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우장 맞은편 절벽 부근에는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공원 끝은 낭떠러지다. 그리고 공원 끝머리에는 절벽에서 1m쯤 돌출되게 만든 작은 테라스가 있다. 아래로 무너져 내릴 염려는 없겠지만, 아찔해 보인다. 멋진 전망을 보려면 용기를 내야 했다. 테라스 끝으로 가는 길은 고작 몇 발짝밖에 안 됐지만, 다리가 후들후들거린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테라스 끝의 난간을 잡자 론다의 그림 같은 전경이 펼쳐지면서 내 눈을 감동하게 한다.
아, 이래서 릴케가 그토록 찬사를 퍼부었구나. 마치 <천공의 성 라퓨타(미야자키 하야오가 1986년에 만든 애니메이션)>처럼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다. 발아래에는 강렬한 태양에 맞서 거친 자연이 꿈틀대고 있다. 그 속에서 트래킹을 하는 사람들은 개미처럼 작고 또 느리게 움직인다. 위대한 자연과 비교하면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그들은 차도 자전거도 아닌 순수한 육체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발을 내딛는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된 그 모습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이번에는 공원에서 구시가지 방향으로 난 절벽을 따라 걸었다. 스페인 정부에서 운영하는 파라도르 호텔
Parador de Ronda을 지나는데 헤밍웨이의 얼굴이 들어간 타일 표지를 발견했다. 파세오 데 어니스트 헤밍웨이
Paseo de E.Hemingway, 헤밍웨이의 이름을 딴 산책로다. 산책로라 해봤자 파라도르 호텔 건물과 절벽 사이의 1m 남짓한 공간이다. 왼쪽은 호텔 건물 벽 일부와 카페테라스가 있고, 오른쪽은 철로 된 난간 아래 낭떠러지가 보인다. 이런 곳에 좁은 산책로를 만들어 헤밍웨이 이름을 붙이다니, 헤밍웨이는 벌써 하늘나라로 갔지만, 이렇게 좋은 자리에서 멋진 전망을 영원히 감상하고 있을 것만 같다.
론다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눈다. 옛날 아랍인이 살던 구시가지인 라시우다드
La Ciudad와 투우장이 있는 신시가지인 엘 메르카디요
El Mercadillo가 그것이다. 이 두 마을은 150m 깊이의 타호
Tajo 협곡을 사이에 두고 있다. 두 곳을 잇는 다리라면 11~16세기에 만들어진 비에호 다리
Puente Viejo 또는
PuenteArabe가 있었지만, 엎어지면 코 닿는 이웃마을에 갈 때조차 한참을 돌아가야 해서 아주 불편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당시 왕인 필립 5세였다. 필립 5세는 직경 35m의 아치형 다리를 생각했다. 그러고는 야심 차게 공사를 시작했지만, 8개월 뒤 5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다리는 무너져버렸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새로운 공사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안달루시아의 건축가인 호세 마르틴
Jose Martin이 앞장섰는데, 그는 깊은 골짜기 아래쪽부터 단단히 돌을 쌓아올렸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적어도 무너질 염려는 없었다. 1751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793년에 완공했으니 무려 42년이 걸린 셈이다. 길이 120m, 높이 98m로 마치 거대한 댐처럼 견고해 보이는 누에보 다리
Puente Nuevo. 지금 누에보 다리는 론다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다.
사진으로만 보던 다리를 실제로 보니 정말 놀라웠다. 숫자에 불과한 협곡의 높이를 체감하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아래쪽에서 보면 더 실감난다. 현재 누에보 다리는 마을의 소통과 경제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날에는 부정적인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 때는 죄수를 가두는 감옥이었고, 적을 처형하는 곳이었다. 처형방법은 간단했다. 협곡으로 던지면 끝! 당시 공화파와 프랑코파가 번갈아가며 마을을 점령했을 때, 적을 실컷 때린 뒤 협곡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이 사건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언급한다. 지금은 관광객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멋진 다리로 탈바꿈했지만, 누에보 다리는 이렇게 끔찍한 과거의 아픔과 슬픔을 간직한 채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다.
