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일단 마을의 중심가인 토리코 광장Plaza del Torico으로 뛰었다. 광장을 둘러싼 한 건물 앞에서 비가 멈추길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의 결혼식이 있었나 보다. 남자들은 정장을, 여자들은 빛 고운 공단 드레스를 차려 입고 테이블에 앉아 술기운 오른 얼굴로 유쾌하게 떠든다. 술을 파는 바Bar인가 하고 가게 앞에 놓인 메뉴판을 들여다보니 식사 메뉴가 있다. 옳거니, 잘됐다. 비도 피할 겸 출출한 배도 채울 겸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자세히 살피니, 오, 이곳은 하몽
Jamon 전문점이로구나. 스페인의 대표적인 음식을 꼽으라면 보통은 ‘파에야’를 떠올리지만, 파에야는 발렌시아 지방의 대표 음식이다. 스페인 여행을 제대로 했다면 누구나 주저 없이 하몽을 꼽는다. 하몽은 스페인 전통음식으로, 돼지 뒷다리를 천연소금에 절인 다음, 건조하여 만든 생햄이다. 이탈리아의 프로슈토
Prosciutto와 비슷한 생햄이지만, 맛이나 색이 완전히 다르다. 프로슈토가 밝은 색상의 부드러운 맛이라면, 하몽은 육포처럼 진한 색상에 맛이 두드러진다.
하몽을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먼저 손질한 뒷다리를 2주간 천연소금에 덮어둔다. 이 과정에서 고기의 수분이 빠지고 염분이 고기 안으로 배어든다. 2주가 지나면 세척과정을 거쳐 6개월 동안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아 건조한다. 지역에 따라 6~18개월이 지나면 완성되는데, 하몽의 품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바람과 온도다. 질 좋은 하몽은 주로 기온이 낮고 건조한 산악지역에서 생산된다. 해발 915m의 산에 있는 테루엘이 바로 그런 곳이다.
테루엘의 하몽은 해발 800m 이상의 산에서 방목해 키운 돼지로 만드는 하몽 세라노
Jamon Serrano로, 최소 14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하몽 세라노는 ‘산에서 생산된 하몽’이란 뜻이다. 하몽 이베리코
Jamon Iberico는 떡갈나무 숲에서 18개월 이상 도토리만 먹인 흑돼지로 만들어 가격이 훨씬 비싸다. 스페인 서쪽과 서남쪽의 카세레스
Caceres, 바다호스
Badajoz, 세비야
Sevilla, 코르도바
Cordoba, 우엘바
Huelva가 주산지다. 그중에서 우엘바의 작은 마을, 하부고
Jabugo의 하몽이 가장 유명하다.
하몽을 먹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단다. 가장 간단하게는 식사용 빵에 얇게 저민 하몽을 넣고 샌드위치로 먹는다. 부드럽고 구수한 빵은 하몽의 깊은 맛을 음미하기에 제격이다. 또 다른 방법은 와인을 마실 때 타파스로 먹는다. 하몽은 와인과도 찰떡궁합을 자랑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달콤한 멜론과 함께 먹을 때 최고의 맛을 느낄 수 있다. 하몽의 짭조름한 맛과 달콤한 멜론의 환상적인 조화는, 음,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테루엘의 하몽은 어떤 맛일까 궁금했다.
메뉴판을 보고 테루엘 특산 하몽을 주문했다. 가격도 7유로 정도로 비싸지 않았는데, 접시 한가득 하몽이 나온다. 역시 주산지라 뭐가 다르긴 다르다. 비스킷과 올리브유, 토마토가 함께 나왔는데 어떻게 먹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지?
입 안에 침은 고이고, 얼른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어떻게 먹는 거죠?”
영어를 못하는 직원이 직접 시범을 보여준다. 먼저, 비스킷에 올리브유를 바르고, 그 위에 토마토 퓨레를 바른 하몽을 얹어 먹으란다. 유분이 있는 음식을 먼저 올리고 그다음에 수분이 있는 음식을 올리는 것이다. 토스트에 버터와 잼을 바르는 방식과 같다. 카나페처럼 비주얼도 훌륭하다. 으흠, 그럼 맛을 한번 볼까?
한 입 베어 문다. 바사삭. 올리브유가 스며든 비스킷에서 고소함이 느껴지고, 토마토는 바삭한 비스킷 때문에 텁텁한 입 안을 촉촉이 적셔준다. 오늘의 주인공인 하몽은 처음엔 짭조름한 맛이 나다가 조금 지나면 고기 특유의 묵직하고 깊은 맛이 우러난다. 씹으면 씹을수록 고산지대 바람과 기온으로 숙성된 감칠맛이 침샘을 자극한다. 목으로 넘기기가 너무 아깝다.
‘이것이 음식의 마리아주, 환상의 궁합이로구나!’
혼자서 맛난 음식을 먹으니 친구들이 생각난다. 테루엘에 친구들과 함께 왔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아쉽다. 왁자지껄 떠들며 함께 웃어주는 친구들이 그리운 밤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스페인의 진짜 매력, 더 알고 싶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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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소도시 여행 박정은 저 | 시공사
중남미 여행 중 스페인어를 배우며 시작된 이 나라에 대한 관심은 저자를 마침내 순례자의 길로 이끌었다, 순례자의 길은 저자에게 큰 깨달음이자 행운의 길이었다. 이 길에서 저자는 스페인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에 감동하고, 감칠맛 나는 음식에 매혹당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저자는 다시 스페인을 찾았다. 이번에는 스페인 소도시 이곳저곳을 걸어다녔다. 마치 둘시네아 공주를 찾아 걸었던 돈 키호테처럼. 흔히 정열, 사랑, 자유로 표현되는 스페인은 감히 한 단어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