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할 때의 즐거움은 일상에 보탬이 될 만한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 쇼핑의 괴로움은 부족한 것을 발견했으며 그것을 구매할 수 없을 때이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단순성과 통찰력이다. 만약 이 두 가지를 잃어버린다면 그날의 쇼핑은 끝까지 후회나 씁쓸함을 남길 가능성이 크다. 물질적 풍요와 행복은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물질의 결핍이 행복한 삶을 좌지우지하는 큰 지표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화려한 쇼핑센터나 백화점에서 쇼윈도 안의, 어떤 물건과 맞닥뜨렸다고 치자. 지금은 그것을 살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이 없다. 하지만 그 사물은 눈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사물들의 힘은 위대하다. 우리 눈에 호소하고 어리광 부리고 칭얼거리며 유혹하고 구슬리고 설득하며 끌어당긴다. 자, 여기서는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 사물이 지금 내 삶에 꼭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 물론 이 질문에는 통찰력도 포함돼 있어야 한다.
쇼핑의 모순은 주체인 우리가 언제나 생활에 꼭 필요한 것만 구매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지만 어떤 사물은 흔들리고 갈등하는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어떤 사물은 운명처럼 어떤 사물은 갈등 속에서 어떤 사물은 부추김 속에서 구매한다. 이럴 때의 사물들은 구매자보다 힘이 세다. 사물에 욕망이 결합되었을 때.
파리에 살고 있는 실비와 제롬은 각각 스물둘 스물네 살이며 사회심리조사원이었다. 그들의 삶을 결정짓는 가장 큰 특징은 ‘단순성과 통찰력의 부재’였다. 그들은 가난뱅이도 부자도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가 요구하는 유행, 아름답다고 말하는 물건들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다. 그 욕구는 직접적이며 분명했다. 그것은 바로 소유였다. 사회심리조사원으로 힘들게 번 수입으로 그들은 실크 블라우스며 가죽 구두 같은 “어디서도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는” 물건들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실비와 제롬이 사들이는 사물들의 목록은 점점 많아지고 고가의 제품이 늘어난다. 아무리 많이 구매해도 사물들의 목록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한번 커진 욕망은, 그들의 변명처럼 결코 제어할 수 없으며 되레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실비와 제롬은 마침내 파산을 눈앞에 둔다. 그런 순간엔 누구도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조르주 페렉의 1965년 르노도상 수상작인 『사물들』은 물질추구적인 삶을 살았던 젊은 실비와 제롬을 통해 현대 소비사회에서의 행복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실비와 제롬의 삶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이 부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어떤 끝끝내 버릴 수 없는 헛된 희망들처럼. 실비와 제롬의 잘못은 그들이 부자가 아니었다는 데 있지 않고 그들이 처음부터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그런데 이 행복하지 않은 상태를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행복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행위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쇼핑,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다. 소비의 동기는 단순하지 않다. 남과 나를 구분하기 위해서 하는 소비도 있고 남과 같아지기 위해서 하는 소비도 있으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소비도 있다. 소비의 탄생은 처음부터 타인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자신의 욕망. 이것이 소비의 가장 중요한 동기이자 필수조건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이론은 이러한 우화로 전개된다. 옛날에 희소성 속에 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경제학을 통해서 많은 모험과 오랜 여행을 한 끝에 그는 풍부한 사회라는 여자를 만났다. 그들은 결혼하여 많은 욕구를 낳았다. 호모 에코노미쿠스에게는 남다른 두 가지 원칙이 있다고 한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는 점과 자신에게 최대한의 만족을 이끌어줄 사물을 선호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 실비와 제롬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들이 끝내 불행해지기를 원하지 않았고 젊은 실비와 제롬에게 새로운 사물, 어쩌면 더 큰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생의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랐다. 그들은 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간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아직 서른 살도 안 된 그들은 은퇴한 노부부와 같은 삶을 산다. 활기는 사라졌다. 어느 날 실비와 제롬은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도망치는 게 아니다. 단지 아무것도 그들을 붙잡는 것이 없을 뿐. 기차는 부드럽게 덜컹거리고, 배고픔을 느낀 그들은 천천히 식당칸으로 가 음식을 시킬 것이다. 비록 그 음식은 맛이 없을지라도, 지금 실비와 제롬은 “공범의 미소를 지으며” 함께 나란히 앉아 있다.
