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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 배한성 “제 목소리는 아버지가 남겨주신 큰 유산”

인생의 서랍에 늘 새로운 것을 준비하며 “인절미가 나를 청년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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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상 위에 놓여있던 인절미가 생각났어요. 다시는 울면서 인절미 먹지 말자, 엄마를 울게 하지 말자, 동생을 배고프게 하지 말자. 그때의 결심이 저를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제가 약속에 철저해진 바탕이 거기서 온 거죠.

목메게 그리운 인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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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이버와 가제트 형사의 목소리로 여러분께 기억되기까지, 삶의 여울과 마디를 지나 참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어요. 대학교 때 큰 가르침을 주신 이원경 선생님도 계시죠. 선생님께서는 진짜 성우가 되려면 한의원 약장의 서랍처럼 수천 개 감정의 서랍을 제 속에 만들어둬야 한다고 하셨지요. 서랍마다 목소리를 입힐 캐릭터에 맞는 색색 가지 목소리를 넣어둬야 한다는 말씀이셨어요. 이제까지 많은 약장을 만들고 때에 따라 열어봤지만, 여전히 약장 수가 부족한 것 같네요. 열어도, 열어도 새로운 것이 나오는 제 인생의 서랍, 그 안 깊숙이 들어 있는 것이 인절미 세 쪽입니다.

어렸을 때 고생해보신 분들 많겠지만, 가난에 대한 기억이라면 저도 사무칩니다. 아버지께서 월북하시고서 긴 동굴 같은 시절이 시작됐지요. 제가 네 살 때 아버지가 북으로 가셨어요. 그 후로 한 번도 뵙지 못했어요. 원망도 했죠.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 발견됐다고 세상이 떠들썩할 때 저는 혼자 그랬어요. 왜 우리 아버지는 땅굴을 파고서라도 내려와서 자식들을 돌봐주지 않느냐고요. 땅굴을 파고서라도 와서 미안하다고 한마디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요. 아버지라고 불러본 기억도 제대로 없어요. 그래서 늘 부재하는 이름으로만 여겼죠.

성우가 되고, 많은 사람이 하는 얘길 듣고서야 뒤늦게 깨달았어요. 제 목소리가 아버지가 남겨주신 커다란 유산이라는 사실을요. 부모라는 존재는 곁에 없어도 무언가 유산을 물려주는 거란 걸 나중에야 알았지요.

제 어머니는 생활 능력이 전혀 없는 분이었어요. 노동을 해서 돈을 번다는 게 무언지를 모르는 분이셨죠. 부모가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는 게 당연히 여겨졌건만, 어머니는 돈이 떨어지고 살 길이 막막해졌는데도 특별히 방도를 찾지 못하셨죠. 저희 외가가 상당히 부자였는데 어머니가 외동딸이셨거든요. 요즘으로 치면 공주처럼 자라셨어요. 악착같이 번다는 개념이 어머니에게는 없었던 거죠. 외할아버지는 어머니 세 살 때 돌아가시고 외할머니는 어머니 여섯 살 무렵에 개가하셨어요. 그러니 따로 기댈 친척도 찾기 어려웠죠. 그런 어머니 밑에서 제가 2남 중 장남이었지요. 제가 어떤 세월을 헤쳐 와야 했는지 짐작이 되실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저희 어머니, 물질적인 유산은 못 주셨지만, 감성과 꿈을 주셨어요. 영화를 자주 보셨거든요. 어머니 얘기로만 듣던 영화는 마냥 신비하고 두근거리는 세계였죠. 영화라는 게 어떤 걸까, 호기심을 키우다가 그들의 세상을 소리로 재창조하는 일을 하게 됐으니까요. 아버지는 목소리를, 어머니는 꿈을 주셨기에 오늘의 제가 있는 거죠.

가난했지만 세상을 원망하거나 분노를 품지는 않았어요. 그때는 다들 가난이 일상이었으니까요. 옆집도 아버지가 안 계시고, 그 옆집도 궁핍하고, 앞집도 힘들게 살았어요. 가난이란 건 불편한 거였지 엄청난 불행이거나 떨쳐낼 수 없는 남루함이라곤 생각 안 했어요. 누군가의 말처럼 오히려 가난이 에너지였던 적도 있었죠.

아버지가 떠날 무렵만 해도 돈암동에 집이 하나 있었어요. 그걸 한 친척이 서류를 위조해서 팔아먹고 도망쳤어요. 사기를 당한 거죠. 저희 세 식구가 몇 푼 남은 거 갖고 이사 간 곳이 정릉이었죠. 국민학교 졸업할 무렵이었어요. 담임선생님이 “엄마한테 가서 중학교 통학할 버스비 주실 수 있는지 여쭤봐라”라고 하셨어요. 제가 공부를 곧잘 했는데,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주로 가던 학교는 버스를 두 번 타고 가야 했거든요. 집안 사정을 아는 담임선생님이 걱정이 되신 거죠. 보통 어머니 같으면 “내가 업어서라도 간다. 그 학교 가라. 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필요한 돈인데 어떻게든 못 구해주겠냐”라고 했겠죠. 저희 어머니는 딱 한마디 하셨어요. “버스비 없다.”