누에보 다리 주변에서 바라본 구시가지 전경에 반한 나머지 연신 셔터를 눌러댔더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참 만에야 구시가지로 들어섰는데 새하얀 건물들이 앙증맞게 늘어서서 나를 맞는다. 그런데 뜨거운 태양 아래 잠시 걸었을 뿐인데 기운이 다 빠져서 만사가 귀찮고 그저 쉬고만 싶다. 나는 구시가지 중심가의 산타 마리아 성당 뒤편에 있는 골목길로 향했다. 관광객들이 담벼락에 드리운 그늘을 따라 걷고 있었다. 모두 똑같이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한 줄로 걷는 모습이 영락없는 개미 같다.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현지인들은 시에스타로 편안히 쉬고 있는데, 관광객들만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온몸을 내놓고 용감하게(?) 돌아다니는구나.
돌아가는 길에 작은 팻말 하나를 보았다. 카사 돈 보스코
Casa Don Bosco, 돈보스코의 집이라. 문이 열려 있길래 슬쩍 안을 들여다봤다. 형형색색의 꽃과 잘 가꿔진 화초들이 보기 좋게 정리돼 있다. 낡은 문 너머로 보이는 파티오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발을 들여놓았다.
20세기에 지어진 이곳은 그라나디노스
Granadinos 가족의 소유인데,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활동하던 늙고 병든 신부님들을 위해 안식처로 제공된 곳이란다. 집 안은 단단한 호두나무로 만든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다. 거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드라마틱한 풍경에 서둘러 정원으로 나갔다. 역시 압권은 정원이다. 가톨릭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묘하게 융합된, 꿈 같은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작지만 우아하고 기품이 넘쳐흐르는 정원은 무어 양식의 타일과 아름다운 꽃으로 둘러싸여 있다. 정원은 정원인 동시에 발코니가 되어 700m 아래의 드넓은 평원을 바라본다. 굉장했다. 그야말로 하늘 위 공중정원이다.
물론 멋진 전망을 자랑하는 공중정원은 다른 나라에도 있다. 프랑스 니스 근처, 지중해의 발코니라 부르는 에즈
Eze에도 공중정원이 있다. 에즈의 정원은 지중해 앞에 뾰족하게 솟아오른 산꼭대기에 있는데, 정원 자체가 발코니가 되어 코발트와 에메랄드 빛을 넘나드는 아름다운 지중해를 드넓게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에즈가 공원형식의 정원이라면, 이곳은 집에 딸린 정원이지 않은가!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세수도 안 하고 눈곱도 안 뗀 채로 이런 풍경을 날마다 봤을 테니 얼마나 행복했을까. 평생 봉사활동을 하며 살아온 늙고 병든 신부님들의 마지막 안식처가 이곳이라니, 신부님들은 이미 천국에서 살고 계신지 모른다.
걷느라 지쳐 있던 몸에 금세 기운이 도는 것 같다. 문득 나도 릴케처럼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나는 아름다운 정원을 찾아 세상을 헤맸다. 그러다 마침내 발견한 곳이 바로 론다의 하늘 정원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스페인의 진짜 매력, 더 알고 싶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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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소도시 여행 박정은 저 | 시공사
중남미 여행 중 스페인어를 배우며 시작된 이 나라에 대한 관심은 저자를 마침내 순례자의 길로 이끌었다, 순례자의 길은 저자에게 큰 깨달음이자 행운의 길이었다. 이 길에서 저자는 스페인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에 감동하고, 감칠맛 나는 음식에 매혹당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저자는 다시 스페인을 찾았다. 이번에는 스페인 소도시 이곳저곳을 걸어다녔다. 마치 둘시네아 공주를 찾아 걸었던 돈 키호테처럼. 흔히 정열, 사랑, 자유로 표현되는 스페인은 감히 한 단어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