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이 금지곡 ‘동백아가씨’ 신청하자 주변 사람들 당혹 - 트로트 80년을 빛낸 인물들
백 투 트로트!
새 천년의 장윤정이 말해주듯 트로트는 하지만 여전히 대중의 사랑을 받는 주류음악으로서의 위치를 지키며 질긴 끈기의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아무리 사회적 지체가 높아도 고학력의 소지자라도 '나이가 들면' 또 '노래방에 가면' 자신도 모르게 트로트 한 가락을 뽑고야 마는, 지금도 살아있는 '백 투 트로트!'의 관습은 트로트의 꺾이지 않는 위상을 말해준다.
무성영화의 삽입곡으로 최초의 대중가요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1929년 이정숙의 「낙화유수」 이래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는 트로트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 뒤로 나온 장르인 최희준 패티김의 스탠더드 발라드, 신중현 키보이스의 록, 한대수 김민기의 포크보다는 최소한 20-30년이 더 빠르다. 애초 도시의 세련된 음악으로 통했지만 어느 순간 ‘뽕짝’이라는 멸시와 맞물리면서 트로트는 저학력과 가난의 서민음악으로 인식되었다.
새 천년의 장윤정이 말해주듯 트로트는 하지만 여전히 대중의 사랑을 받는 주류음악으로서의 위치를 지키며 질긴 끈기의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아무리 사회적 지체가 높아도 고학력의 소지자라도 ‘나이가 들면’ 또 ‘노래방에 가면’ 자신도 모르게 트로트 한 가락을 뽑고야 마는, 지금도 살아있는 ‘백 투 트로트!’의 관습은 트로트의 꺾이지 않는 위상을 말해준다. 오랜 역사를 통해 증명된 트로트 음악의 힘은 무엇보다 전(全)국민적이고 세대 포괄적이라는데 있다.
193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대중가요의 등장과 함께 인기가수가 출현했다. 1930년대, 즉 우리 가요계 최초의 직업 대중가수이자 스타는 「술은 눈물이냐 한숨이냐」의 채규엽이다. 그는 1935년 잡지 ‘삼천리’의 인기가수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채규엽이 일본에 유학한 바리톤 가수라는 사실은 ‘신문화’ 트로트가 초기에는 도시의 지식인, 돈 많은 소시민층, 기생 등이 향유하던 세련된 음악이었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트로트의 탄생기가 다름 아닌 일제 강점기라는 것이며 이것은 트로트의 발생, 기원과 관련하여 ‘태생적 한계’로 따라 붙는다. ‘트로트가 일본의 것이냐 아니냐?’는 국적 논쟁은 유서 깊으며 그 불씨는 지금도 꺼지지 않고 있다.
학계에서는 트로트를 일본의 ‘엔카’로부터 영향 받아 식민지 시대의 비탄정서를 위해 일본에 의해 보급된 것으로 해석하지만 일본의 일각에서는 ‘엔카의 원류는 한국이며 특히 영남 쪽의 민요에 기원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 원류와 묶인 트로트의 고된 숙명은 나중 1960년대에 ‘왜색’이라는 시비로 이어지게 된다.
1930년대 말부터 해방 이전까지 수많은 트로트의 별들이 쏟아져 나왔다. 놀라울 정도의 긴 호흡을 자랑했던 「애수의 소야곡」의 미성 가수 남인수와 20세기 최고의 가요로 손색이 없는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은 남녀 대표가수였다. 1930년대 말 남인수의 인기는 지금의 빅뱅 못지않아 공연이 끝나면 입구에 기생집에서 보낸 인력거가 줄을 섰다고 한다.
하늘이 내려준 비음이라고 할 이난영은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반야월(지난 3월26일 사망한 그도 처음에는 진방남이란 이름의 가수였고 「불효자는 웁니다」를 크게 히트시켰다)과 더불어 ‘한국 가요계의 3대 보물’로 통하기도 했다.
