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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화가 얘기하는 <개그콘서트>의 한계 - 코미디 같은 세상에서 코미디언이 사는 법
“웃기고 자빠졌네” 코미디 같은 세상에서 코미디언이 사는 법
여성, 연예인, 엄마, 이혼경력,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 등 그가 보여주는 스펙트럼은 넓다. 그런데 그 스펙트럼 안에 의도하지 않게 우리 사회의 치부가 여럿 들어 있다. 연예인에 대한 언론보도의 문제점, 연예인의 사회 참여에 대한 인식, 이혼 여성으로서 당해야 했던 폭력, 정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방송까지 그 작은 몸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김미화란 코미디언 한 명의 인생역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참 흥미로웠다.
“내 밥그릇만 지키며 살고 싶지 않다”
2012년 1월 31일 언론인권센터는 제10회 언론인권상 수상자 중 한 명으로 김미화를 선정했다. “언론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 언론피해소송을 끝까지 진행해 오보와 언론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다는 것이 선정 이유였다.1)
언론인권상을 받기 직전 김미화는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KBS 김인규 사장님과 MBC 김재철 사장님께 고맙다”며 “두 분 덕분에 제가 생각지도 못한 상을 받았다. 나중에 방송 일 그만두실 때 제가 자장면이라도 한 그릇 사야할 것 같다”며 뼈있는 농담을 남겼다.2) 그리고 2010년 KBS 블랙리스트 논란과 2011년 8년간 진행해온 MBC 라디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서 퇴출당한 것과 관련해 “비겁하게 순응하면서 내 밥그릇만 지키며 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3)
그 말 속에 그가 그동안 당한 고통과, 그것을 견뎌냈던 결기가 떠오른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계속된 MBC 퇴출 논란, KBS에 블랙리스트가 있는지를 물으며 트위터에 호소한 것 때문에 KBS로부터 당해야 한 명예훼손소송, 인터넷 『독립신문』에서 ‘친노좌파’라는 어이없는 색깔 딱지를 받은 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고 승리하기까지의 과정 등을 통해 ‘코미디언’ 김미화는 우리 사회 언론의 코미디 같은 치부와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그가 MBC 노조의 파업을 지지한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2012년 2월 10일 전국언론노동조합 MBC 본부(MBC 노조)의 파업현장. “니덜이 살아야 내가 산다 -순악질 누나”라는 문구를 부착하고 나선 김미화는 언론인권상 특별상으로 받은 상금으로 산 떡을 돌린 뒤 “이 떡은 재철이 오빠와 이우용 본부장 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요즘 집 나간 재철이 오빠를 찾고 있다고 들었다. (지금) 청와대에서 조인트를 까이고 있는 게 아닐까”라고 풍자한 뒤 “여러분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정말 많다. 삭발투쟁은 너무 많이 했으니 하지 말라. 잘 아는 미장원이 있으니 나처럼 파마를 해라. 삭발 대신 파마데이(DAY)를 갖자”고 말했다. 또 자신의 파마머리를 “에리카 김 언니가 갖고 있는 뉴클리어 밤(Nuclear Bomb) 머리”라고 말하며 좌중에 웃음을 안기기도 했다.4)
결기 어린 파업현장에서도 웃음을 전하는 김미화는 천상 코미디언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에게 ‘투사’의 이미지가 어른거린다. 시절이 하 수상해서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코미디언 김미화로 살고 싶다”는 그가 MBC 노조의 파업을 지지하고,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꼽사리다>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5) 이 모두가 “내 밥그릇만 지키며 살고 싶지 않았다”는 말로 수렴된다.
미리 얘기하자면 이 글은 “내 밥그릇만 지키며 살고 싶지 않았다”는 코미디언 김미화가 <개그콘서트>를 만들며 후배들에게도 밥그릇을 나눈 이야기,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코미디언들의 밥그릇을 키운 이야기, 기부와 NGO 홍보대사로 밥그릇을 나눈 이야기, 밥그릇을 빼앗겠다는 세력에 맞서 밥그릇보다 명예를 지킨 이야기 등이 주를 이룰 것이다. 각설하고 김미화의 밥그릇 얘기, 들어보자.
순악질 여사의 탄생
김미화는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폐병으로 고생하는 아버지, 집안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날품팔이를 하는 어머니 밑에서 큰 딸로 태어난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어머니가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아버지 병 수발은 그의 몫이었다. 9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을 처음 목격한 것도 김미화였다.
“어머니가 장사를 나가셔서 아버지 혼자 돌아가셨습니다. 밖에서 놀다 집에 들어와 방문을 여니 공기가 싸늘했어요. 초등학교 2학년 어린 나이였는데도 그때의 섬뜩함을 잊지 못해요.”6)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에도, 또 돌아가신 뒤에도 생계는 어머니가 책임져야 했다. 김미화의 어머니는 보따리 옷 장사, 식당일, 건물 청소원 등을 하며 돈을 벌면서 자식들을 키웠다. 입 하나 덜려고 김미화를 외국으로 입양 보내려고 했을 정도로 어려운 집안 환경이었고, 아버지가 다른 가정을 두었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성을 따라 박미화에서 김미화로 바꾼 아픈 가정사도 있었지만 그는 명랑했다.
