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빌보드 차트를 살펴보면 반가운 얼굴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각자 정규앨범을 발표하며 돌아온 ‘동부 힙합의 제왕’ 나스와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 열풍의 주역 스매싱 펌킨스가 바로 그들입니다. 거장들의 기세에 질세라 발군의 보컬을 자랑하며 화려한 데뷔를 치르고 있는 신인도 물론 있습니다. 앞서의 두 아티스트들의 정규작과 더불어, 엘리샤 키스의 레이블에서 발굴한 보석 같은 신예 엘 바너의 데뷔 앨범도 함께 소개해드립니다.
나스(Nas) < Life Is Good >
나스도 어느덧 우리나이로 마흔이다. 1994년 22세의 나이로 데뷔 앨범 < Illmatic >을 발표한지 18년이 지난 셈이다. 당시 어깨를 견주던 이들은 새 레코드를 내놓기보다 사업에 몰두하거나, 극장 스크린을 통해 근황을 알리는 데 역점을 두는 듯하다. 그나마 이들은 운이 좋은 편이다. 다소 운이 없었던 이들은 퇴물로 버려지거나,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반면 나스는 칼날이 맞부딪히는 복마전에서 20년의 경력을 눈앞에 두고 있으며, 컴백의 시기마다 진중한 화두를 던지는 힙합계의 ‘Don(대부)’가 되었다.
이는 그가 이제는 앞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옆과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작가로서 나스에 초점을 맞추고 이번 앨범의 가사를 눈여겨본다면 흥미로운 구석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Daughters」에서는 자신의 딸이 혹시라도 삐뚤어질까봐 전전긍긍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드러나고, 「Accident murderers」에서는 뒷골목 규칙의 최소한도 어겨버리는 막나가는 어린것들에게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즉
< Illmatic >에서 22세의 사상이 묻어있었듯이
< Life Is Good >에서는 40세의 나스가 매일 접하는 단상들을 여과 없이 푼 것이다. 그 단상은 부유층의 가식, 새로운 이상형, 후세대들을 위한 응원 등 공과 사를 넘나든다. 혹자에게는 각자 떨어져 있는 주제들이 난삽해 보일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자리의 나스라는 화자로 소실점을 좁히게 되면 큰 그림을 감상할 수 있게 된다.
10번째 정규 앨범은 곡명과는 아이러니하게 「No introduction」이 웅장한 위용으로 막을 올린다. 자수성가한 대부의 연대기가 생존경쟁의 법칙을 거리에서 배운 어린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가듯 갱스터 무비의 도입부와 흡사한 대목이다. 물불 가리지 않았던 20대의 무용담은 이후 몇몇 트랙에서도 발견된다. 이 같은 회상화법이 ‘내가 해봐서 아는데’류의 불통으로 그치지 않는 이유는 그가 회춘에 가까운 래핑으로 건재함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A Queens story」에서 개선가를 연상토록 만드는 비트와 걸맞게 임팩트 있는 랩 운용을 하다가도 곡의 역전이 일어나는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피아노 라인의 긴장과 합을 맞추며 휴지 없이 펀치라인의 성찬을 이어간다. 펀치라인의 세례는 이번 앨범에서 특히 돋보이며 이미 인터넷상에서는 최고 표현을 가리는 순위매기기 놀이가 벌어지고 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언급했고 크레디트를 확인하면 알 수 있듯이 앨범은 두 프로듀서, 살람 레미(Salaam Remi)와 노 아이디(No I.D)가 비트를 주조했다. 결과물에 대한 평가는 논외는 하더라도 두 프로듀서는 자신의 색채를 준수하게 유지했다. 살람 레미는 「Nasty」에서 시간이 흘렀음에도 1990년대의 생동감을 재현해달라는 나스의 청탁을 비교적 충실히 완수하는가하면, 최근 오케스트레이션에 푹 빠진 근황을 알리는 듯 「A Queens story」와 「The black bond」에서는 스케일이 큰 트랙을 지휘했다. 반면 노 아이디는 적절한 미장센을 구축할 줄 아는 재능을 나스에게 바쳤다. 「Loco-motive」에서 나스는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서부극 속 열차 강탈범에 비견할 만하다. 「Daughters」의 의외의 온화한 분위기를 조성한 까닭에도 그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흠잡을만한 구석이 없는 수작이다. 나스의 과거와 현재를 목격할 수 있으며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을 통과하는 그를 통해 음악적 방향성도 예측할 수 있는 앨범이다. 제왕, 리빙 레전드, 수호신 등의 수식어는 낯간지럽기도 하고, 이미 충분하다. 나스는 후배들이 20년 뒤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자발적으로 교과서를 채택하도록 결과물로 증명했다.
