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버튼의 <배트맨>, <배트맨 리턴즈>는 악인이라는 깨진 거울을 통해 영웅을 비추는 철학적 블록버스터였다. 이어 배트맨 시리즈의 연출을 맡았던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 포에버>는 서민적 이미지의 마이클 키튼 대신 발 킬머를 배트맨으로 내세우고, 짐 캐리, 토미 리 존스, 니콜 키드만, 크리스 오도넬 등의 화려한 캐스팅으로 출발했다.
차기작 <배트맨과 로빈>은 배트맨을 보다 대중적이고 섹시한 조지 클루니로 바꾸면서 보다 대중적이고 가벼운 블록버스터의 길을 택했다. 여기에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우마 서먼, 알리시아 실버스톤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CG와 특수효과는 더욱 강화되었고, 각종 무기와 액션 씬들이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 초호화 블록버스터였다.
조엘 슈마허는 음울하고 철학적인 팀 버튼의 배트맨을 지우고 자신만의 경쾌한 배트맨을 만들려고 했지만, 역설적으로 배트맨이여 영원하라고 시작한 조엘 슈마허의 시리즈는 배트맨 시리즈의 끝을 알리는 종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을 만나기까지 관객들은 8년을 고스란히 기다려야만 했다.
새롭게 쓴 배트맨
: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 라이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팀 버튼이란 거대한 벽을 뛰어넘고 조엘 슈마허에 의해 구겨진 이미지를 되살려야만 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성장드라마의 어두운 리얼리티에 연기파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를 통해, 믿음직하고 그럴 듯하게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되어가는 과정을 선보인다. 선택은 프리퀄이다. <배트맨 비긴즈>는 우발적 범죄로 부모를 잃은 브루스 웨인(크리스천 베일)의 벗어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상처, 그 트라우마를 끌어안는다. 공포와 죄책감, 분노에 휩싸인 브루스는 어둠의 사도들에게 무술을 전수받고 고담 시로 돌아온다.
팀 버튼의 영화보다 훨씬 더 무겁고 철학적인 <배트맨 비긴즈>는 반듯하면서도 날카롭고 동시에 기괴한 이중성을 지닌 크리스천 베일을 만나 날개를 달았다. 배트맨은 선천적 재능 혹은 우연한 사고로 얻은 초능력이 아니라, 스스로를 창조한 창조주이자 피조물이며, 브루스 웨인의 가면에 배트맨을, 배트맨의 가면에 브루스 웨인을 숨겨야 하는 이중성에 사로잡혀 있다. <배트맨 비긴즈>는 영웅이 되어야만 하는 필요성과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영웅의 가면을 뒤집어 쓴 채 이중생활을 해야 하는 브루스 웨인, 배트맨의 철학적 고뇌에 초점을 맞춘다.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내 안에 숨어 있으며,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테마를 되풀이 한다.
이어 히스 레저의 조커는 <다크 나이트>의 핵심이 되었다. 잭 니콜슨 이외의 배우가 연기하는 조커는 상상할 수도 없다는 평가를 얻었던 팀 버튼의 <배트맨> 20년 뒤 히스 레저는 강렬한 매력과 아우라를 뿜어낸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의 역할은 절대 악의 존재이며 동시에 배트맨을 존재하게 만드는 거울의 양면이 된다. 악인이 없으면 영웅의 존재도 필요 없으며, 영웅과 악인은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제거해야만 한다.
배트맨과 조커의 대립 항을 통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선과 악이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으며, 그 얇은 막 하나만 제거하면 순식간에 뒤섞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고인이 된 히스 레저의 광기 어린 연기까지 어우러져 새로운 신화로 태어났다.
<다크 나이트> 이후 4년 만에 선보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세 번째 배트맨 이야기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트릴로지로서의 충실한 3부작이다. <배트맨 비긴즈>는 슈퍼 히어로 배트맨의 탄생을, <다크 나이트>는 절대 악의 상징으로서의 조커를 등장시켰다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는 베인(톰 하디)이라는 테러리스트를 고담시의 새로운 상징으로 등장시킨다. 지옥 같은 감옥에서 살았던 베인은 빈부 격차가 사회의 불안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를 비꼬면서 폭동을 통해 기존 가치관을 무너뜨린다. 베인의 행동은 처해진 입장에 따라 테러이면서 동시에 계급혁명이 되는 모순 속에 있으며, 베인은 배트맨과 대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고담시의 시민 전체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이제 정체성의 고민은 배트맨과 조커만의 몫이 아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통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한 명의 영웅이 짊어졌던 고뇌와 사회적 역할을 시민사회 전체로 확장시켰고, 그 질문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돌아온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그리고 시민사회의 중심이 시민이라면, 이제 배트맨이 없는 세상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역설적 해답을 보여준다. 동시에 꿈의 세계마저 체계와 규칙을 갖춘 세계로 재창조해낸 <인셉션>처럼 크리스토퍼 놀란의 고담시는 상상의 도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라고 주장한다. 160분이라는 어마어마한 러닝 타임을 통해 놀란 감독은 ‘배트맨’이라는 영웅을 서서히 지우고, 레지스탕스와 점령군이 맞서 싸우는 거대한 시가전을 준비한다.
<배트맨 비긴즈>가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1부였다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영웅의 소멸을 묵도하는 3부작의 거대한 엔딩을 준비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는 믿을 수 없게도 ‘경찰’이라는 존재가 배트맨이 없는 자리에 ‘영웅’이 해줘야 할 역할을 해내고, 이들에 대한 믿음은 배트맨이 영웅의 가면을 벗고 브루스 웨인이란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보기에 따라 앞선 2부작에 비해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예측 불가능한 결말로 나아가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 배트맨 시리즈의 종언처럼 보인다는 점 때문에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미 3편의 영화를 통해 해야 할 이야기를 명확하게 품어내고 정리해낸다.
