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거기 자리에 앉으시라.
어디라도 상관없다. 하노이 소피텔 메트로폴(Sofitel Metropole) 호텔의 우아한 프렌치 카페, 풀을 먹여 빳빳한 하얀 리넨 깔린 테이블 앞 쿠션 푹신한 의자가 아니어도 괜찮다. 호치민 시의 혼잡한 거리, 간판도 붙어 있지 않은 허름한 현지 카페의 플라스틱 꼬마 의자일 수도 있겠다.
종업원이 다가온다. 커피를 한 잔 주문해야겠다. 블랙커피를 원하면 카페 덴(Caphe Den), 밀크커피를 원하면 카페 쓰어(Caphe Sua)를 시킨다. 무더운 날이라면 아이스커피인 카페 다(Caphe Da)가 좋겠다. 다(Da)는 얼음이라는 뜻이다.
베트남을 처음 방문했다면, 이 나라의 커피 문화에 뜻밖에도 깊은 인상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동남아시아와 커피, 사회주의와 커피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더욱 그렇다. 바글거리는 시장통을 걷다가 느억맘 듬뿍 넣어 만든 각종 반찬들의 쿰쿰한 냄새 사이로 언뜻 초콜릿을 닮은 강렬한 커피 향을 맡고 흠칫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비슷한 차림새의 행인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귀족적인 모습을 한 누군가의 뒷모습을 목격했을 때처럼.
베트남에서 커피는 상당히 중요한 음료다. 스타벅스는 없지만 굳이 필요도 없을 만큼 현지 카페가 많다. 현지에서 생산한 커피콩을 이용한 커피를 판다.
종업원이 다가와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이게 뭘까….
늘 마시던 대로 찻잔에서 찰랑거리는 검고 향기로운 액체가 아니다. 처음 보는 물건이다. 작은 커피 잔 위에 은빛 알루미늄 또는 스테인리스로 만든 동그란 용기가 올라가 있다.
이것이 바로 핀(Pin)이라고 부르는 베트남 특유의 1인용 커피 메이커다. 베트남 여행을 갔던 사람들이 G7 브랜드의 인스턴트커피와 더불어 귀국 선물로 사가지고 오는 인기 아이템이다. 커피 가루를 넉넉히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후 나머지는 중력의 힘에 맡기는 소박한 드리퍼.
시간만 흐르면 된다니, 느리지만 확실하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이랬으면 좋겠다. 은빛 핀의 바닥에 검고 뜨거운 액체가 맺히더니 방울방울 떨어진다. 손가락에 잡힐 듯 진한 향기가 피어오른다.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시라.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커피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느려져 똑똑, 똑, 똑, 마침내 완전히 멎게 될 때까지.
이제 다 되었다. 다 내려왔으니 마셔도 된다. 드립이 완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커피 잔은 겨우 반이나 찼을까 말까 할 정도다. 이것이 베트남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는 방식이다. 에스프레소처럼 강한 맛의 커피.
밀크 대신 달콤하고 진득한 연유를 넣는 것 또한 프랑스의 영향이다. 찻잔 밑바닥에 묵직하게 깔린 하얀 연유를 스푼으로 휘저어 검은 커피와 섞어 마신다.
연한 아메리카노가 익숙한 외국인들 중에는 뜨거운 물을 청해서 희석해 마시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기는 베트남. 집에서와 똑같은 것을 원했다면 애초에 멀리 떠나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베트남은 중국의 영향으로 차도 많이 마신다. 차 인심이 후하다. 어느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든 뜨거운 차가 한 주전자 딸려 나온다.
커피와 차. 두 가지를 번갈아 마신다. 전혀 다른 향이 감도는 두 가지 액체. 입안에 남은 잔향을 지우고 다음 한 모금을 새롭게 느낄 준비를 한다. 다시 한 번 입을 헹구고….
베트남의 커피타임은 풍요롭다. 커피 한 잔 시켰을 뿐인데 테이블이 가득 찬다. 커피 잔, 핀, 찻주전자, 물잔…. 아이스커피를 시키면 조합이 더욱 복잡해진다. 얼음을 넣은 유리잔까지 추가된다. 좁은 테이블 위가 몇 개의 컵과 주전자로 빠듯해져 제법 격식을 갖춘 티파티라도 벌인 것처럼 풍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단돈 300원에서 1000원으로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오후의 휴식이다.
커피 잔 속으로 검은 방울이 소리 없이 떨어진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뜨거운 물에 봉지커피를 털어놓고 휘저어 곧장 마실 때에는 존재하지 않던 시간이다.
더운 물이 스며들며 검고 부드러운 커피 가루가 어느새 묵직해진다. 바닥에 깔린 하얀 연유에 검은 액체가 방울방울 섞어들며 서서히 퍼져 나간다. 흑백만 써서 그린 추상화를 연상시킨다. 향기로운 그림이다.
개방과 더불어 모든 것이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베트남에서 이렇게 느리게 커피를 내리는 예전의 방식이 아직도 지켜지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마술을 주도하는 것은 잔 위에 얹은 은빛 핀이다. 뜨거운 물이 커피 가루를 적시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그 작은 내부는 베트남 거리를 장악한 오토바이 떼의 요란한 굉음과 매캐한 매연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된 초미니 우주처럼 느껴진다.
향기와 침묵으로 가득 찬 세계. 오토바이가 발명되기 이전, 그보다 훨씬 더 전에 존재하던, 지금보다 평화롭고 느린 시대의 한 조각.
다시, 커피를 한 잔 주문한다. 핀을 얹은 찻잔이 딸깍 테이블 위에 놓인다.
은밀한 시간이 시작된다.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하나, 둘, 셋….
게으른 사람이 시간을 세듯 한 방울씩 떨어지던 커피 방울이 점점 느려져 이윽고 완전히 멎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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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대식당 박정석 저 | 시공사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태국과 베트남은 서민이 즐겨 먹는 메뉴를, 가장 와일드한 나라 인도네시아에서는 모험적인 미식 경험을, 가장 불쌍한 나라 버마에서는 변변한 요리 없이 힘겹게 끼니를 이어가는 그곳의 상황을 소재로 인간애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음식은 직접 먹고, 냄새를 맡아야 제맛이지, 그에 대한 글을 읽는 것으로 좀처럼 감동을 얻기는 어렵다는 편견이 『열대식당』에는 통하지 않겠다. 탁월한 에세이스트의 역량은 '상상하게 만드는 문장'에서 정점을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