“명랑한 성격이 인자 속에 있는 것 같긴 해요. 아버지가 폐를 앓아 누워계실 때에도 어른들 앞에서 이미자 씨 노래 흉내 내고 1원씩 5원씩 받아 군것질하는 재미에 나돌아 다녔어요. 수유리 천지촌 부근 반지하방에 살았어요. 창문 위로 사람들 발이 지나다니는. 엄마는 보따리 옷 장사를 하느라 시골을 다니다 한 달, 보름 만에 집에 돌아오시니 제가 아버지 수발을 들어야 했는데 만날 논둑 밭둑 뛰어다니며 노래하고 삐라 줍고 자연을 즐기고……. (웃음) 환자 입이 계속 마르는데 주전자에 거즈를 담가 아버지 입가에 연결해놓고 나가 놀았어요. 어디서 그런 잔머리가 나왔는지! 그러다 9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해장국집 하느라 날 돌볼 정신이 없었죠. 한 친구가 ‘아빠도 없는 게’라고 놀려서 걔를 때렸는데 선생님이 이유도 묻지 않고 제게 의자를 들려 벌을 세웠어요. 반항심에 학교를 안 가고 길음시장에서 살다시피 했죠. 결국 선생님이 집에 연락을 했고 엄마가 일수 찍는 치부책에 칸을 그려서 학교 갈 때마다 선생님 사인을 받아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선생님 사인이 너무 쉬운 거예요. (웃음) 며칠 학교 다니다 그냥 사인을 제가 흉내 내고 한동안 또 안 갔죠. 그제야 엄마가 상황을 알고 전학을 시켜줬어요. 새 학교 친구들은 제가 아빠 없는 아이라는 걸 몰랐어요. 그때 ‘아, 나를 놀린 그 애한테 내가 아빠 없는 아이 표시를 낸 게 화근이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더 까불고 명랑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약간의 성격개조였다고나 할까?”7)
고등학교 시절 그는 착하고 억센 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새벽시장에 나가 배추 시래기를 모아 엄마가 운영하는 해장국집에 날라주고 등교했고, 차비를 아껴 어머니에게 돈을 모아 갖다 주기도 했다. 그렇게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관광회사 경리사원으로 6개월 정도 일을 하다가 코미디언이 되기로 결심하고 1983년 KBS 개그콘테스트에서 은상을 받으며 코미디언이 되었다. 하지만 초기에는 어려웠다. 연기력은 인정받았지만 당장 수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조금 부유했던 동기 임미숙, 이경애 등에 빌붙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방송사 공채 개그맨으로 뽑히면 첫 6개월 동안은 연구생이라며 돈을 안 줘요. 굶고 걸어 다니고 그랬죠. 그때 정말 주변에 폐를 많이 끼쳤어요. 점심에는 무조건 개그맨 동기 중에 부유한 편인 임미숙*이경애 등에게 빌붙었어요. 동기들이 나한테 얘기를 안 하고 밥을 먹으러 가면 나는 또 식당을 뒤져서 그들을 찾아냈죠. 내가 처해 있는 현실, 가난하다거나 부모님이 편찮으시다거나 이런 문제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거죠. 그걸 내 의지로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예요. 상황을 냉정하게 보고 젊다는 걸 무기로 용기를 내세요. 어느 정도 뻔뻔해져야 할 필요도 있죠.”8)
그런 세월을 거쳐 1986년 김미화는 순악질 여사로 ‘떴다’. 사실 지금까지도 김미화 하면 생각나는 게 순악질 여사다. 1986년 <쇼비디오자키>의 한 코너였던 ‘쓰리랑부부’에 코미디언 김한국과 함께 한 순악질 여사는 오늘날에도 김미화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일자 눈썹에 “음매 기살어, 음매 기죽어”를 연발하고, “팰 데가 없는 게 아니고 빈틈이 없는 것이제”라는 호언장담을 하는 자그마한 체구의 순악질 여사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후에도 그는 KBS와 SBS 등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며 코미디언으로서의 입지를 넓혀나갔다. 그 사이 1986년 23살이란 젊은 나이에 결혼도 했고, 두 딸의 엄마가 되었다.
개그콘서트 탄생 비화
김미화는 코미디 연기를 위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공부를 해야만 “코미디가 저질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재미있고 다양한 웃음거리를 원하는 시청자들의 욕구에 맞출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9) 코미디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이 말처럼, 코미디에 대한 애정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애정은, 이제는 KBS의 장수프로그램으로 정착한 <개그콘서트>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1999년 7월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첫 방송을 타고, 9월부터 정규방송이 된 <개그콘서트>는 사실 그가 아니었으면 탄생하지 못했을 프로그램이었다. 김미화는 <개그콘서트> 탄생의 산파 역할을 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한다. 다소 길지만 <개그콘서트>의 탄생비화가 담겨 있기에 인용해본다.
“산파가 아니고 제가 낳았다고 할까.(웃음) 주저하는 KBS 본부장을 기획서 들고 쫓아다녔어요. 3개월간 신인들을 연습시킬 테니 기회를 달라, 파일럿을 떠보고 재미없으면 안 내보내면 되지 않냐고요. PD가 결정된 다음 전유성, 백재현 씨를 끌어들였죠. 그때 <이소라의 프로포즈>가 인기였는데 그걸 보면서 저런 공연은 방청객이 스스로 오는데 코미디는 왜 돈 주고 방청객을 불러야 할까 고민했거든요. 연극식으로 관객을 모으면 재밌겠다 싶었고 백재현 씨는 그런 연극을 이미 하고 있었어요. PD가 관객이 안 오면 어쩌나 겁을 내서, 첫 회는 컬투가 나온다는 걸 부각하고 신인 개그맨도 함께한다는 내용을 뒤에 붙였죠. 컬투가 대학로 연극을 하고 있었으니 그 공연을 공짜로 볼 수 있다면 방청객에게 메리트가 생기잖아요. 그러나 사실은 신인들이 주인공이었죠. 거기서도 제가 중요하게 생각한 컨셉은 선배들이 후배들 공연을 뒤에 앉아 지켜본다는 거였어요. 김대희, 김영철 같은 2~3개월 된 친구들이 연기할 때 20~30년 선배들의 웃는 모습이 화면에 비치면 시청자가 ‘얼마나 웃기기에 베테랑들이 웃을까’ 하고 인지하게 되니까요. 실상 우리는 연습 장면을 수십 번 봐서 웃음도 안 나고 지키고 앉아 할 일도 없지만 반드시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자칫 잘못하면 선배만 있고 후배는 없거나, 선배는 없고 후배만 있는 코미디가 될까 봐 걱정이 돼요. 그맘때 저는 서세원 씨와 방송사에서 7년째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고 시청률도 괜찮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언니는 잘나가는 코미디언이지만 너무 어른들을 위한 코미디만 하는 거 아냐? 고루해 보여’하는 거예요. 성인 코미디를 하는 내 자신에 불만은 없었지만 후배들과 뭉쳐서 한다면 스스로 젊어지고 5년 할 걸 10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후배들을 위한 무대를 만들어주는 일은 어찌 보면 내 파이를 나눠주는 거라 선뜻 용기가 안 났어요. 좋은 선배로 남고 싶은 욕심도 강하지만 내가 만든다고 그 무대에서 내가 오래 갈 것도 아니고 두려웠죠. 하지만 전체적으로 코미디가 발전해야 결국 코미디언인 내 가치도 올라갈 거라고 판단했어요.”10)
<개그콘서트>를 만들어낸 힘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밥그릇 나누기’였던 것이다. 스스로 밝힌 것처럼 자신의 파이를 나누는 것 때문에 선뜻 용기가 안 났지만 그것은 결국 후배들을 키우고, 코미디라는 대중예술 영역의 밥그릇을 키운 결과가 되었다. 그와 함께 코미디언 김미화의 가치도 올랐다. 하지만 그는 <개그콘서트>의 한계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개그콘서트>를 기획했을 때 저는 <젊음의 행진>의 ‘짝꿍들’처럼 1, 2, 3, 4기를 배출하고 그중에 스타를 만들어 다른 프로그램에 내보내는 형태를 생각했어요. 그때 KBS 코미디 프로그램이 3개였는데 예컨대 심현섭, 김영철이 개콘 1기의 스타로 배출된다면 그들을 선배 프로그램으로 보내 기운을 불어넣고 개콘은 2기를 뽑는 거죠. 그러면 세 프로그램이 다 살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방송은 제 생각보다 더 상업적이었어요. 개콘이 잘 되니 출연자들에게 다른 프로그램을 못하게 했고 오히려 다른 프로그램이 폐지된 거예요. 개콘이 제작비 대비 효과가 컸으니까요. 신인은 출연료가 저렴한 데다 원래 제가 요구한 컨셉이 빈 무대에 조명만 때리는 거라서 세트도 없었거든요. …… 발전적 방향으로 간 건 맞는데 기성 코미디언 설 자리가 없어진 건 실수였다 싶어요.”11)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김미화가 터를 잡은 <개그콘서트>는 한국 코미디 프로그램의 대명사로, KBS의 효자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삶의 철학, 사회참여
김미화는 사회활동으로 유명하다. 1990년대 초부터 ‘효박물관 건립’, ‘사랑의 삼각끈 운동본부’ 설립 등을 통해 기부활동을 계속해왔다. 또 80여개에 이르는 시민사회단체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사회활동을 시작한 걸까?