남인수 이난영과 더불어 이 시기에는 「짝사랑」의 고복수, 「나그네 설움」의 백년설, 「울고 넘는 박달재」의 박재홍, 「눈물 젖은 두만강」의 김정구, 「역마차」의 장세정 등이 맹활약했다. 해방 후에 등장한 가수로는 단연 「굳세어라 금순아」의 현인이 발군이었다. 매우 심한 떨림을 강조한 특이한 음색으로 시대를 풍미해 「신라의 달밤」을 비롯한 그의 노래는 한동안 가수든 일반인이든 모창 단골 소재였다.
이미자 그리고 남진 나훈아
라틴의 댄스음악 그리고 한국전쟁 후 미군정 통치와 함께 재즈 스타일의 스탠더드와 록 등 미국음악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여전히 트로트는 막강했다. 특히 단조의 비애감을 강조한 구슬픈 멜로디는 1960년대 경제개발의 어두운 한숨을 위로해준 덕분에 경쟁 음악의 잇단 등장에도 거센 대중의 흡수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것은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와 가요사의 명곡 「동백아가씨」 덕분이었다.
이난영의 가성은 물론 여타 가수들이 보여준 기교와 장식이 전혀 없는 있는 그대로의 순정(純情) 보이스를 전한 이미자는 1964년 「동백아가씨」로 당시로는 경이적인 10만장 이상, 요즘으로 치면 100만장의 판매량을 거두면서 음악이 이제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알렸다. 지구레코드의 고 임정수회장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로 음반사를 차릴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미자의 노래는 그러나 왜색이라는 덫에 걸려 이미자의 3대 명곡으로 불리는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가 오랫동안 방송과 출반이 금지되었다. 박정희대통령은 「동백아가씨」가 금지로 묶인 줄로 모르고 공개석상에서 이 곡을 신청해 주변을 당혹케 했다는 일화를 남긴다. 이 왜색과 함께 트로트는 ‘뽕짝’이라는 멸시의 늪에도 빠지게 된다. 초기의 ‘쿨’한 음악이 이 무렵에는 ‘천’한 음악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미자 이전 「눈물의 연평도」의 최숙자 그리고 동시대 「바다가 육지라면」의 조미미, 「영산강처녀」의 송춘희 등 인기 여가수가 있었지만 트로트의 위력을 꼭짓점으로 끌고 올라간 주역은 두 남자가수 남진과 나훈아였다. 남진은 1967년 「가슴 아프게」의 대박으로 알려졌고 나훈아는 1969년 「사랑은 눈물의 씨앗」으로 인기가도의 불을 지폈다.
남진과 나훈아는 또한 동시대 야당 40대 기수인 목포 출신의 김대중, 부산 출신의 김영삼과 같은 지역 출신으로 영호남 대결의 양상을 띠면서 1972년까지 한반도 반을 둘로 쪼개는 극심한 라이벌전을 펼쳤다. 트로트의 실질적 마지막 전성기였다. 심지어 꼬마들도 ‘넌 남진이냐 나훈아냐?’라는 질문을 강요받았을 정도. 나훈아가 훗날 절대적 전설이 됐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지만 당대 라이벌전의 승자는 엄연히 남진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 되살아나다
1970년대는 신중현과 키보이스의 록(그룹사운드)과 한대수 김민기 송창식 이장희 김정호의 포크가 청춘의 열정과 낭만을 대변하면서 유행음악으로서 트로트는 급속 위축되었다. 고군분투한 「잘했군 잘했어」의 하춘화가 있었지만 남진 나훈아 경쟁 같은 뜨거운 열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1975년 대마초파동과 가요규제조치로 록과 포크가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되면서 트로트에 다시 조금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룹사운드 즉 록 출신의 가수들이 대거 안전한 트로트를 선택하면서 다소간 위력을 회복한 것이다. 시작이 1976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였고 그 뒤를 「오동잎」의 최헌, 「사랑만은 않겠어요」의 윤수일, 「정주고 내가 우네」의 김훈, 「내게도 사랑이」의 함중아가 따랐다.
