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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즐거운 이유 세 가지 - ‘타인의 삶’을 엿보는 기쁨

여행: 잃어버린 공간, 혹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공간을 찾아서 (1) 여행은 혼자서도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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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늦바람이 불어 이제 틈만 나면 적금을 깨서라도 ‘어디로 여행갈까’를 궁리하는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시간은 좀처럼 사람을 바꿀 수 없지만, 공간은 기어이 사람을 바꾼다는 것을. 공간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동선을 바꾼다. 동선이 바뀌면 감각을 사용하는 패턴이 바뀌고, 감각의 패턴이 바뀌면 생각의 회로도 바뀌고, 생각의 회로가 바뀌면 당연히 행동도 욕망도 관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20대에 놓쳐버린 ‘기회들’보다 20대에 놓쳐버린 ‘감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기회는 노력해서 다시 만들 수도 있지만, 감성은 노력만으로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 지식은 추구하여 얻을 수도 있지만, 감성은 노력보다 ‘그때 그 순간’의 우연에 기댈 때가 많다. 게다가 20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감성 중에서도 ‘설렘’ 같은 것은 정말 아무리 애를 써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첫사랑의 설렘을 억지로 조작해낼 수 없듯이, 나이가 들수록 순수한 설렘을 느끼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해도 대부분 웬만하면 설레게 되어 있는(^^) 20대야말로 ‘설렘’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는 가장 멋진 연령대가 아닐까.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갑자기 찾아오는 두근거림. 이런 건 정말 20대다운 감성, 20대가 제대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20대에 간직해야 할 소중한 키워드, 그 두 번째 이야기로 사랑이 아니라 여행을 꼽은 것은 바로 그 소중한 ‘감성’의 보물창고가 나에겐 여행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너무나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오히려 과대평가 된 측면도 있다. 모두가 응원하는 사랑보다 여행의 손을 먼저 들어주는 것은, 사랑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다. 나는 20대가 스스로 통과해야 할 가장 중요한 미션 중 하나가 ‘혼자서도 행복해질 수 있는 법을 배우는 인턴코스’라고 생각한다. 마음속에 미래의 위험에 대비하는 자가 치유 시스템을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행복해지는 법’의 핵심이 아닐까. 짝사랑조차도 ‘상대’를 필요로 하는 것에 반해, 여행은 혼자서도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유난히 겁도 많았고, 여행 하면 ‘돈’이 먼저 떠올랐던 20대의 나는 여행을 막연히 두려워했다. 사실 여행이 정말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께 폐를 끼치기도 싫고 수중에 목돈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여행을 그저 ‘거대한 신 포도’로 만들어버렸다. 여행이라는 탐스러운 포도열매를 ‘아, 별거 아닐 거야, 분명히 시고 떨떠름할 거야’라고 폄하해버림으로써 멀리 여행을 떠날 수 없는 나 자신을 합리화했던 것이다. 부모님이 어학연수를 보내주신다고 등을 떠밀어도, 나는 짐짓 괜찮은 척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다.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기 싫어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리석었다. 멀리 나갈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기회라도 있다면, 언제든 어디로든 떠나는 게 최고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은 ‘현재의 나’는 ‘20대의 나’에게 부질없이 타이르곤 한다. 그때 이것저것 뒤돌아보지 말고 훌쩍 떠나지 그랬니. 다녀오면 더 밝고 씩씩해진 모습으로 부모님을 더욱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돈보다 중요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돈 자체보다도 돈에 대한 생각에 짓눌려 있었던 20대. 나는 여행이야말로 그런 어리석음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놓쳐버린 경험’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여행 늦바람이 불어 이제 틈만 나면 적금을 깨서라도 ‘어디로 여행갈까’를 궁리하는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시간은 좀처럼 사람을 바꿀 수 없지만, 공간은 기어이 사람을 바꾼다는 것을. 공간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동선을 바꾼다. 동선이 바뀌면 감각을 사용하는 패턴이 바뀌고, 감각의 패턴이 바뀌면 생각의 회로도 바뀌고, 생각의 회로가 바뀌면 당연히 행동도 욕망도 관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승원

저마다 다른 곳에서 파리를 찾은 여행자들. 서로가 서로를 모르지만, 언어도 문화도 피부색도 다르지만, 여행자의 표정들은 어쩐지 묘하게 서로 닮았다. 일상의 리듬을 깨뜨리는 긴장감,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자 특유의 설렘, 버리고 떠나온 일상에 대한 약간의 궁금증, 지금 이 순간을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절박함. 이런 것들이 고루 섞여 있는 여행자들 특유의 어슴푸레한 표정이 있다.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인데도 어쩐지 낯익은 그런 느낌은 ‘여행자표’라는 공통의 아이덴티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29살, 내 첫 번째 유럽여행. 드디어 내가 모은 돈으로 첫 번째 유럽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나는 내 삶에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 그리고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혜안. 나에겐 바로 그런 것들이 부족했다. 난 국문학을 전공하는 어설픈 문학청년이었지만 실은 문학보다 삶에 지쳐 있었다. 목전에 다가온 서른 살이 두려웠고, 열심히 살았는데 이루어진 건 하나도 없다는 생각 때문에 피로했고, 사랑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사랑은 행복보다는 고통에 가까운 무엇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삶에 지쳐 있던 내 눈에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좀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본 아름다움은 단지 유럽의 위대한 문화유산이 아니었다.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삶을 바치는 사람들.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껴보기 위해 저마다 큰 대가를 치르고 산 넘고 물 건너 이국산천을 찾아온 사람들. 아름다움 하나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아름다움의 위대한 힘이었다.

