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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음식 다 먹어봤지만 이보다 맛있을까? - 노르의 점심 식사

밥은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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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온다고? 노르는 아마 여태 옆의 옆 섬인 발리에도 가본 적이 없을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화장실 해결에 배고픔 해소까지. 그러고 보니 이 여자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었다. 우연히 장터를 찾아와 오늘 처음 만난 외국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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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에서 동쪽으로 섬을 몇 개 지난 곳에 있는 플로레스 섬을 여행할 무렵의 일이다. 고지대에 있어 연중 기후가 서늘하고 커피를 많이 키우는 바자와(Bajawa)에서 며칠 머물렀다. 한 시간쯤 떨어진 곳에 수요일장이 선다는 정보를 우연히 입수, 찾아가기로 했다.

장날이라 베모가 엄청나게 붐빈다. 열 명쯤 타면 적당할 듯한 봉고를 개조해서 뒷좌석을 없애버리고 대신 벤치를 놓았다. 그래야만 하는 순간이면 서른 명 이상 구겨 타는 경우도 있다.

운전사 옆 조수석을 차지하고 기뻐한 것도 잠시, 어떤 뚱뚱한 할머니가 막무가내로 내 옆을 비집고 합석한다. 한 명이 탈 자리에 두 명이 타는 것은 인도네시아 시골에서는 기본 중 기본이다. 더한 기본도 많다. 깨어져 없는 사이드미러에 닭들의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달았다. 꼬꼬댁! 고통을 못 이긴 닭들이 기를 쓰고 몸을 일으키려 하면 주먹으로 후려쳐서 다시 뻗게 만든다. 미안해!

무너질 듯 위태로운 차의 지붕에까지 짐을 가득 싣고서야 겨우 출발이다.
오! 예상을 뛰어넘는 대규모의 장터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소한 것들이 모조리 하늘 아래 나온 것 같다. 열대의 태양빛을 받아 선명하게 빛난다. 색채의 향연장이다. 알록달록한 열대 과일들, 곡식들, 가마니로 파는 소금, 말린 생선, 도살하여 각종 부위별로 해체해놓은 고기들, 옷, 이불, 슬리퍼, 비누와 세제 등등 하잘것없지만 없으면 살기 불편한 일상용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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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에 타서 새까매진 사람들이 나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베틀너트로 붉게 물든 입을 반쯤 벌린 채, 웃고 떠들고 짝짝 손뼉을 친다. 외국인은 나 혼자뿐이다. 여기저기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닌다. 매캐한 냄새가 난다 싶으면 닭이나 염소를 파는 곳이 나타나고 비린내가 풍긴다 싶으면 어김없이 어물전이 등장한다. 이깟 장수들이 나를 둘러싸고 자랑스레 노란 천을 펄럭이며 현란한 판촉을 벌인다. 단체 사진을 찍어달라며 옆 사람과 어깨동무를 하고 무작정 웃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 순간이야말로 낯선 곳으로 여행을 온 모든 사람들의 꿈이 아닐까. 짧지만 완벽한 시공간의 이동.
문득 배고픔을 느끼고 시계를 보니 벌써 정오가 지났다. 아침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장 구경에 넋이 팔려 시간을 잊고 있었다. 식당을 찾아 무조건 걷다 보니 밥도 밥이지만 화장실이 더 급하다. 식당도 안 보이지만 화장실은 더욱 눈에 띄지 않는다.

하긴 이런 두메산골의 장터에 공동화장실이 있을 리가 없지. 제대로 된 가게나 식당이 있으면 화장실이 붙어 있을 텐데 그런 건물을 찾을 수가 없다. 점점 조급해진다. 영어는 거의 통하지 않고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다. 시골이니 한적한 곳을 찾아 일을 볼 수도 있겠지만 마침 장날이라 어디에 눈을 두든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사람이 없는 곳이 아무데도 없다. 커다랗고 조용한 나무 뒤나 아늑하게 우거진 은밀한 덤불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하지.

“저, 지금 좀 급한데, 근처에 어디 화장실 좀 없을까요?”

못 참을 지경이 되어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대충 네 기둥만 세워놓고 바나나 잎으로 지붕을 얹은 허름한 오두막, 그 속에서 뭔가 일을 하고 있는 여자를 발견하고 뛰어가 물었다.

“Ada, Ada(있어요, 있어요).”

갑자기 나타나 허겁지겁 묻는 이방인의 모습에 여자는 놀라지도 않는다.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태연하게 대답한다. 있어요, 화장실.

“정말요? 어디요?”
“저쪽, 저기, 우리 집에요.”


여자는 마치 내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나 있던 사람처럼 침착하다. 요리를 하고 있던 것 같다.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오두막에서 나왔다.

“저쪽에 있어요. 바로 저기, 조금만 가면 돼요.”

고맙다고 말하고 허둥지둥 달려가는 내 뒤를 여자는 천천히 따라왔다.

“잠깐, 내가 먼저 들어가서….”

화장실은 뒷마당에 독채로 서 있다. 반노천의 공간인데 생각보다 아주 청결하다. 여자는 문을 열고 불을 켜더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여기가 내 집이에요.”

일을 해결하고 밖으로 나왔다. 여자의 얼굴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갈색으로 탄 이마에 잔주름이 가득한, 평화로운 인상의 몹시 여윈 여인이다.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닌데, 여유가 생길 때마다 조금씩 천천히 손을 보려고 해요.”

집의 벽은 페인트칠을 하지 않아 회색 콘크리트 그대로다.

“어디에서 왔어요?”
“바자와에는 며칠이나 있을 거예요?”
“배 안 고파요?”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엄청난 시장기가 몰려왔다. 아까 화장실을 찾아 헤맬 때 이상으로 참기 어려운 격렬한 욕구다.

