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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서 봤더니… “진짜 회는 막회!” – 헤어디자이너 이희

누군가에게 스승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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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진짜 회는 막회다” 하셨어요. 선생님의 막회를 먹어보니 알겠더라고요. 비싸고 귀하다는 생선의 도도한 맛은 절대로 따라올 수 있는 휴머니즘이 있다는 걸요. 가깝게 소통하는 맛이고, 같이 먹는 사람과 교감을 즐길 수 있는 맛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다가갈 수 있어서 그런가봐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잔뜩 멋 낸 사람보다는 있는 듯 없는 듯 분위기가 우러나는 사람이 더 끌리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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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최고의 사랑’에 나온 공효진의 상큼한 단발머리, 맘에 드셨나요? 저하고 효진이하고 한 달 넘게 수다 떨 듯 대화하다 나온 작품이랍니다. 섭외 들어왔을 때부터 같이 의논했거든요. 이러저러한 역할이라고 하기에 제가 물었어요. 넌 어떻게 연기할 거니, 시청자한테 어떤 반응을 얻고 싶니, 어떻게 비쳤으면 좋겠니, 어떤 느낌이었으면 좋겠니, 어떻게 풀어가고 싶니. 효진이 생각을 충분히 흡수하고 난 뒤에야 제 느낌을 가위에 실었죠. 그냥 “예쁘게 자르자”는 생각으로 나오는 커트가 아니랍니다.

엄정화 ‘배반의 장미’나 박지윤의 ‘성인식’ 머리도 마찬가지에요. 정화나 지윤이를 아니까, 같이 웃으면서 물어보고 얘기하다 가위에 그 느낌이 실리는 거예요.

머리를 맡긴 사람과 만지는 사람 간에 그런 교감이 없이는 스타일이 안 나와요. 그건 그리운 제 스승, 그레이스리 선생님의 철학이기도 했고요. 선생님은 그러셨어요. 사실 기본은 몇 가지 안 된다고요. 다섯 가지쯤 되는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데, 대가인가 아닌가는 내 안에 끌어낼 느낌이 몇 가지가 들어 있는지가 가르는 거라고요. 커트는 느끼는 대로 선을 만들어야 세련된 느낌이 나는 것이지, 억지로 애써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셨죠. 느낌을 가지려면 손님을 알아야 하거든요. 선생님은 처음으로 만나는 손님하고 적어도 10분은 대화를 나누고 커트를 시작하셨어요. 일단 시작하면 커트는 5분이면 끝나요. 더는 자를 게 없을 정도죠. 기가 막히게 착착착!

미용계의 대모(代母)라고 불리셨던 우리 선생님이 암으로 돌아가신 게 지난봄이네요. 꺼진 듯하던 암이 네 번이나 재발했어요. 늘 그러셨어요. 나 죽거든 빈소에 흰꽃 말고 화려한 장미꽃을 꽂아라. 죽은 날은 좋은 사람끼리 모여서 와인 파티를 하면서 옛 추억과 새 유행을 얘기해라. 절대로 울지 마라. 정말로 빈소에 빨간꽃 분홍꽃이 가득했어요. 어색해하던 문상객도 나중에는 아예 빨간꽃을 사 들고 왔지요. 모르던 사람들도 “멋있는 장례다”라고들 했어요. 우리 선생님이 원래 멋있는 분이셨죠.

쉽게 말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차갑고 강한 카리스마가 있기도 하셨죠. 차가움, 그 안에 깊고도 부드러운 또 다른 분이 계시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지요. 20년쯤 전이네요, 선생님을 처음 뵌 게. 헤어 쇼 하실 때 추천받고 도와드리게 됐어요. 그때는 풍채가 좋으셨어요. 저를 처음 보셨을 때 찌르는 듯한 당당한 눈빛이 지금도 생생해요. “니가 이희냐?” 하시더니 “그래, 아무개가 얘기해서 오라고 했다”고만 하셨어요.