소비하고 욕망하는 실비의 삶이 문학작품들 중에서 여성 소비자의 표상으로 말해지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의 주인공 엠마와 다른 것은 경제적 불행과 도덕적 불행의 차이에 있으며 파국적 결말이 아니라 열린 결말이라는 점이다.
사물의 욕망에 관해 플라톤은
『향연』에서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느낄 때 그의 욕망은 그가 갖지 못한 것, 그 자신이 아닌 것, 그에게 결핍된 것, 이런 유형의 사물들 쪽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결핍된 것, 갖지 못한 것은 언제나 우리를 매혹한다. 그 매혹을 그냥 지나쳐갈 수도, 그에 굴복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행인 점이 있다면 우리의 욕망과 우리의 영혼이 원하는 것이 언제나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욕망은 갖고 있을 때도 뜨겁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때는 더 뜨겁고 강렬한 힘을 필요로 한다. 사물들 앞에서 나는 종종 질문한다. 지금 이것을 산다면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쇼핑을 이론적, 철학적 측면에서 접근한 사람은 프랑스의 철학자 프레데리크 페르넹이다. 그는 쇼핑의 행위를 각각 구경하기, 선택하기, 구매하기, 소유하기로 분류하고 그것을 현대성을 비추는 하나의 프리즘으로 이해하며 “소비와의 놀이” 혹은 모험으로 표현한다. 과소비사회의 소비심리를 분석한 철학자이자 사회분석가인 질 리포베츠키도
『행복의 역설』에서 “소비에 열광할수록 삶은 망가지”며 소비는 자신을 보상해주는 순간적인 놀이와 같다고 말한다. 쇼핑을 이론으로 발전시킨 마틴 린스트롬은 쇼핑학Buyology을 이렇게 정의학고 있다. 바이올로지란 삶에서 우리의 구매 결정을 충동질하는 무의식적 상념과 감정, 그리고 욕망에 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쇼핑과 욕망, 구매와 욕망의 문제를 분리해놓고 이야기하긴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쇼핑학, 소비심리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백화점의 탄생과 유행, 대량생산 시대로의 진입과 맞물려 있다. ‘소비사회’라는 말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며 소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든 것은 세계적으로 파리의 봉마르셰나 미국의 메이시 등 대형 상점들의 발전과도 시기를 같이한다. 이제 소비는 커지고 장도 확대된다. 백화점뿐만 아니라 시장, 슈퍼마켓, 대형 할인점에서도 우리는 쇼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욕망한다. 그리고 소비한다. 마틴 린스트롬의 말은 ‘우리 모두가 소비자’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소비의 양식은 변화하고 발전해왔다. 과소비사회로 접어든 현재, 소비는 이제 소비자들에게 한 가지 숙제를 남겨주었다. 과연 소비문화를 어떻게 건전한 생활방식과 결합시킬까, 하는.
중요한 것은 바로 구매의 동기다.
나는 백화점에 있고 내가 갖지 못한 사물들, 나에게 부족한 사물들은 끊임없이 내 시선을 끌고 발을 멈추게 한다. 그럴 때마다 내 정서의 기조가 미세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두뇌 속의 도파민이 활발하게 움직인다. 그건 몹시 허기져 있을 때 딱 때를 맞춰서 맡게 되는 갓 구운 빵 냄새와 비슷하다. 그대로 두면 자제력과 판단력을 잃게 마련이다. 내 의지와 선택이 아니라 어떤 강력한,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의해서 그 사물을 집어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때의 구매는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강요받은 선택에 가깝다. 뇌의 단축회로, 즉 ‘체감표지somatic marker’를 통제해야 한다. 나는 이제 사물을 보지 않고 쇼윈도에 비친 나를 본다. 그리고 질문한다. 나는 왜 지금 이것을 사야만 하는가?
