨틱함이 여전히 있다. 몸태가 예뻐서 분장했을 때를 보면 루터가 왜 그에게 젤리를 던져 댔는지(!) 수긍할 만하달까. 그래서 상처받은 건드윅은 오드윅보다 훨씬 가련해 보인다.
화려한 의상과 가발을 걸치고 등장한 헤드윅은,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맨몸으로 관객 앞에 선다. 자기를 수식하는 혹은 자기가 되고 싶은 모든 거추장스러운 이름들을 벗어 던지는 순간, 헤드윅은 온전히 자기 모습으로 선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관객 앞에 서게 된다. 아무 말 하지 않는 그 모습이,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고백처럼 들려왔다. 이제까지 헤드윅이 들려준 어떤 말과 어떤 노래보다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었다.
비록, 두 연인과의 사랑을 끝까지 이뤄내지 못했지만,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할 수 있는 헤드윅은 매일 밤, 무대 위에서 사랑한다. 밤마다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당신도, 오늘 밤 그를 만나봤으면 좋겠다. 사랑에 빠질 게 틀림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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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연답게 잘, 헤쳐나가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