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20대라면 무조건 여행을 떠나라
여행: 잃어버린 공간, 혹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공간을 찾아서 (2) 여행이 가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매력, 그것은…
내가 사는 곳에서 통용되는 게임의 법칙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바쁜 인생 속에서 때로는 ‘돈을 벌지 않을 권리’를 적극적으로 향유할 필요가 있다는 것. 20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미래를 위한 막무가내식 스파르타 훈련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내게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바쁨을 핑계 대며 내가 잊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속속들이 알아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은 인간을 겸허하게 합니다. 세상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입장이 얼마나 하찮은가를 두고두고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구스타프 플로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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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한 스푼, 미소 1리터가 필요한 시간
불현듯 삶의 운전대를 확 놓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삶을 끝내려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주인공인 걸 잠시 쉬고 싶을 때. 삶의 구심력이 너무 강해서, 그 삶의 폭풍에 내가 자칫하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을 때. 정말 잠시만, 잠시만 내 삶의 운전대를 놓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그 ‘잠시’라는 것이 잠깐 영화를 본다든지 낮잠을 늘어지게 자는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을 때가 있다. DVD플레이어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듯이, 잠시 내 삶을 멈춘 채로 다른 시간대를 살고 싶은 마음. 여행은 바로 그럴 때 떠나야 제 맛이다. 여행은 삶의 고삐를 놓은 채로 삶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한다. 삶의 목적을 생각하며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생각하며 두리번두리번 타인의 삶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한 순간. 그럴 때 우리는 일단 떠나야 한다.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에. 더 큰 마음의 상처를 입기 전에.
사람의 성격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고, 흔히들 말한다. 하지만 좀 더 길게, 좀 더 멀리, 내 일상의 중력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곳으로 여행을 가보면, 어쩌면 성격도 ‘일상의 잔여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상의 패턴이 바뀌면 성격도 조금씩 요동을 친다. 아무리 ‘빨리빨리’ 해도 괜히 내 속만 쓰리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저 느긋하게 기다리게 된다. 아무리 ‘노심초사’ 해도 계획한 볼거리를 다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저 우연히 마주치는 아주 사소한 풍경에서도 루브르박물관의 대작에 맞먹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나는 상상해본다. 평생 데리고 다녀서 이제는 지긋지긋한 내 성격도, 조금은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꺼내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평소에 사진찍기용 미소를 지을 때는 갑자기 미소를 작위적으로 만들어 보여야 했는데, 여행 중의 사진은 아무렇게나 스냅샷이나 몰카를 찍어도 그냥 기본적으로 웃음을 깔고 있다. 내가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이었던가. 내가 이렇게 유쾌한 사람이었던가. 그러다 보면 거꾸로 이렇게 되묻게 되는 것이다. 왜 나는 평소에 이렇게 웃지 못할까. 왜 좀 더 상냥하고 다정하게 사람들을 대하지 못했을까. 왜 평소에 좀 더 세상에 관심을 갖고, 타인에게 친절하고, 열정을 가지고 내 삶에 임하지 못했을까. 멀리 떠나지 않고도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도 이런 표정과 이런 마음과 이런 태도로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힘들 때마다 여행 사진을 꺼내 보며 조금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키득키득 웃곤 한다. 그래, 이거였어. 왜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잊고 있었을까.
가면 뒤의 미소 photographed by Seungwon Lee
아름다운 가면을 쓰고 걸어가는 여인의 매혹적인 미소. 이렇게 사진으로 보면, 그녀가 사진의 프레임을 찢어내고 점점 ‘우리 삶’ 쪽으로 가까이 걸어와서 말을 건넬 것 같다. 이렇게 멋진 가면을 쓰면 훨씬 자유로워진다고. 그렇게 갑옷같이 답답한 맨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지 말라고. 자, 우리 함께 다 같이 가면을 쓰고 제대로 한번 놀아보자고. |
위의 사진은 바로 내가 잊고 있었던 그 순간을 포착해준다. 아, 맞아. 베니스에서 우리는 저토록 아름다운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지. 그녀는 홀로 가면을 쓰고 있다. 그러나 가면과 그녀는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너무도 잘 어울려서, 오히려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이 머쓱해질 지경이었다.
수공예로 가면을 만드는 장인들의 가게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베니스. 그곳에서 나도 푸른 가면을 하나 샀다. 그녀처럼 자연스럽게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내가 가면을 쓰면 어설픈 배트맨 같아 보일 것 같아서 여행가방 속에 고이 모시고 돌아왔다. 베니스 곳곳에 넘쳐나는 가면극, 가면 가게, 가면을 쓴 사람들은 내게 수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어쩌면 우리는 내 맘대로 가면을 바꿔 쓸 수 있는 눈부신 자유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가면을 쓴다. 가정에서는 착한 딸과 아들, 다정한 부모의 가면을, 학교에서는 모범생의 가면을, 직장에서는 성실한 직장인의 가면을, 친구들과 놀 때는 유머러스하고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의 가면을, 버스나 지하철에서는 스마트폰이나 책에 빠져 주변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이는 사람의 가면을……. 사람들은 주어진 시공간의 분위기에 따라 격에 맞는 가면을 바꿔 쓰느라 하루 종일 무대 위의 연기자가 된다. 하지만 그 중에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가면, 별다른 연기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가면은 몇 개나 될까.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을 때 가장 편안한 가면을 쓸 수 있는 것처럼, 여행은 때로는 아무런 가면도 쓰지 않고 집 밖으로 당당히 나갈 수 있는 자유를 선물한다. 어떤 여행이든 우리는 일상과는 조금 다른 가면을 쓰게 된다. 좀 더 먼 곳에 나오면 좀 더 낯선 나 자신의 가면을 만나게 된다.