“특별한 계기는 없구요. 원래부터 이런 일에 기본적으로 관심이 있었고, 조금 인기를 얻게 되면 그런 활동들을 펼쳐야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제가 가난하게 살았고, 동회에서 밀가루도 타먹어 보고, 혜택을 어렸을 때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유명인이 되면 이런저런 좋은 일을 많이 해봐야겠다고 생각했구요. 활동을 한두 군데 하다 보니 자꾸 도와달라고 연락이 오고, 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의 유명한 NGO는 모두 관련이 되는 식으로 활동이 넓어지더라구요.”12)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고 하지만, 그는 한번 도와주겠다고 마음을 먹은 곳은 끝까지 도와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남의 눈을 의식해 일시적으로 불우한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진심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주위의 평가도 이 때문에 나온 것이다.13)
기부와 홍보대사 등을 통해 사회활동을 해오던 김미화는 1999년부터 그동안 해왔던 방식과는 조금 다른 식으로 사회에 참여한다. 1999년 말 참여연대 대표들을 우연한 기회에 만나 참여연대 회원이 된 그는 2000년 2월 총선시민연대 집회에 참석해 “아줌마 대표로 오늘 집회에 참석했다”며 “정치인들이 시민을 무서워하는 세상을 만들자”고 주장했다.14) 이후에도 여러 차례 총선시민연대 집회에 나와 정치개혁을 주장했고, 2002년 대선 때에는 투표서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2년 말 미군 장갑차에 치어 숨진 여중생 미선이*효순이 사건이 일어나자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그가 소파(SOFA) 개정 시위 현장에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더구나 자신이 홍보대사로 있던 녹색연합 측에 부탁해 연예인들의 서명을 받는 등 주도적으로 나선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를 “두 딸을 키우는 엄마의 마음으로 우리 딸들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 영화나 방송 등 대중예술에 비친 미국의 모습은 평화와 정의의 나라로 그려져 왔는데 그 나라의 정의가 이런 것이라면 우리들이 진짜 정의의 모습을 알려주고 싶다”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15)
촛불집회에 참여하며 그는 연예인의 사회참여에 눈뜨기 시작했다. “연예인은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만큼 사회 분위기를 바꾸고 개혁하는 데 호소력과 파괴력이 크다”고 말한 그는 연예인이 가진 힘을 잘 알고 있었고, “‘돈을 벌면 사회에 뜻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20여 년 전 코미디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내 삶의 철학이었다”며 사회참여를 계속해갈 것임을 천명하기도 했다.16)
이후에도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03년 3월 그는 참여연대와 함께 이라크전 파병 동의안 처리를 반대하며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유니세프 특별대표로 아프리카에 자주 갔는데, 그곳에서 전쟁으로 팔다리를 잃은 아이들을 수없이 많이 봐왔기 때문에 전쟁을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1인 시위 자리에서 그는 “대한민국 국회는 저를 전쟁범죄국 국민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저의 시위는 누구를 겨냥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반대할 뿐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을 원합니다”라고 말했다.17) 2003년 5월에는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에 참여해 길거리 특강을 통해 호주제 폐지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그는 연예인의 사회참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회참여는 누구한테 보여주거나 인기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인기에 보탬이 된다고 봐요. 제가 이만큼 오래 활동할 수 있는 것도 봉사하는 모습을 통해 김미화가 하는 한마디는 진실일 것 같다는 한 자락 믿음을 대중의 마음 저변에 깔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떤 토크쇼를 하건 코미디를 하건 남을 돕는 이의 연기를 보는 것과 돕지 않는 사람의 연기를 보는 건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요.”18)
그가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를 맡은 것도, 그리고 KBS 블랙리스트 파문과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퇴출 논란에서도 많은 사람에게 지지를 받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을 돕는 것이 전가의 보도는 아니겠지만, 어찌됐든 그의 말 한마디에 무게가 실리는 것은 사실이다. 언행일치 덕분이다.