글 / 홍혁의 (hyukeui1@nate.com)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 < Oceania >
팝 음악 사에서 천재들은 많았다. 한순간 반짝이는 재능이 아닌 진정한 ‘난 인물’들은 한 시대의 영웅으로 추앙받고는 한다. 1970년대의 펑크록을 모태로 이어온 얼터너티브라는 큰 궤에서 커트 코베인은 가장 높은 위치의 존재였고, 빌리 코건은 그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범접 불능의 찬란한 재능을 지닌 이였기에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시샘한 살리에리처럼 그 누구의 것도 부러워하거나 탐하지 않았다.
“나는 괴물처럼 행동했고, 그 괴물은 내 개성이었다.”
빌리 코건은 ‘팀의 두뇌’이자 ‘철저한 독재자’다. 순전히 자신만의 잣대로 구성원은 물론 음악의 방향성에 이르기까지 밴드의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스매싱 펌프킨즈라는 하나의 집단은 순전히 그의 소유라고 봐도 무방했을 정도다.
“나머지 멤버들이 나의 음악을 따라주지 않는다”식의 당시의 인터뷰들은 순전히 불만 토로의 장으로 전락하기까지 한다. 이런 독단의 결과로 갈등과 내분은 필연처럼 이어졌다. 결국 밴드는 존폐 위기에 몰렸고 좌초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닥치고 만다.
해체 이후에도 코건은 멈춰있지만은 않았다. 빛나는 아트워크와 뿜어져 나오는 창작력의 발로는 새로운 프로젝트 즈완(Zwan)의 결성과 솔로 활동을 통해 해소했다. 하지만 호박들의 주축이었던 제임스 이하(James Iha)와 디'아시(D'Arcy)가 팀을 떠난 후 이렇다 할 음악적 성취를 얻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해체 7년 만인 2007년
< Zeitgeist >라는 앨범 타이틀과 스매싱 펌프킨즈의 이름으로 재결성을 알린다. 절치부심한 복귀 작품은 한 시대를 풍미한 ‘얼터너티브의 선봉장’이었던 황금시대를 다시 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차트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호의적이지 못한 팬들과 평단의 냉대와 마주하게 된다. 철모르게 술과 마약, 섹스를 즐기던 당시 1990년대의 X세대 동반자들은 이제 한 가정을 꾸렸다. 시간이 너무도 지나버렸다는 말이다. 이는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결과물이라 기보다는 철 지난 ‘시대정신’과의 부조화였으리라.
복귀 작품의 작업을 함께한 유일한 원년 멤버 지미 체임벌린(Jimmy Chamberlin) 마저 이제는 더 이상 그의 동료가 아니다. 시작을 함께한 모두가 팀을 떠난 지금이다. 데뷔 작품
< Gish >가 세상에 나온 지 21년이 지난 지금, 당면 과제는 ‘밴드의 재건’이었다. 하여 코건은 타로 카트 ‘The Fool's Journey’에 영감을 얻어 무려 44곡의 싱글을 발표하는 대형 프로젝트 < Teargarden By Kaleidyscope >작업에 착수했다. 예정대로 신곡들은 매달 온라인으로 무료 배포되었고, 2012년 대망의
< Oceania >를 선보이기에 이른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밴드가 더욱 단단해졌음을 헤아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예상대로 첫 번째 트랙 「Quasar」에서부터 피치를 잔뜩 올려놓는다. 태양계의 행성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작품 속으로 투영하고자 했고 신과 크리슈나, 마가를 불러들이기까지 한다. 단단하고 빽빽이 차있는 기타 리프와 파워 넘치는 드러밍은 곡의 완강한 기세를 뿜어낸다. 「The celestials」는 어쿠스틱과 분위기를 끌어내다가 이에 대조되는 드라이브 사운드 기타의 어슷한 조화는 진행 전환의 묘미를 훌륭히 살려냈다.
앨범 동명 타이틀 트랙 「Oceania」의 전개는 대 서사시를 방불케 한다. 비틀즈의 「A day in the life」와 윙스의 「Band on the run」과 마찬가지로 한 작품 속에서 다중 작품이 공존하는 큰 틀을 가지고 있다. 9분이라는 러닝타임의 3부작 구성은 새로운 도약을 이루고자 하는 그들의 최대 야심작이다. 「My love is winter」와 「Pale horse」, 「Pinwheels」같은 곡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특유의 멜랑콜리가 살아 숨 쉬고 있으며 「The chimera」와 「Inkless」는
< Siamese Dream >의 초기 작품들의 감성들이 전해진다. 더는 신경질적이지도 않고 거창한 연주와 웅장한 편곡에 목메어있지 않지만 깊이 있는 숙연함이 묻어난다.