그땐 제가 좀 건방진 게 있었거든요.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잘한다고 하니까 공주병이 들었던 거죠. 선생님이 작업하신 머리를 보여주시면서 물으셨죠. “이거 하고 저거 어떠냐?” 그때 제 대답이 “그냥 그래요”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답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이 “네가 그러면 한번 해볼래”하셔서 공주병 걸린 가위로 신나게 이리저리 잘라놨지요. 선생님이 만족하셨는지 제게 화장도 맡기셨어요. 선생님이 색을 제시하고 제가 거기에 다른 색으로 배합하면 얼마나 잘 맞았는지 몰라요. 영국 헤어 디자이너 비달 사순이 쇼를 보러 왔더라고요. 선생님이 저를 소개해주시면서 “나랑 같이 작업한 제자”라고 하시더라고요. 우리 선생님과 20년 무지개 같은 만남의 시작이었죠.

은근한 기 싸움도 있었어요. 인정받고 싶으니까 열심히 했어요. 작업 하나 주어지면 스튜디오에 돗자리 깔아놓고 밤낮으로 매달렸어요. 한번은 선생님이 도시락을 하나 들고 오셨어요. “먹든지 말든지 해. 나는 여기다 놓고 간다.” 그러면 저는 선생님 보는 앞에서는 별로 관심 없는 척해요. 가신 다음에야 열어보면 손으로 직접 싼 정성스러운 샌드위치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죠.

선생님이 요리 솜씨가 끝내주셨거든요. 워낙 먹는 걸 좋아하시기도 했고요. 먹는 데는 돈 안 아낀다는 주의라 “내 뱃속에 타워팰리스 들었다”고도 하실 정도였죠. 낚시를 얼마나 즐기셨는지 몰라요. 특히 바다낚시에 푹 빠져 사셨어요. 정신없이 CF 촬영 끝내고 다음날 아침 선생님이 안 계셔서 다들 찾다보면 좀 있다가 전화가 와요. “여기 지중해다. 낚시하고 있지. 너는 일하냐? 그렇게 달달 볶으면서 일만 하면 여기 물고기도 너보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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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암 선고를 받으시고 의욕과 식욕을 내려놓으셨죠. 서울을 떠나 찾아가신 곳이 통영이었어요. 구경 좀 하겠다고 재래시장에 가셨는데, 좌판마다 펄펄 뛰는 생선이 그날따라 눈에 박히셨대요. 바다를 떠난 저것들도 아직도 저렇게 뛰고 있지 않으냐. 나도 살아야지, 그래, 살아야지!” 갑자기 그 생각이 들면서 주체할 수 없이 먹고 싶고 만들고 싶어지셨대요. 그 좋은 재료를 당신 손으로 요리해보고 싶어지신 거죠. 사람들한테 “통영에 없는 음식점, 아니면 있는데 잘 못하는 음식점이 뭐냐”고 물어보니 중국음식점이 많지 않다고 했대요. 우리 선생님, 그래서 바로 중국음식점 차리셨어요. ‘중국식당 이 선생’이라고 통영에서 소문 자자하게 유명해져서 서울에서 일부러 찾아간 사람도 많았지요.

통영으로 찾아갔더니 절 재래시장에 데려가셨어요. 고무장화를 신은 선생님 뒤를 따라 좌판 사이 좁은 골목을 따라다녔지요. 선생님은 “이건 놀래미, 이건 광어……” 하면서 하나하나 알려주셨어요. 모퉁이를 돌아 나오면서 시장 바닥의 물이 자박자박 소리를 내고, 붉은 다라이에 생선은 누워 있고, “소라 더 줄게 가져가라” 상인들은 소리치고. 선생님은 몇 바퀴 도시더니 “진짜 막횟감”이라고 하면서 사셨죠. 댁에 가서 몇 마리를 척척 회를 직접 뜨시더니 된장에다 찍어 먹으라고 하셨어요. 선생님이 만든 된장인데 무슨 마술을 부리셨는지 회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더라고요. 통영 물고기가 우리 선생님의 된장을 만나더니 바다 품속에 안긴 듯 마음이 녹았나 봐요.