특히 이런 일에서 그의 말에 무게가 실린다. 김미화는 2011년 11월 24일 자신이 홍보대사로 있는 국가인권위원회 현병철 위원장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11월 23일 ‘한미FTA 비준 무효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를 경찰이 물대포로 진압하자 국가인권위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는 공개서한문을 통해 “어제 수많은 시민이 인권위 앞에 모여 정부의 정책에 항의하고 영하의 날씨에 경찰이 물대포를 쏴댈 때 어디에 계셨느냐”며 “엄동설한 무방비 상태의 시민에게 무차별 물대포를 난사하는 공권력의 폭력을 목격하면서, 도대체 이 나라 국민의 인권은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다”고 비판했다. 또 “오늘도 인권위가 침묵한다면 인권위 홍보대사직을 즉시 내놓고 내일(25일) 예정된 인권위 10주년 행사의 진행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19) 그리고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2011년 12월 5일 홍보대사직을 사퇴했다. “(사회적 약자가 있는) 낮은 곳을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것이 인권위가 할 일 아닙니까”란 말을 남기고 말이다.20)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
김미화는 2003년 10월 MBC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2003년 가을,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진행을 맡게 된다. 나중에 프로그램명이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이라고 바뀔 만큼 그의 비중이 커지기는 했지만, 코미디언이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에 많은 우려가 있었다. 심지어 어떤 시사평론가는 ‘시사 프로그램은 취재경험이 있는 기자들이 해야 제격인데 요즘은 주로 교수들이 하고 심지어 연예인까지 하고 있으니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21)
그렇다면 왜 갑자기 그가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로 발탁되었을까? 또 그는 왜 수락했을까?
“정찬형 프로듀서가 찾아와 제안을 했을 때 ‘게스트로 일주일에 한번은 할 수 있다’며 선수를 치기도 했어요. 그런데 ‘마흔이 넘으면서 사회적 책임을 나눠야 하지 않겠냐’며 약점을 찌르시더라고요. 이미 여러 시민단체를 돕고 있는데 굳이 라디오에 시간이 묶여서 일할 필요까지 있을까 했더니, 발로 뛰어 기여할 수도 있지만 방송으로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다고 그러시더군요. 또 MBC 라디오에서 일하는 건 연예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기도 해요. 라디오는 쉬운 것 같지만 어려운 매체예요. 텔레비전은 감정을 표정과 눈빛으로 속일 수 있지만 라디오는 절대 가짜로 할 수 없어요. 목소리의 떨림이 먼저 진실을 전하거든요. 신기하죠?”22)
정찬형 PD는 그를 발탁한 이유에 대해 “김미화 씨의 정직하고 서민적인 면모와 사회문제에 대한 소신을 높이 평가했다”며 “이런 장점이 프로그램에 반영된다면 듣기 쉬우면서 깊이 있는 프로그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23)
김미화의 시사 프로그램 진행은 세간에 화제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음이 드러난다. 『씨네21』의 김혜리 기자는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이 MBC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의 양쪽 날개라고 평가한 뒤 그 차이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들으면 찬물로 머리 감듯 정신이 번쩍 난다. ‘시사(時事)의 신’ 앞에 뉴스들이 줄을 서서 품평(?)을 받는 광경이 떠오른다. 인터뷰 대상의 정파를 막론한 손석희의 공평한 ‘쌀쌀맞음’은, 밥벌이 전장으로 나서는 아침 청취자에게 적당한 긴장을 선사한다. 반면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은 하루치의 노동과 실망을 감당하느라 피곤해진 해질녘의 귀에 살갑게 달라붙는다. 황당무계한 뉴스의 자초지종을 헤아리고 싶지만 생각할 기운조차 달리는 시간, 그래도 피해를 입은 이웃이 우선 안타까운 우리 대신 김미화는 전문가들에게 재우쳐 묻는다. ‘아니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대요?’”24)
전문가로서의 진행자가 아니라 청취자의 눈높이에 맞춰, 모르는 것은 다시 한 번 물어보며 자신은 물론 청취자가 이해할 때까지 복잡한 시사문제를 풀어내는 진행. 그것이 김미화의 진행방식이었고 인기비결이었다. 그 결과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은 동시간대 청취율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광고 판매율은 매년 MBC 라디오 프로그램 중 1~2위를 유지했다. 또 손석희가 “가장 부러운 프로그램 중 하나”라면서 “인터뷰하는 사람들이 우리 프로그램에서 말씀 안 하시던 걸 김미화 씨 프로그램에서 시원하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서 진행하는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할 정도로 두루 좋은 평가를 받았다.25) 그렇게 김미화는 새로운 유형의 시사프로 진행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코미디언의 활동 영역을 넓혔다.
언론바로세우기 시즌1 : 여성연예인으로서의 싸움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을 진행하는 동안 그는 개인적인 아픔을 겪었다. 이혼소송을 제기한 것이었다. 원인은 가정폭력과 남편의 부정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선정적인 언론에 의해 많은 상처를 받았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을 진행하기 전인 2003년 6월 김미화는 MBC 시청자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된다. 연예인이 처음으로 시청자 위원을 맡게 돼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그는 “시민이 시민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시청자들의 참여로 시청자 주권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포부를 밝혔다.26) 그러면서 뉴스의 선정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 <볼링 포 콜롬바인>에서 캐나다는 미국과 총기 소지율이 비슷하지만 총기로 인한 살인사고는 미국에 비해 훨씬 적다는 대목이 나와요. 여러 가지 원인 중 하나로 살인, 강도 같은 잔혹한 범죄를 부각시켜 공포를 조성하는 언론을 꼽는데, 그 지적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27)
그런데 언론의 선정성 문제를 지적하던 그는 2004년 이혼소송과 관련해 선정적인 언론의 표적이 된다. 2004년 4월 19일 서울가정법원에 이혼소송을 제기한 이후 언론들이 중계방송하듯 그의 이혼소송을 다루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실 이혼소송을 낸 것은 오랜 고민의 산물이었다. 결혼 초기부터 상습적인 가정폭력에 시달려왔고, 그 폭력의 정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또한 친정어머니와 여동생까지 남편에게 폭행당했고, 새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5개월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남편이 2~3차례 정도 병문안을 가는 등 친정에 소홀한 것도 이혼의 이유였다. 이혼 결심을 굳힌 것도 새아버지의 죽음과 유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아버지 돌아가신 것과 유산을 겪으면서인 것 같다. 한 줌 재로 남은 아버지를 보면서 세상이 너무 허망하고, 이렇게 살고 있는 내 자신의 인생이 너무너무 불쌍해졌다. 얼마 전 유산했을 때도 남편은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수술도 혼자 가서 했다. 병원에 가기 전 남편에게 전화했지만 오지 않았다. 수술을 마치고 마취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운전을 해 친정집으로 가는데, 너무 서러웠고 가슴에 큰 못이 박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만약 아이들이 이혼하지 말라고 했으면 결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큰애가 ‘요즘에는 이혼 같은 건 흠도 아니야’라고 말해줘 용기를 얻었다. 이혼이라는 것은 여자에게 더 어려운 것 같다. 협의이혼하고 싶었지만 남편과 대화가 되지 않아 그럴 수 없었다.”28)
그런데도 이혼소송을 다루는 언론의 양태는 선정적이었고 폭력적이었다. 언론이 연예인을 다루는, 또 언론이 여성을 다루는 폭력적인 방식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었다. 김미화가 “기자와 연예인은 공생 관계라서 사실이 아닌 기사가 나거나 함부로 추측해서 쓴 기사라도 싫은 소리를 할 수가 없는 게 현실”을 알면서도 “20년 동안 나올 기사가 한 번에 다 나오는 것 같다. 제발 그만 좀 써 달라”고 말할 정도였다.29) 심지어 어떤 기자들은 그에게 이런 질문까지 했다고 한다.