하나의 유기체와도 같은 공동의 밴드 사운드에서 자신만의 음악에 대한 전념을 위해 타인을 무참히 짓밟고 무시한다. 보통의 자신감으로는 불가능한 철면피한 독단이다. 하지만 돌이켜 보자면 역기능보다는 오히려 순기능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이들을 향한 숱한 찬사의 시발점이 바로 빌리 코건임에 반문을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쯤 하면 미워할 수만은 없는 ‘위대한 압제자’라 할만하다.
‘이미지와 스타일’이 한 뮤지션의 음악성으로 대변되고 있다. 시대를 반영하는 ‘록 스피릿’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런 시류에서 이들은 성장과 완성도를 논할 여지가 없는 밴드가 되었다. 하지만 이전보다 심오하며 깊이 있는 이야기로 록의 정통성을 고수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시대의 정신이 사라진 요즘에도 세상은 스매싱 펌프킨즈에게 로큰롤을 원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라면 그 온당한 요구에 충분한 답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순간 불타 없어지기보다 이렇듯 천천히 불타올라 서서히 식어가길 바란다.
글 / 신현태 (rockershin@gmail.com)
엘 바너(Elle Varner) < Perfectly Imperfect >
기대는 했었다. 작년에 접했던 「Only wanna give it to you」를 통해 그의 첫 발자국을 확실하게 각인시켜둔 바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 (타이틀에서 느껴지는 자신감 그대로) 맵시 좋은 앨범을 내줄 줄은 몰랐다.
< Perfectly Imperfect >는 1년 전 싱글을 통해 호감을 표한 골수 흑인음악 팬들은 물론, 어렵지 않은 것에 매력을 느끼는 팝 팬들까지 모두 섭렵할 수 있을 만큼 멋진 절충안을 구현해낸 작품이다.
1989년생, 그러나 목소리는 그 또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탁성을 유지한 채 고저를 훑는 그의 보컬은 그 옛날의 재즈와 블루스, 그리고 콘템포러리 알앤비로 통칭되는 최근의 음악스타일까지 그 어떤 옷도 소화가 가능해 보인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도 자기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여러 가수들에 견주어본다면 이것은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거기에 싱어송라이터라는 무기까지 갖추고 있으니 음악가로서의 호조건은 모두 갖춘 셈이다. 독자노선보다는 협업을 추구하는 시대에 머릿곡을 제외하고 피처링진이 전무하다는 사실은 분명 자기 목소리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다.
역사를 되짚어보면 남다른 하드웨어를 갖고서 기대 이하의 결과물을 내놓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엘 바너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첫 출발이 순항이라 할 수 있다. 앨범 발표 후 처음 싱글 커트된 곡은 「So fly」이지만, 그 외의 곡들이 오히려 더 눈에 띌 만큼 고른 트랙 완성도를 자랑한다. 정규앨범 전의 싱글(「Only wanna give it to you」, 「Refill」)까지 추산했을 때 벌써 세 번째 싱글인 것을 상기해보면, 모르긴 몰라도 케이티 페리(Katy Perry)처럼 한 음반에서 몇 개의 싱글을 뽑아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직관적 감상으로는 「Refill」과 「Soundproof room」, 「Stop the clock」에 밀리는 듯 보이는 「Not tonight」, 「Leaf」, 「Oh what a night」와 같은 트랙들도 곱씹을수록 향이 짙게 배어나는 곡들이다. 현악 스트링과 브라스, 힙합 비트와 전자음 등을 적소에 배치하며 트랙별 개성을 확보해낸 덕분이다. 숨겨진 곡들이 빛을 발하고 있으니, 앨범 전체를 스트레이트로 감상해도 지루감이 머리를 들 틈이 없다.
다만 작곡에 있어 엘 바너 자신보다도 조력자들의 몫이 더 커 보인다는 것은 아직 그가 작가적 아티스트로서는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트랙의 작곡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린 것은 맞지만 온전히 그의 힘으로 해낸 것은 「Damn good friends」 한 곡 뿐이며, 이것이 앨범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트랙으로 다가온다는 점은 그가 아직은 협력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뮤지션이라는 것을 실증하고 있다.
한계점은 보이지만, 조금 유연하게 생각해볼 필요 또한 있다. 20대의 절반도 채우지 않은 나이에 이만큼이나 해낸 것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닌가. 이미 그에게 천재라는 수식을 더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타이틀 문구는 아직 그에 대해 완전한 불완전(Perfectly Imperfect)이라 말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며 우리에게 궁극의 완전(Ultimately perfect)을 경험토록 할 순간을 기대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뮤지션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 또한 음악 팬으로서 누릴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일 테니까.
글 / 여인협(lunariani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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