여행의 두 번째 즐거움은 낯선 공간에서의 새로운 의사소통이었다. 말이 잘 안 통하기 때문에 수많은 ‘언어의 대체재’로 소통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수많은 여행객들은 서로에게 사진을 찍어주고, 손짓 발짓으로 길을 물어보고 대답하며,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이지만 반갑게 웃어주고 인사하며, 때로는 소박한 영어 실력을 십분 발휘해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꽤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화폐가 그토록 소중한 소통의 미디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화폐는 그저 물물교환의 매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전혀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끼리 아주 짧게나마 대화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소통의 매개였다. 나는 ‘1유로의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그때 깨달았다.

당시 유럽은 커피값이 매우 싸서―물론 다국적기업의 브랜드 커피는 그곳도 우리나라처럼 비싸다―현지인들이 먹는 보통 커피는 1유로면 충분히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아무데서나 파는 그 1유로짜리 커피가 어찌나 맛있던지, 나는 까페오레와 에스프레소의 맛에 단단히 중독되었다. 당시에는 유로화의 환율도 매우 낮았기 때문에 정말 부자가 된 느낌으로 신나게, 신기하고 재미난 물품들을 마음껏 사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사진 한 방, 엽서 한 장, 1유로짜리 동전 하나. 이렇게 사소한 사물들로 우리는 진솔한 소통을 할 수 있구나. 1유로만으로 이렇게 커다란 행복을 살 수 있구나. 이런 자잘한 행복을 느끼며 점점 나는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는 일이 많아졌고,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사람들은 ‘얼굴이 밝아졌다’고 칭찬해주었다.

                                                                                                                     ⓒ이승원

센 강과 루브르 박물관을 잇는 아름다운 다리, 퐁 데자르(Pont des arts)에 걸려 있는 수 많은 자물쇠들. 보행자 전용 다리로서 밤늦게 ‘술’만 마시지 않으면 모든 행동(?)이 용납되는 자유와 낭만의 상징이다. 사람들은 모델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지나가는 유람선을 향해 손을 흔들기도 하고, 거리의 아티스트들이 연주하는 아름다운 음악을 듣기도 하며 여유로운 한때를 보낸다. 다리 위에 걸려 있는 수많은 자물쇠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소중한 기억의 보물창고다.


여행의 세 번째 즐거움은 ‘타인의 삶’을 자연스럽게 엿보는 기쁨에서 우러나왔다. 스페인의 한 공항에서 나는 아랍 계통의 한 가족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 집 아기가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 눈길의 따스함(?)을 그 부부도 알아봤는지, 처음 보는 나에게 자기 아기를 한 번 안아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엉겁결에 아기를 부여안고 그 보송보송한 아기의 볼에 내 얼굴을 맞대었다. 아기의 그 새까맣고 윤기 나는 피부와 해맑은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유난히 아기를 좋아하는 것이 전혀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에게도 저절로 느껴졌나 보다. 서로 말이 안 통하는 우리는 어떤 깊이 있는 ‘언어적’ 대화도 할 수 없었지만, 자기 아기를 선뜻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안겨주는 그 부모의 열린 마음을 통해 누구보다도 깊이 있는 ‘비언어적’ 소통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차이는 차별을 낳는다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차이’를 통해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이 여행의 묘미임을 깨달았다. 피부색도, 언어도, 문화도, 그 모든 것이 이렇게나 다른데 따스한 새 생명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는 ‘우리’는 그 순간 더할 나위 없는 하나였다. 차이를 통해 갈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통해 오히려 더 깊은 동질성을 회복한 것이었다. 우린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렇게나 다르게 살아왔지만, 우리도 모르게 이렇게나 닮아 있었구나.


p.s. 다음 주에는 20대의 소중한 키워드 2/20, ‘여행’ 그 두 번째 이야기로 만나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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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여울

정여울은…

타칭 문학평론가, 자칭 글쟁이 또는 글순이.
문학과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여행과 음악을 짝사랑하는 사람.

<한겨레신문>에 ‘정여울의 청소년 인문학’ 코너를 연재하고 있으며, 2012년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네필 다이어리1, 2≫ ≪정여울의 소설 읽는 시간≫, ≪미디어 아라크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정여울의 문학멘토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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