“식당, 이 근처에 식당이 어디 있지요?”
“식당은 저쪽으로 가면 있긴 한데, 그럴 것 없이 이리로….”


여자는 메마른 손으로 내 손을 살짝 잡는다. 화장실을 안내했을 때처럼 나를 이끌었다. 아까 그 오두막, 그녀가 일하던 허름한 가건물로 돌아왔다.

“음식이 좀 있는데, 여기 이런 것, 이런 것도 괜찮다면….”

오두막에 들어간 그녀는 만들던 음식을 보여주었다. 찌그러진 양은솥에 밥이 반쯤 담겨 있고 생선조림, 데친 야채…. 알고 보니 여자는 나시붕구스(도시락) 장수였다. 식도락을 위한 도시락이 아니라 장터에 온 사람들이 허기를 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 먹는 최소한의 음식. 밥과 반찬을 바나나 잎에 싸두면 사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들어와서 먹기도 한다.

“먹어요, 많이.”

그녀는 나를 구석 테이블에 앉히고 음식을 가져왔다. 짭짤하게 양념을 한 조그만 민물고기, 배추무침, 땅콩조림….
시장이 반찬이랬다고 정신없이 먹었다. 쌀이, 생선이, 배추가 계속해서 내 입속으로 들어간다. 음식 맛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호화로운 재료가 아니라 간이다.

여자의 음식은 간이 절묘했다. 그리고 삼발(sambal).
여자의 삼발은 갓 만들었는지 아주 신선한 맛이 났다. 어찌나 맵고도 감칠맛이 도는지 고픈 배에 이것만 있어도 밥을 몇 공기는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먹고 또 먹었다. 내 옆자리에 현지인들이 들어와서 조용히 밥을 먹고는 서둘러 나갔다. 나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맛있어요, 맛있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이 말이 절로 나왔다.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여자가 아예 통째로 밥솥을 가져왔다. 장사하는 사람의 음식을 이렇게 많이 축내도 되나. 이성을 차린 것은 이미 내 앞의 음식을 거의 먹어치우고 난 다음이었다. 도시락을 만들었으면 족히 대여섯 개는 되었겠다.

“물 마셔요. 물….”

목이 마르다고 청하기도 전에 여자가 먼저 알고 물을 가져다주었다.
눈매가 조용한 여자였다. 큰 소리로 말하는 일이 생전 없을 것 같은 그런 사람.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막상 찾아보려고 하면 없는 사람. 만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사람.

“이름은?”

여자가 먼저 묻는다. 우리는 그제야 통성명을 했다.

“난 노르예요.”

그녀가 말한다. 집히는 대로 돈을 내밀었지만 받지 않는다. 부끄러운 듯 웃으면서 말한다.

“그러지 말고 나중에 내가 당신 집에 가면….”

우리 집에 온다고? 노르는 아마 여태 옆의 옆 섬인 발리에도 가본 적이 없을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화장실 해결에 배고픔 해소까지. 그러고 보니 이 여자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었다. 우연히 장터를 찾아와 오늘 처음 만난 외국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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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의 쌀밥과 생선 반찬.
십수 년간 인도네시아를 드나들면서 수많은 것을 먹었다. 맛있는 것, 맛없는 것, 이상한 것, 더러운 것, 징그러운 것, 비싼 것, 싼 것. 동쪽 끝 수마트라에서 자바, 발리, 롬복, 코모도를 거쳐 플로레스에 이르기까지, 어느 식당에서도 노르를 만난 이날 먹은 점심보다 더 충만한 식사를 한 기억이 없다.

어려서는 젖. 다 커서는 밥.
밥은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사랑이다.
인도네시아 오지에서도 물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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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식당 박정석 저 | 시공사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태국과 베트남은 서민이 즐겨 먹는 메뉴를, 가장 와일드한 나라 인도네시아에서는 모험적인 미식 경험을, 가장 불쌍한 나라 버마에서는 변변한 요리 없이 힘겹게 끼니를 이어가는 그곳의 상황을 소재로 인간애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음식은 직접 먹고, 냄새를 맡아야 제맛이지, 그에 대한 글을 읽는 것으로 좀처럼 감동을 얻기는 어렵다는 편견이 『열대식당』에는 통하지 않겠다. 탁월한 에세이스트의 역량은 '상상하게 만드는 문장'에서 정점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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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정석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교와 플로리다대학교에서 영화학과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문학사상》으로 등단하고 소설 『33번째 남자』를 발표했다. 남미와 발리, 아프리카 등 60여 나라를 여행했고 그 기록을 담은 『쉬 트래블스』, 『용을 찾아서』, 『내 지도의 열두 방향』 등을 출간했다. 윌리엄 포크너의 영향을 받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여가 시간에는 존 스타인벡, 조지 오웰 등이 쓴 책들과 요리 서적을 번역하고 바다낚시를 한다. 술 내놓으라는 말을 10여 개 언어로 할 수 있다. 우연히 찾아간 동해안 마을에 반해 그곳에 집을 한 채 직접 짓는 이야기인 『하우스』를 썼다. 현재 그 집에서 3년 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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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행자도 배고프거나 쓸쓸하지 않은 곳, 모든 여행자가 왕이 되는 곳 조용히 내미는 밥 한 그릇의 온기가 때론 먼 바다를 건너게 한다 열대만큼 여행자에게 너그러운 땅도 없다. 돈이 있든 없든, 그곳에 익숙하든 낯설든, 모든 걱정은 무거운 배낭과 함께 내려놓고, 무덥고 조촐한 식당으로 간다. 편견 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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