여행자의 가면은 대부분 모든 것이 낯설기 때문에 어린애 같은 표정이나 놀란 토끼눈 같은 표정이 많다. 낯선 언어, 낯선 습관 때문에 조금은 유치해지고, 아주 많이 겸허해지는 그 느낌. 간단한 정보를 묻는 그 쉬운 영어조차 가끔은 제대로 떠오르지 않아 머리를 긁적이는, 그러나 그렇게 ‘바보여도 좋은 나’를 만나는 순간. 그 순간이 정말 미치게 좋다.
여기서는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구나. 나는 그저 모든 가면을 내려놓고, 또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가면 하나만 쓰고, 이 거대한 ‘타인의 삶’이라는 연극을 관람하는 행복한 관객이면 되는 거구나. 이런 느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만, 여행자가 되면 아무 것도 컨트롤할 수 없고, 컨트롤할 필요도 없다. 그저 더 신나는 여행을 위해 잘 먹고 잘 자기만 하면 된다. 아무 것도 컨트롤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 어떤 상황의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토록 큰 자유를 준다는 것을, 나는 여행을 통해 처음 깨달았다.
그 정도로 20대의 내 영혼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삭막하고 무신경했던 셈이다. 손바닥만한 가면 하나를 보면서도 이렇게 수많은 생각을 떠올리며 조용히 삶을 돌아보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피로로 얼룩진 내 삶 속에 이런 사유의 근육이 숨어 있구나. 이 세상에 이토록 눈부신 것들이 버젓이 꿈틀대고 있었는데 이토록 눈 뜬 장님인 채 살아왔구나.
마침내 ‘나 자신’으로 떠나는 여행
나는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에 결사반대한다. 돌이켜보면, 그 속담을 믿고 견뎌냈던 20대의 고생이 나에게 결코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다. 고난에 어떤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사람은 반드시 그 고난에 대한 미래의 보상을 바라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무리하게 자기 인생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기 위해 잔꾀를 쓰거나, 뒤늦게 20대에 잃어버린 시간은 무슨 수를 써도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고생 자체에는 아무런 아름답고 화려한 의미가 없다. 육체와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고, 우리 자신의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만 가속화시키는 고생을 미화하지는 말자. 특히 자신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젊어 고생’은 더더욱 말리고 싶다.
돈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소중한 삶을 저당 잡힐 정도로 중요하지는 않다. 부당한 차별과 각종 폭력을 견디고, 나이 어린 사람에 대한 어른들의 무시를 견디고, ‘내가 약자다’라는 사실 때문에 저항조차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고, 나뿐만 아니라 미래의 또 다른 20대가 견뎌야 할 사회적 고통마저 더 커질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굳이 ‘사서’ 해야 할 아름다운 고생은 결코 아니다.
나 또한 아르바이트 수고비도 제대로 받지 못한 적이 많았고, 돈 때문에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한 적도 많다. 그때는 그런 고생이 언젠가는 진흙 속의 연꽃처럼 아름다운 의미로 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웬걸. 전혀 의미가 없었다. 의미가 없음을 넘어서, 그저 끔찍한 의미만이 그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시간이 아깝기만 했고, 그때 축난 건강이 아쉽기만 했다. 가장 나쁜 것은 ‘그래, 세상이 원래 그런 거지.’, ‘세상은 이렇게 냉혹한데, 나만 멍청하게 굴었어.’라는 식의 비관적인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이었다.
‘젊기 때문에 사서 하는 고생’의 엄청난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다시 알아볼 만한 명랑한 시선을 회복하는 데 엄청난 노력도 필요했다. 잃어버린 영혼의 명랑성을 회복하기 위해 내가 썼던 달콤한 극약처방이 바로 ‘여행’이었다. 뒤늦은 여행 늦바람을 통해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사는 곳에서 통용되는 게임의 법칙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바쁜 인생 속에서 때로는 ‘돈을 벌지 않을 권리’를 적극적으로 향유할 필요가 있다는 것. 20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미래를 위한 막무가내식 스파르타 훈련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내게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바쁨을 핑계 대며 내가 잊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속속들이 알아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여행자인, 새 photographed by Seungwon Lee
여행을 다니면서 가장 제대로 촬영하기 힘든 것이 바로 ‘새’의 날갯짓이다. ‘바로 저 모습이다’ 싶으면, 어느새 자세를 바꾸어 아까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능청을 떠는 새들. 아, 지금이야, 빨리 찍자,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미 새는 멀리 날아가 버린다. 새의 저 자유로운 날갯짓을 백분의 일만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무거운 짐도 욕심 사납게 꾸리지 않고, 그저 맨몸으로, 언제든지,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저 새처럼. |
정여울은…
타칭 문학평론가, 자칭 글쟁이 또는 글순이.
문학과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여행과 음악을 짝사랑하는 사람.
<한겨레신문>에 ‘정여울의 청소년 인문학’ 코너를 연재하고 있으며, 2012년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네필 다이어리1, 2≫ ≪정여울의 소설 읽는 시간≫, ≪미디어 아라크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정여울의 문학멘토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