“어떤 기자는 ‘이혼 소장을 낼 때 다른 사람들처럼 성격차이라고 하지 왜 굳이 상습폭행과 배우자 부정이라고 썼느냐’고 질문하더라. 누군가는 ‘18년이나 맞고 살았는데, 애는 어떻게 생겼냐’고도 묻더라. 심지어 ‘이경실 씨는 야구 방망이로 맞았는데, 김미화 씨는 무엇으로 맞았느냐’고까지 물었다. 너무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는 질문들이다. 본질을 봐 달라. 가정폭력이 가십으로 처리될 일인가.”30)
가정폭력은 가십으로 처리될 일도, 한 여성연예인의 사생활에 대한 비아냥을 곁들일 일도 아니다. 거기다 마치 재산분쟁 때문에 이혼소송까지 갔다는 식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면서 그의 상처는 더욱 깊어졌다. 그 와중에도 김미화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해야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지금은 내 아픔 때문에 경황이 없지만 그동안 해온 여러 뜻 깊은 일들을 앞으로도 열심히 할 것이다. 이혼을 결심하고 애들을 내 호적에 올리려고 알아보니 입양이 아니면 올릴 수가 없었다. 호주제는 반드시 폐지돼야 하고, 이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수많은 여성들이 이런 제도 때문에 이혼을 망설이고,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31)
2005년 1월 이혼한 뒤 그는 호주제 폐지 운동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자신의 말을 지켰다. 또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집회에 참여해 힘을 보탰고, 외국인노동자와 가족결연을 맺기도 했으며, 가출청소년을 보호하는 후농청소년쉼터 소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2006년에는 여성가족부의 사이버멘토링 프로그램의 대표 멘토로 위촉됐고, 연예인 봉사모임 ‘굿 프렌즈’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7년 성균관대 스포츠과학부 윤승호 교수와 재혼한 뒤 지금까지 행복한 결혼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 재혼하고 1년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김미화는 당시 심정을 이렇게 말한다.
“지금 생각해도 예전 제 삶이 참 슬퍼요. 어느 날인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눈을 떴는데 ‘어, 내가 전혀 행복하지 않은데 왜 이러고 있는 거지?’라는 깨달음이 퍼뜩 들었어요.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한데 여기서 더 잃는다 한들 뭘 잃을까 하는 각성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어요. 배추장사든 풀빵장사든 하자, 리어카 끌고 눈썹에 테이프 붙이고 ‘순악질 풀빵’, ‘일자눈썹 풀빵’이라고 팔면 사람들이 길에서 많이 사줄 것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거예요. (좌중 눈물 글썽이다 폭소) 그날로 결심하고 PD에게 먼저 ‘이런 소송을 할 건데 저를 자르세요’ 했죠. 음, 그래서 더 부담되어 못 잘랐나?(웃음) 재혼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는데 여태 살아온 생애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도 있는 건데.”32)
이렇게 절박한 심정을 당시 언론은 선정적으로 기사화했던 것이다. 이때 언론의 행태에 데어서일까? 그 이후에도 김미화의 언론 바로세우기를 위한 노력은 계속된다. 2006년 2월 느닷없이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그가 교수로 임용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서울종합예술학교 강단에 서게 됐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곧장 서울종합예술학교 이사장에게 연락해 기사를 정정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그 이사장은 사과를 하면서도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나와서 강의를 해달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그는 “나는 교수 안 하면 그만이지만 사실이 아닌 기사를 보고 그 학교에 지원할 학생들이 피해를 보게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33) 그러면서 “이제 예전처럼 신문에 한 줄 나고 끝이 아니다. 오프라인에서 정정을 했다고 해도 인터넷으로 검색할 때마다 계속 나오기 때문에 한 번 나간 오보에 대해서는 우리가 해명할 길이 없다. 자극적인 제목을 뽑아서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34)
언론 바로세우기 시즌 2 : 색깔 딱지와의 싸움
언론과의 싸움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이번에는 색깔논쟁이었고, 그 대상은 『동아일보』와 인터넷 『독립신문』이었다.『동아일보』는 2007년 7월 6일 <승자 측은 ‘On-Air’ 패자 측은 ‘Off-Air’>이란 기사를 통해 “2002년 ‘노사모’ 회원들과 함께 촛불시위에 참여한 김 씨는 이후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진행을 맡았고, 올해 초 대통령과 인터넷매체와의 대화에서 사회를 보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미화 측은 촛불집회는 ‘미선이*효순이 관련 집회’였고, 녹색연합 홍보대사 자격으로 집회에 참여했다며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와 손해배상을 제기했다.35) 이에 『동아일보』는 2007년 7월 27일자로 정정보도문을 게재했다.
김미화는 “사실이 아닌 기사를 써서 언론중재위까지 가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그동안 연예인이란 이유 때문에 잘못된 보도가 나와도 당하기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연예인들에 대한 언론의 잘못된 보도 행태가 바로잡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36)
『동아일보』와의 싸움은 언론중재위에서 끝났지만 『독립신문』과의 싸움은 소송까지 가야 했다. 2009년 7월 김미화는 인터넷 『독립신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기사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에게 ‘노빠’, ‘반미주의자’, ‘좌파 방송인’ 딱지를 붙인 것에 대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대해 1심 법원은 2010년 2월 김미화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런 일이 계속되자 김미화는 2010년 8월 “『독립신문』이 지난 2009년 11월 ‘김미화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손잡고 정치에 참여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하는 등 다수의 기사에서 허위사실을 적시하고 비방성 표현을 사용함에 따라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당했다”면서 『독립신문』의 신혜식 대표와 박주연 기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일부 승소, 2011년 11월 항소심에서 승소했다.