중요한 질문은 중요한 결론을 낳게 한다. 나는 가까스로 자제력을 되찾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모든 쇼핑에는 철학과 나름대로의 이론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러나 이것은 증거를 바탕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고고학 같은 학문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동시에 나는 느낀다. 이럴 때 통제하면 할수록 “새로운 복종 현상”이 나타난다는 질 리포베츠키의 이론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지금보다 더 가난하고 젊었을 적에 나는 내가 혹시 쇼퍼홀릭이 돼가는 것은 아닐까 의심한 적이 있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자주 우울했고 즐거움과는 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도 곁에 없다고 생각했고 작가로서도 평범한 한 여성으로서의 삶에도 실패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럴 때 내가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행위는 몇 가지나 되었을까. 자고 먹고 침묵하는 것. 세계 속에서 자신을 숨길 때 가장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방법들이다. 삶에 대해서 우리들이 말할 때, 삶은 건너가는 것이며 삶은 흘러가는 것, 삶은 질주하는 것. 그러나 어떤 삶 속엔 질주하는 우울과 슬픔도 있는 것이다.
2004년 가을과 겨울, 미국의 중부도시 아이오와Iowa에서 보내고 있었다. 자동차로 서너 시간씩 가도 가도 평원과 옥수수 밭만 드넓게 펼쳐진 소도시였다. 소도시라고 표현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완전한 시골에 가까운 곳이었다. 도시가 아닌 곳에서의 삶이 낯설었고 그토록 오래 집을 떠나본 것도 처음이었다.
아이오와 시티 다운타운에 ‘자바하우스Java House’라고 하는 카페가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책 한 권만 읽으면 그 앞을 오가는, 시티의 거의 모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작가들을 사귀고 펍에 다니고 영문과 수업을 청강하고 단체로 데이트립day trip이나 주민들의 파티에 불려다니고 하는 일들도 한 달이 넘자 지루해졌다. 날씨도 우기로 접어들면서 비가 자주 내렸고 한번 비가 오면 기온이 뚝 떨어지는 날이 많았다.
나는 날씨 변화에 민감하며 특히 비가 오거나 습도가 높은 날에는 정상적인 리듬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우울에 관한 나의 장점은 거기서 벗어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그것을 주기적으로 반복해줘야만 한다는 점이다. 서른일곱 개 나라에서 온 작가들이 다 모였을 때 보모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메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 중엔 은행계좌를 만들고 소셜넘버를 받는 등의 일 외에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코럴빌Coralville의 쇼핑몰로 데려다준 것도 있었다. 아이오와에서 가장 큰 쇼핑몰이라고 했지만 내게는 그저 규모가 큰 슈퍼마켓 정도로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코럴빌로 가는 방법을 머릿속으로 정확하게 외워두었다.
키친은 따로 없었지만 임시적 거주였어도 필요한 것은 대부분 갖추고 있었다. 더 필요한 것, 부족한 것이 언제나 있을 뿐. 그러나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한사코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나를 부추겨 밖으로 나갔다. 검정색 가죽 백팩에는 방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던 다운타운의 서점 ‘초원의 빛Prairie Lights’ 쇼핑백을 챙겨 넣었다.
버스를 타고 사십 분쯤 털털 달리면 삼각형 모양의 유리 지붕이 보였다. 몰의 초록 네온사인만 봐도 조금 안도가 되었고 추운데 막 따뜻한 핫초코 한 모금을 마신 기분이었다. 나는 내 손으로 삼 개월 밤낮으로 키웠으나 지금은 제 부모가 사는 도쿄에서 자라고 있는 두 살짜리 조카를 위한 진 재킷과 코듀로이 바지, 펼치면 동물들이 튀어나오는 팝업북, 나무로 만들어진 독일제 기차 레고 같은 것들을 샀다. 이제 막 파일럿 시험에 통과한 막내 제부를 위해서는 비행기 모양의 묵직한 문진을, 나를 위해서는 두꺼운 빨간색 풀오버 같은 것들을 샀다. 한꺼번에 사지 않고 그때그때 나누어서 두세 가지씩.