선생님이 “진짜 회는 막회다” 하셨어요. 선생님의 막회를 먹어보니 알겠더라고요. 비싸고 귀하다는 생선의 도도한 맛은 절대로 따라올 수 있는 휴머니즘이 있다는 걸요. 가깝게 소통하는 맛이고, 같이 먹는 사람과 교감을 즐길 수 있는 맛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다가갈 수 있어서 그런가봐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잔뜩 멋 낸 사람보다는 있는 듯 없는 듯 분위기가 우러나는 사람이 더 끌리는 것처럼요. 맛에도 온도가 있다면 가장 따뜻한 맛이 아닐까요. 그래서 선생님 계실 때 저희 미용실 후배들하고도 막회를 먹으러 자주 갔어요. 자주 간 곳이 ‘강구항’이라는 횟집이었는데, 허름하고 편안한 곳이었어요. 우르르 몰려가서 막걸리 한 잔 쫙 비우고 된장에 푹 찍어 먹으면 평소에 못하는 얘기도 나오더라고요. 선생님 말씀이 “내 나이 일흔아홉에 이십대 애들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게 여기 막회집이다” 하셨어요.

“안에 들어 있는 게 있어야 보는 눈이 생긴다.” 선생님이 늘 강조하신 말씀이세요. 자기 안에 든 것이 세련돼야 머리에서도 세련된 선이 나오는 것이지, 든 게 없으면 아무리 기술을 익혀도 둔하고 무뚝뚝한 선이 나온다는 말씀이셨죠.

“머리는 손으로 하는 게 아니다. 네 안에 많은 게 쌓일수록 세련된 디자인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신문을 꼭 보고, 한 달에 책을 최소한 서너 권은 읽으라고 늘 강조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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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하고 같이 책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결국 못하게 됐죠. 돌아가시기 직전에 병상에서 저보고 그러시는 거예요. “책 표지를 너는 왼손, 나는 오른손, 둘이 꼭 잡은 손을 확대해서 넣자”면서 “자, 지금 이리 와서 핸드폰으로라도 찍어” 하고 보채셨어요. 제가 다음에 정식으로 찍자고 하니 “너, 내가 못 일어날 수도 있어. 후회하지 말고 빨리 내 손잡아” 하셨어요. 어쩐지 눈물이 나려고 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먼저 제 손을 끌어당겨서 덥석 잡으시는 거예요. 그게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천재형이 아니고 노력형이에요. 이제까지 죽도록 노력해서 이만큼 왔어요. 그리고 죽을 때까지 죽도록 노력할 거예요. 저도 누군가에게 우리 선생님 같은 존재가 되어주고 싶어요. 후배들이 무언가 이룰 수만 있다면 저를 밟고 가도 좋아요.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저는 기꺼이 뒤로 물러서서 등대가 되고 울타리가 돼줄 거예요. 제가 후배들을 받쳐주려면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죠. 시시하면 애들이 안 따라와요.

선생님 생각나면 애들하고 같이 막회 먹으러 가야죠. 선생님 유언처럼, 울지 말고 웃으면서 환하고 밝은 기억만 된장에 같이 푹 찍어 함께 즐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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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다, 내 인생 신정선 저 | 예담

맛은 추억이고, 위로이다. 맛있는 먹을거리가 풍성해진 요즘에도 사람들은 어릴 적 먹던 거칠고 투박한 음식을 기어이 찾아다니며 먹는다. 추억을 음미하고,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서이다. 이 책은 이순재 신경숙 이승철 에드워드권 김대우 윤대녕 패티김 배병우 김수영 황주리 강수진 박찬일 이원복 하성란 이지나 배한성 서상호 이진우 진태옥 문훈숙 이왈종 장석주 조태권 이희 승효상 전무송 정끝별 안효주 김윤영 조은과 같은 이 시대 최고의 명사들과 함께 한 끼 식사를 나누며, 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간절한 맛의 기억을 함께 음미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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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정선

1974년 3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언어학과를 어렵게 입학해 간신히 졸업했다. 2001년 8월 수습 41기로 조선일보에 입사해 날마다 책상에 머리를 찧으며 기사를 쓴다. 2011년 12월 현재 문화부에서 공연을 담당한다.

맛있다, 내 인생

<신정선> 저12,510원(10% + 5%)

추억으로 맛을 내고, 그리움으로 차려낸 생애 잊을 수 없는 맛 맛은 추억이고, 위로이다. 맛있는 먹을거리가 풍성해진 요즘에도 사람들은 어릴 적 먹던 거칠고 투박한 음식을 기어이 찾아다니며 먹는다. 추억을 음미하고,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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