그는 소송을 제기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실 많이 참은 겁니다. 8년을 참은 거예요.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벙어리 3년으로 지내듯 그렇게 해서 참았으면 웬만큼 이게 진심이구나 했으면 하는데, 그게 아니라 얕잡아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중연예인은 함부로 해도 되는구나 그런 것 말이죠. 선배로서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든 겁니다. 사실 우리는 신문이 몇 가지 색깔이나 있는지 잘 몰라요. 각 매체가 각기 어떤 색깔을 띠는지 잘 모릅니다. 알 바 아니었죠.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곳, 웃음이 필요한 곳에 가서 대중에게 즐거움을 드리는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왜 편 가르기를 해서 7년 동안 고통을 감수하게 하는지……. 시사 프로그램을 맡았다는 것으로 시비에 휘말리기엔 도를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감당하기에는 억울함이 있었죠. 법으로 단죄하겠다는 것을 떠나 이런 행태는 바로잡아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37)
김미화의 소송 제기 이유에 나와 있듯 당시 『독립신문』은 그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손잡고 정치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 시점이 1992년이다. 그래서 찾아봤다. 과연 어떤 행동을 했기에 한창 코미디언으로 인기 상종가를 치던 시기에 정치계를 기웃거렸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인가? 신문에 소개된 그대로 인용해본다.
우선 1992년 10월 21일자 『한겨레』 기사를 보자.
“대통령선거를 2달 앞두고 대중문화인들의 정당행사 참여가 활발하다. 노무현 전 국회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민주당 청년특별위원회가 23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여는 야당통합 첫돌 기념문화제에는 서울팝스오케스트라, 김덕수패 사물놀이, 국악인 신영희, 테너 신영조 씨 외에도 변진섭*전인권*이동원*권인하*신형원 씨 등 대중가수, 김미화*박미선*이성미*오재미 씨 등 개그맨 등이 대거 참여한다. …이밖에 개그우먼 김미화 씨가 정치인 노무현 씨와 본격 ‘정치코미디’를 준비하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38)
1992년 대선에는 연예인들이 대거 동원됐다. 당시 민주자유당에서도, 또 국민당에서도 정당행사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많이 동원됐던 게 사실이다. 이 와중에 김미화도 참여하게 됐고, 노무현과 정치코미디를 하게 된 것이다. 나중에 대통령에 오르게 된 노무현과,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로 나선 김미화가 과거에 함께 정치코미디를 준비했다는 사실은 참 흥미로운 기사거리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엮으면 안 된다. 김미화에 대한 자료를 조금만 찾아봤어도 1992년의 일이 일회성 행사에 그쳤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995년 6월 12일자, 또 1995년 6월 17일자 『경향신문』 기사를 연달아 살펴보자.
“(민자당) 정원식 서울시장 후보는 12일 마포구 서교동 홍익대 앞 철도부지에서 첫 정당연설회를 갖는다. 탤런트 출신 최영한 의원, 이재갑 유세단장 등 4명이 찬조연설원이다. 탤런트 김용건 씨와 개그맨 최병서, 개그우먼 김미화 씨가 식전행사를 진행한다.”39)
“민자당 정원식 후보 측은 탤런트, 가수, 코미디언 등 18명으로 자원봉사단을 구성, 돌아가며 유세장에 출연시키고 있다. 이들은 정후보가 도착하기 1시간여 전 유세장에 나와 청중들을 웃기는 레퍼토리를 늘어놓는다. 김학래, 이용식, 남보원, 김미화, 최병서, 김용건, 이영자, 김종찬, 윤일봉, 태현실, 김지미 씨 등이 주로 출연하고 있다.”40)
노무현과 정치를 같이 했다는 김미화가 민자당 정원식 서울시장 후보를 지지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한 점은 1996년 총선 소식을 전하는 『경향신문』 1996년 3월 11일자 기사에서도 나온다. 들여다보자.
“신한국당은 5개 중앙유세단을 가동하고 있다. 김윤환 대표와 이회창 선대위원장, 이홍구 선대위상임고문, 박찬종 수도권대책위원장, 강삼재 사무총장이 이끄는 유세단이 그것이다. 신한국당은 유세단마다 전문연사와 사회자 3명, 인기연예인 3명의 지원부대를 배치했다. 이를 위해 지난 9일 주현미, 현철, 태진아, 남보원, 김미화 등 인기연예인과 전문연사, 전문사회자 등 1백여 명이 참여하는 총선연설원 발대식을 마쳤다.”41)
민주당, 민자당, 그리고 민자당의 후신인 신한국당까지. 김미화는 어떤 정파에 얽매이지 않았다. 지지선언을 한 적도 없었고, 다만 행사 사회를 보거나 분위기 띄우는 일만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마치 1992년부터 노무현과 함께 정치를 했다는 식으로 보도가 되고, ‘친노좌파’ 딱지를 붙인 것이다.
참고로 나는 이 자료를 찾는 데 몇 시간 걸리지 않았다. 자료 찾는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누구나 한국언론진흥재단의 ‘기사통합검색’ 서비스를 이용하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자료다. 그래서 만약 『독립신문』의 기자가 이 자료를 찾지 못했다면 그것은 능력부족이라기보다는 의지부족이라 할 수 있겠고, 이 자료를 알고 있으면서도 김미화와 노무현을 엮어냈다면 그것은 왜곡보도 혹은 편파보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하나만 더 짚고 넘어가자. 2002년 대선 당시 김미화는 투표서약운동을 했는데 특정후보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왜일까?
“연예인이나 정치인이나 둘 다 유명인인데,(웃음) 저로서는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게 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방송하는 데도 사실은 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연예인들이 사람들을 동원하는 데는 능력이 있으니 여러 당에서 연락이 왔고, 개그맨 20년 하다 보니까 친한 정치인들 많거든요. 이회창 후보, 노무현 후보, 정몽준 후보 다 아는 분들인데, 어느 한 분만 도와드릴 수도 없고 그래서 일찌감치 중립 선언을 했죠.”42)
도대체 『독립신문』은 뭘 읽고, 뭘 가지고 기사를 쓴 걸까? 김미화는 리영희 선생이 생전에 했다는 “언롱인(言弄人)이 되지 말고 언론인이 되라”는 말을 여러 인터뷰에서 언급하곤 했는데, 『독립신문』에 그대로 들려줘도 될 듯싶다.