꿈은 언제나 중간부터 시작된다
: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들
<메멘토>
<인썸니아>
2000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현재를 이끈 영화 <메멘토>는 그 결말을 알고 봐도 여전히 감탄이 나오는 영화이다. 시간과 공간을 자르고 이어 붙여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가는 영화적인 마법은 텍스트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영화적 장르의 아우라를 돋보이게 만든다.
영화 속 주된 시간은 주인공 레너드(가이 피어스)의 시점에서는 거꾸로 흐른다. 하지만 동시에 진행되는 흑백 필름의 관찰자 시점은 순차적으로 흐른다. 레너드는 아내가 강간 살해된 뒤 복수를 위해 살아간다. 15분이라는 기억을 다시 되돌리기 위해, 자신의 몸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새겨 넣어야 하는 살아있을 수 있는 주인공의 지독한 현실을 기승전결이 없는 뒤엉킨 진공상태로 밀어 넣어버리는 음울한 기운은 <메멘토> 전체를 관통한다. 관객은 레너드처럼 피곤해진다. 결국 복잡한 실타래가 풀려 마침내 결백이 증명되는 그 순간에도 관객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하지 않는다. 피곤하고 지쳐버린 주인공의 감정 그대로, 기억은 숨 가쁘고 복수는 허무하고, 기억은 여전히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2002년 <인썸니아>는 알래스카라는 위압적인 자연 자체가 하나의 숨 막히는 폐쇄적인 공간이 되고, 주인공인 형사는 자신이 무엇을 쫓는지조차 혼돈스러워한다. 주인공의 목적은 범인을 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묻어 있는 기억의 흔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들은 늘 두려움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그래서 불면증에 빠진 사람처럼 그들의 몸은 늘 지독한 피로에 휩싸여 있다.
<프레스티지>
<인셉션>
기억을 가둔 만큼 주인공을 옭죄면서, 교차된 시간으로 긴장감을 주는 놀란 감독 특유의 연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때론 지나친 과잉이 오히려 결핍이 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2006년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 사이에 만들어진 <프레스티지>는 과유불급의 교훈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였다. 놀란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천재와 맞선 불운한 경쟁자의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충격적으로 보이고 싶은 반전이 과잉된 의식과 형식 때문에 비약처럼 느껴지는 아쉬운 작품이었다.
그리고 2010년 <인셉션>을 통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웅장하면서도 동시에 정교한 크리스토퍼 놀란 만의 작품세계를 널리 알린다. 간단한 기계장치 한대만 있으면 한 사람의 꿈속으로 들어가 그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생각을 훔쳐낼 수 있는 미래의 세상, <인셉션>의 이런 소재와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소재와 이야기를 사건으로 구조화하는 방식이나 시각화해낸 장면들은 더 뛰어나고 놀랍다.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한발 더 나아간 무중력 액션의 연출이나 더 강력해진 비주얼 규모는 매력적이다.
형식의 차원에서 <인셉션>은 우리의 뇌를 괴롭혔던 <메멘토>보다 더 복잡하고, 일기와 메모를 매개로 역전된 시간구조를 실험한 <프레스티지>와도 그 궤를 같이 한다. 구조적으로 뒤엉킨 <인셉션>의 내러티브는 꿈의 국면으로 설정된 스토리의 이전 단계들을 기억해내도록 돕는 단서로 밑그림을 그려내기 때문에 관객들은 스스로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해야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꿈과 기억, 망상, 환영이 뒤섞인 <인셉션>의 이야기는 우리의 꿈이 늘 중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일깨우듯, 발단과 결말의 손목을 댕강 자른 채로 시종 진행된다. 관객은 사건들 사이의 시간적, 인과적 연결점을 스스로 찾아, 복잡한 기억의 기능을 활용하여 미로에서 빠져나가는 출구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메멘토>에서 시작된 놀란 감독의 독특한 화법은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려, 점점 더 미궁을 연출하고 있는데, 보기에 따라 <인셉션>은 그 화법이 지나친 과잉으로 읽히기도 한다는 점에서 배트맨 시리즈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을 두고 보자면 <인셉션>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세계의 정점을 찍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제 하강하거나, 궤를 달리해야 할 시점이 왔다는 말이다.
<인셉션> 이후 놀란 감독은 배트맨 시리즈의 종결을 선언하며, 앞선 두 작품을 마무리 한다. 그는 이 3부작을 통해 앞선 두 편의 기억과 단편들을 계속해서 건드리고 여기저기 흩어졌던 이야기의 퍼즐을 모은다. 따라서 완벽히 이 영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를 복습해보는 것이 좋다. 이미 그가 던져놓은 수많은 퍼즐 조각들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지워져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배트맨과 조커가 사라진 8년, 영웅도 절대 악도 없었던 고담 시에 다시 등장한 악당, 고담시의 운명은 배트맨에게 달려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놀란 감독은 배트맨이라는 영웅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놀란 감독의 입장에서 배트맨은 일그러진 채 억지웃음을 지어야 하는 조커의 대립 항이고, 트라우마를 숨기기 위해 가면을 덧입고 살아가야 하는 나약한 개인일 뿐이다.
놀란 감독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배트맨 시리즈는 대립이 분명하고, 그 결말도 명확한 편이다. 극의 긴장감을 뒤엉킨 ‘시간’이 아니라, 개인의 기억을 지배하는 과거를 현재의 가면으로 분명하게 재현해내기 때문이다. 여기엔 단기기억상실, 마술, 불면증, 꿈의 지배보다 ‘이중성을 지닌 영웅’의 이야기에 우리가 더 익숙한 탓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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