록이 트로트와 타협한 이 스타일을 ‘트로트고고’라고 불렀다. 1980년대에 들어 ‘가왕’으로 솟아오른 조용필의 대중적 존재감이 트로트로 확립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그때까지 기성세대의 납득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말해 국민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트로트를 거쳐야 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록의 피를 가진 조용필은 이후 록밴드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며 록과 젊은 음악 중심의 활동을 했지만 1985년에는 3박자 트로트 「허공」을 불러 다시 트로트에 원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수은등」의 김연자와 「멍에」의 김수희는 대박이었고 1979년 박정희대통령 궁정동 시해사건과 연루되어 공식 활동이 어려웠던 심수봉은 1984년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로 날갯짓을 시작해 트로트의 상승기류에 힘을 보탰다.
1980년대 후반에는 6공화국의 캐치프레이즈였던 ‘보통사람들’의 이미지와 어울린 주현미와 현철이 인기가도를 질주했다. 자극적이고 매혹적인 음색의 주현미는 「신사동 그 사람」과 「짝사랑」으로 1988년과 1989년 MBC 가수왕을 거푸 수상했고 현철 역시 「봉선화연정」과 「싫다 싫어」로 1989년과 1990년 KBS 가수왕상을 연패했다.
이들의 경쾌한 폭스트로트는 하지만 과거의 마이너 애상 조와 작별하면서 트로트를 ‘관광버스용’의 위락 음악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유행음악의 대세는 젊은이의 댄스와 발라드로 넘어갔다.
1990년대에는 현철과 더불어 미국에서 돌아온 태진아, 송대관, 설운도가 ‘남자 트로트 4인방 체제’가 구축되었지만 그 체제가 너무 오래가는 바람에 신예의 등장이 더뎌졌고 트로트의 스탠스는 더욱 좁아졌다.
새천년의 젊은 트로트가수들
트로트의 4인방의 지루한 체제가 계속되던 중인 2005년 2월에는 뜻밖의 사건이 터진다. 스물다섯의 젊은 여가수 장윤정이 폴카 풍의 뽕짝 「어머나」로 MBC ‘생방송 음악캠프’에서 젊은 음악을 물리치고 당당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야후 검색어 1위, 벨소리 다운로드 1위 등 모든 인기 지표가 뚜렷한 ‘어머나 현상’을 가리켰다. 장윤정의 인기는 개인에 그치지 않고 트로트의 기사회생을 알리는 결과를 낳았다. 장윤정 스스로도 “팬들도 젊은 가수가 부르는 색다른 트로트 노래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했다.
「무조건」의 박상철, 「오빠만 믿어」의 박현빈, 「사랑의 배터리」의 홍진영 그리고 LPG, 뚜띠 등 젊은 트로트가수들이 잇달아 출현했고 트로트를 할 것 같지 않은 아이돌 가수들도 새로운 시장 트로트에 도전했다. 최고 인기의 아이돌그룹 슈퍼주니어는 티(T)라는 프로젝트 팀을 통해 「로꾸거」를 발표했고 ‘빅뱅’의 대성은 「날 봐 귀순」을 노래방의 골든 레퍼토리로 만들었다. 2009년에는 김종국도 「따줘」라는 트로트를 내놓기도 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트로트의 파워는 선거 기간에 확인할 수 있다. 근래 선거에서 로고송으로 사용한 10곡 노래 가운데 무려 7-8곡이 트로트였다.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후보는 「어머나」를 로고송으로 채택했고 이듬해 18대 총선에서 자그마치 194명의 후보가 박상철의 「무조건」을 유세전에서 사용했다. 유권자 공략을 위해 트로트를 썼다면 그것은 여전히 트로트의 서민적 흡인력을 인정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80년 트로트의 무궁한 역사의 힘일지도 모른다.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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