수난 시즌 1 : KBS는 블랙리스트로…
이혼 소송을 힘들어할 때 그에게는 오히려 일이 더 많이 들어왔다. 방송사 PD들이 새 일거리를 주었기 때문이다.
“방송사 PD들에게 너무 고맙고 최선을 다하고 싶은 이유가 그때 경험 때문입니다. 기자들이 연일 제 이혼을 대서특필하는 와중에 PD들이 저를 하차시키지 않고 외려 새 일거리들을 줬어요. < TV, 책을 말하다 > PD도 방송사 뒷문으로 다니고 있는 저한테 와서 섭외를 하는 거예요. 깜짝 놀라 ‘제 소문 못 들으셨어요? 저 지금 복잡해요’ 했더니 그거랑 상관없이 해달라고 하셨어요.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PD도 어쩔 거냐는 기자들 질문에 ‘사생활은 사생활이고 일은 일인데 김미화 씨 일 잘하고 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느냐. 아무 계획 없다’고 대답해줘서 저를 편견에서 꺼내줬어요. 그런 기사가 나가면 타 방송사의 생각도 영향을 받죠. 헛살지 않았구나 싶었어요. 우리 사회에는 ‘이혼한 여자가 뭐 할 말이 있어 방송에 나오느냐’고 말하는 보수적인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저 역시 그게 무서워서, 내 일을 모두 잃고 나락으로 떨어져 아이들한테 불행한 엄마의 모습을 보일까봐 오랫동안 망설였던 거고요.”43)
그 결과 그는 KBS의 < TV, 책을 말하다 >, MBC의 <김미화의 U> 등을 진행하며 진행자로서의 입지를 더욱 굳히게 된다. 친정이라 부르는 KBS,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로 발탁한 MBC에 대한 김미화의 애정은 상당했다. 담당 PD들의 배려 때문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까지 말한 그는, 그러나 2011년 그렇게 애정을 품은 방송사로부터 큰 상처를 입는다. 김인규 사장의 KBS는 블랙리스트로, 김재철 사장의 MBC는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퇴출로 상처를 입힌 것이다.
먼저 KBS 블랙리스트 사건의 전모에 대해 살펴보자.
KBS에 ‘블랙리스트’란 단어가 처음 기사화된 것은 2010년 4월의 일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 본부(KBS 노조)는 4월 4일 방송된 <다큐멘터리 3일>에 김미화가 내레이션을 한 것을 두고 다음날 열린 임원회의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내레이터가 잇달아 출연해 게이트키핑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4월 6일 발표한 성명을 통해 “KBS 임원들이 특정 연예인을 두고 논란을 벌일 만큼 편협한 시각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한심스럽다.”며 “KBS에 연예인들의 동향이나 성향을 기록해 출연 여부를 가늠하는 블랙리스트라도 존재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또 “지난 2008년 10월 이후 윤도현, 정관용, 유창선 등 정권에 밉보인 인사들이 줄줄이 하차한 데 이어 지난해엔 김제동 씨마저 잘려 KBS엔 출연자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소문이 횡행하고 있다”며 “또다시 출연자 숙청을 한다면 더 이상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44)
KBS에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소문이 횡행한다는 KBS 노조의 주장이 나온 지 3개월 뒤인 2010년 7월 6일 오전 김미화는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긴다.
| 주 |
1) 「김미화*황동혁 언론인권상」, 『경향신문』, 2012년 2월 1일, 29면
2) 정병근, 「김미화, 언론인권상 수상 “KBS*MBC 사장에 감사”」, 『노컷뉴스』, 2012년 1월 31일, 인터넷판
3) 정병근, 「김미화 “내 밥그릇만 지키며 살고 싶지 않았다”」, 『노컷뉴스』, 2012년 2월 2일, 인터넷판
4) 정철운, 「김미화, “재철 오빠 쫓아내는 투쟁 응원”」, 『PD저널』, 2012년 2월 10일, 인터넷판
5) 정병근, 앞의 글
6) 권정숙, 「‘효박물관’ 건립 나선 코미디언 김미화 씨」, 『한겨레』, 1996년 5월 9일, 18면
7) 김혜리, 「코미디는, 그리고 세상은 코미디언 김미화」, 『진심의 탐닉 : 김혜리가 만난 크리에이티브 리더 22인』, 씨네21북스, 2010, 433~434쪽
8) 진행*정리 임지선, 「청춘상담앱 : 공부하고 사회참여하며 여전히 사람들 웃기고 자빠지게 만드는 코미디언 김미화의 행복론」, 『한겨레』, 2011년 10월 7일, 29면
9) 권정숙, 앞의 글
10) 김혜리, 앞의 글, 437~438쪽
11) 김혜리, 앞의 글, 438~439쪽
12) 지승호, 「김미화 : 시민단체의 마당발, 삶의 질을 높일 시사코미디 토크쇼를 꿈꾼다」, 『사회를 바꾸는 아티스트』, 인물과사상사, 2003, 126쪽
13) 권정숙, 앞의 글
14) 「선거혁명 시민의 힘으로 네티즌 88% ‘투표하겠다’ 부쩍 관심」, 『한겨레』, 2000년 2월 21일, 14면
15) 유인경, 「삭발로… 시위로… ‘반미운동’ 동참한 대중문화인들」, 『경향신문』, 2002년 12월 10일, 38면
16) 권정숙*성연철, 「색깔 있는 코미디언 지상대화 소파개정 작은 촛불 김미화*남희석 씨」, 『한겨레』, 2003년 1월 1일, 32면
17) 이태희*김진철, 「미국 이라크 침공 : ‘파병안 비준 반대’ 국회 앞 시위」, 『한겨레』, 2003년 3월 25일, 19면
18) 김혜리, 앞의 글, 440쪽
19) 김향미, 「김미화 씨 “인권위, 한겨울 물대포 침묵 땐 홍보대사 사퇴”」, 『경향신문』, 2011년 11월 25일, 12면
20) 박현정, 「인권위 홍보대사 자진사퇴한 김미화 씨 “현병철 위원장, 낮은 곳 돌아보십시오”」, 『한겨레』, 2011년 12월 12일, 11면
21) 이선민, 「“고백하건대 김미화 씨, 나도 모르는 게 많다”」, 『미디어오늘』, 2003년 12월 15일, 인터넷판
22) 김혜리, 앞의 글, 432쪽
23) 정재욱, 「개그우먼 김미화 시사프로 앵커, 방송사상 첫 파격적 발탁」, 『경향신문』, 2003년 10월 15일, 1면
24) 김혜리, 앞의 글, 429쪽
25) 여건종, 「김미화 씨를 떠나보내며」, 『경향신문』, 2011년 4월 29일, 30면
26) 이선민, 「접속! 이사람 : MBC 시청자 위원 김미화 씨」, 『미디어오늘』, 2003년 6월 18일, 인터넷판
27) 이선민, 앞의 글
28) 안경숙, 「“가정폭력을 재산싸움으로 보도 말라”」, 『미디어오늘』, 2004년 4월 28일, 인터넷판
29) 안경숙, 앞의 글
30) 안경숙, 앞의 글
31) 안경숙, 앞의 글
32) 김혜리, 앞의 글, 443쪽.