쇼핑을 마치고 나면 쇼핑백을 서점 비닐백에 넣곤 그걸 다시 백팩에 넣었다. 교정이나 숙소 복도에서 누구와 마주치게 될지 몰랐다. 쇼핑을 하면서 타인의 시선을 그토록 의식해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함께 생활하던 작가들은 대부분 제3세계에서 왔으며 내가 하루에 한 번씩 ‘비싼’ 커피 값을 내고 카페 자바 창가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알코올이라면 모를까 커피는 커먼룸에도 얼마든지 있는 음료였으니까.
나는 나의 쇼핑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두꺼운 스웨터 같은 것을 산 날은 백팩에 다 들어가지 않아 한 손에 서점 비닐백을 들고 회랑처럼 좁고 긴 숙소의 복도를 살금살금 걸어야 했다. 그때 복도에서 부딪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온 내 단짝 빅토리아는 부럽다는 얼굴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우, 너는 정말 책을 자주 사는구나! ‘초원의 빛’ 봉투에 그날 산 물건들을 넣곤 덜렁덜렁거리며, 약간의 생기를 찾아 돌아오던 그 쇼핑이 아이오와에서의 나의 은밀한 즐거움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아이오와는 소도시였지만 내가 처음 가본 넓은 세계였고 수많은 작가들 속에서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오래전부터 준비한다고 했어도 영어는 태부족이었다. 나는 그때 나를 짓눌렀던 의기소침과 무력감과 우울을 선명히 기억할 수 있다. 아이오와에서 나의 어떤 날들은 폐가의 계단처럼 삐걱거렸고, 위험했다. 그때 만약 코럴빌로 쇼핑을 다니지 않았더라면 그 시간들을 어떻게 견뎠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나는 궁금하다. 그때 왜 나는 책을 읽거나 다른 작가들과 어울리거나 글을 쓰거나 함께 여행을 떠나거나 오직 방에만 머물거나 하지 않았을까. 왜 나는 쇼핑을 하러 비 오는 날 걸을 때마다 빠닥빠닥 소리가 나는 프라다 천의 검은색 긴 외투를 차려입고 검은 우산을 쓰고 검은 백팩을 맨 채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코럴빌까지 가야 했는지 말이다.
불완전하며 부족한 나는 결코 사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은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 즐거움의 순간이 아무리 짧을지라도 그것은 확실하고 분명한 즐거움이다. 나는 구매했다. 여기에 필수적인 요건은 ‘나는 선택했다’라는 감정이다. 나는 선택했고 그것은 즐거움으로 남는다. 소비에 당위성은 없다. 소비의 이유도 소비의 기쁨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한순간, 우리는 행복했다.
쇼핑은 경험이다. 경험은 변화를 만들고 거기엔 그 무엇도 끼어들 수 없는 지나간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때 나의 가장 절실한 의지의 경험은 살고자 하는, 쓰고자 하는 의지였다. 2004년 가을과 겨울을 떠올릴 때면 나는 초원의 빛에 담긴 나의 소소한 사물들을 떠올리며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희미한 미소를 짓곤 하는 것이다.
소비의 동기 중에 결정적인 것은 새로움이다. 구매에는 새로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새로움의 문제는 그것이 언제까지나 새롭지만은 않다는 데 있다. 새로움은 다른 새로움을 요구하고 갈망하게 만들며 우리는 만족을 모르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쇼핑에 관한 행복의 역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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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화점 조경란 저/노준구 그림 | 톨
소설가 조경란이 쓴 백화점을 직접 조명한 문화 에세이다. 백화점이라는 ‘장소’가 현대인들에게 갖는 의미와 기능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이 책은 현장 취재와 자료조사를 통해 깊이와 넓이가 더해져 오롯이 백화점을 다룬 최초의 논픽션이 되었다. 정신적인 삶, 물질적인 삶 사이에서 갈등한 저자의 고민이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