33) 정은경, 「“오보 만들어놓고 미안하다면 끝인가”」, 『미디어오늘』, 2006년 2월 10일, 인터넷판
34) 정은경, 앞의 글
35) 김상만, 「김미화 씨, 동아일보 언론중재위 제소」, 『미디어오늘』, 2007년 7월 11일, 인터넷판
36) 안경숙, 「동아, 김미화 씨 ‘폴리테이너’ 기사 정정보도」, 『미디어오늘』, 2007년 7월 27일, 인터넷판
37) 김원정, 「“내가 친노 좌파 ‘딱지’에 소송 건 이유는…”」, 『미디어오늘』, 2011년 1월 5일, 인터넷판
38) 「대선홍보에 대중문화인 ‘물결」, 『한겨레』, 1992년 10월 21일, 9면
39) 장화경*김봉선*이재국, 「“‘풀린 잎’ 최대 활용”」, 『경향신문』, 1995년 6월 12일, 4면
40) 김해진, 「‘길놀이 도우미’로 시선유혹 후보들 식전행사 백태」, 『경향신문』, 1995년 6월 17일, 4면
41) 김해진, 「여야 ‘표심잡기’ 총출동」, 『경향신문』, 1996년 3월 11일, 4면
42) 지승호, 앞의 글, 133쪽.
43) 김혜리, 앞의 책, 441쪽.
44) 조현호, 「김미화도 ‘KBS 블랙리스트’에 이름 올리나」, 『미디어오늘』, 2010년 4월 6일, 인터넷판
45) 조현호, 「김미화 “KBS 출연 못하는 건 블랙리스트 때문”」, 『미디어오늘』, 2010년 7월 6일, 인터넷판
46) 조현호, 「KBS 김미화 씨 언급 하루도 안 돼 고소장」, 『미디어오늘』, 2010년 7월 6일, 인터넷판
47) 김창룡, 「“언론기관 소송은 신중해야 합니다”」, 『미디어오늘』, 2010년 7월 6일, 인터넷판
48) 최훈길, 「김미화 “코미디언 슬프지 않은 사회 됐으면…”」, 『미디어오늘』, 2010년 7월 19일, 인터넷판
49) 최훈길, 앞의 글
50) 조현호, 「김미화 “블랙리스트, 연예가중계 작가에 들어”」, 『미디어오늘』, 2010년 10월 26일, 인터넷판
51) 조현호, 앞의 글
52) 최훈길, 「김미화 “경찰이 전화기록도 뒤져”」, 『미디어오늘』, 2010년 10월 27일, 인터넷판
53) 조현호, 「김미화 “KBS측 ‘기자회견도 하지 마라’ 요구」, 『미디어오늘』, 2010년 10월 29일, 인터넷판
54) 조현호, 「KBS, 블랙리스트 의혹 김미화 고소 철회」, 『미디어오늘』, 2010년 11월 9일, 인터넷판
55) 김창룡, 「“KBS 김미화 소송, 시작도 끝도 잘못됐다”」, 『미디어오늘』, 2010년 11월 10일, 인터넷판
56) 조현호, 「김미화 “블랙리스트로 상처… 용기주신 여러분께 감사”」, 『미디어오늘』, 2010년 11월 9일, 인터넷판
57) 민임동기, 「“정수장학회 기부금 부당” “MBC 편파적”」, 『미디어오늘』, 2004년 10월 11일, 인터넷판
58) 고동우, 「PD수첩 이어 ‘손석희’ ‘김미화’도 위험?」, 『미디어오늘』, 2011년 3월 4일, 인터넷판
59) 고동우, 「‘김미화를 구하라’ PD들 팔 걷었다」, 『미디어오늘』, 2011년 4월 12일, 인터넷판
60) 고동우, 앞의 글
61) 고동우, 「“김미화 교체, KBS*SBS가 가장 좋아할 것”」, 『미디어오늘』, 2011년 4월 14일, 인터넷판
62) 고동우, 「“김미화 신뢰도 문제? ‘블랙리스트’는 매듭된 일인데…”」, 『미디어오늘』, 2011년 4월 15일, 인터넷판
63) 고동우, 「김미화 씨, 자진하차 선언」, 『미디어오늘』, 2011년 4월 25일, 인터넷판
64) 고동우, 「‘인사도 못 나누고 왜 쫓기듯…’ 울고 있는 김미화」, 『미디어오늘』, 2011년 4월 26일, 인터넷판
65) 고동우, 「김미화 “MBC 사장이 떠나라 했다” 파문」, 『미디어오늘』, 2011년 5월 4일, 인터넷판
66) 조현호, 「김미화 빠진 뒤 “껍데기만 남았네”」, 『미디어오늘』, 2012년 1월 11일, 인터넷판
67) 이재진, 「"이렇게 말꼬투리 잡으면 뭘 방송하란 말인가“」, 『미디어오늘』, 2012년 2월 23일, 인터넷판
68) 정상근, 「“김미화 프로그램 제재조치, 참으로 민망한 말꼬리 잡기”」, 『미디어오늘』, 2012년 2월 28일, 인터넷판
2005년부터 월간 <인물과사상>에 시사인물포커스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만화에 살다』(2002)와 공저 『환경주의자들』(2001), 『미래를 파는 디지절 상인들』(2001), 『남성의 광기를 잠재운 여성들』(2001), 『베스트셀러과 작가들』(2001), 『상상력과의 전쟁』(2002), 『한국영화산업 개척자들』(2003) (이상 인물과사상사 펴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