결국 저는 집에서 가까운 다른 중학교에 가게 됐죠. 1등으로 입학하게 돼서 입학식 때 선배들 환영사에 답사를 맡게 됐어요. 어머니께 말씀드리니 좋아하시더라고요. 입학식 전날,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멀건 죽 같은 걸 저녁으로 먹었어요. 두 살 아래 동생도 배고프다고 투정부리다가 같이 잠들었죠. 다음날 일어나서 세수하고 방에 들어왔더니 밥상 위에 물을 가득 담은 대접이 놓여 있고 그 옆에 인절미가 세 개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무런 기대를 안 하고 있었는데 말 그대로 “이게 웬 떡이야” 했죠. 바로 그 때 ‘떡’이라는 소리에 자던 동생이 번쩍 눈을 뜨더니 순식간에 하나를 집었어요. 그런데 동생만큼이나 빨랐던 게 어머니였죠. 동생이 떡을 집기가 무섭게 어머니가 손등을 야멸치게 내려치신 거예요. 원래 때리는 분이 아니셨거든요. 그런 어머니한테 한 대 맞은 동생은 아파서가 아니라 놀라서 멍해졌죠. 어머니는 “형이 1등으로 들어가서 오늘 답사해야 되니까 이걸 먹고 가야 해. 배가 고프면 말이 나오겠니” 하셨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울먹이시는 거예요. 저는 떡 하나를 입에 집어넣고 허둥지둥 방을 나섰어요.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서요.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는데 그날은 가도 가도 학교가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어요. 눈물 젖은 어머니 모습도 떠오르고 철없는 동생도 생각났지요. 그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에 쌀이 점점 떨어지고 먹을 게 없다고만 생각했지, 생계나 생존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했어요. 하지만 그날, 인절미 하나를 먹고 학교 가던 날, 아 이제는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구나 하는 선명한 자각이 저를 두드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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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준비한 인절미,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걸 구하셨을까 싶게 작고 볼품없었어요. 손가락 마디 두 개 정도 됐을까. 차지고 쫄깃하지도 않았고 약간 꾸덕한 채로 콩고물을 살짝 덮고 있었죠. 그 인절미가 저를 소년에서 청년으로 만든 거지요. 열세 살 소년으로 집을 나섰던 저는 열세 살 청년이 돼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막상 일을 하려고 해도 마땅한 자리가 없었어요. 지금처럼 아르바이트 자리가 넘치던 때가 아니었죠. 어른도 직업을 구하기 어렵던 때였으니까요. 어렵게 동네 형을 통해서 신문배달 일을 맡게 됐어요. 하루에 230부 정도, 조간과 석간을 모두 돌렸죠. 지금이야 아파트에 많이 사니까 층별로 다니면서 신문 돌리면 속도가 꽤 나지요. 하지만 그때는 골목골목 걸어 다니기도 힘든 단독 주택이었어요. 비가 오면 특히 난감했어요. 지금처럼 비닐을 싸는 기계도 없었고, 초인종을 눌러서 반드시 사람한테 전달해야 했죠. 비오는 새벽에 사람을 깨워 나오게 하려면 시간은 오죽 걸렸겠으며 마음은 좀 초조했겠어요. 개 있는 집도 어찌나 골치가 아프던지요. 대문 너머로 던져 넣은 신문을 개가 물어뜯기도 하니까요. 학교에 가면 보급소에서 연락이 와요. 어느 집에서 항의가 들어왔으니 다시 갖다 주라고요. 그때야 모든 정보가 신문에서만 나오던 때이니 하루 배달이 안 되면 정말로 큰일이었죠.

고생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상 위에 놓여있던 인절미가 생각났어요. 다시는 울면서 인절미 먹지 말자, 엄마를 울게 하지 말자, 동생을 배고프게 하지 말자. 그때의 결심이 저를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제가 약속에 철저해진 바탕이 거기서 온 거죠. 개가 있는 집은 철저하게 표시를 해뒀다가 대문 옆에 끼워둔다든지 따로 꾀를 썼거든요. 약속을 못 지키면 불편한 건 나다, 아무리 불편한 약속도 일단 했으면 지켜야 한다, 그 생각이 그때부터 몸에 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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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성우’라고 봐주시는 분들도 있지만, 전 여전히 철없고 엉터리인 면도 많고 단점투성이랍니다. 사실 목소리가 좋은 사람은 많아요. 중요한 건 어떤 영혼을 거기다 실어서 인물을 표출해 내느냐죠. 대본 보고 적당히 입 모양 맞춰서 녹음해도 대충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대본이 땀에 젖고 작은 메모로 지저분해지도록 대사는 물론 대사 사이까지 연구했어요. 담배를 들이마시고서 내뱉는 대사는 그 호흡 또한 달라야 하는 거니까요. 대본을 성경이요, 코란이요, 불경이라 여겼죠. 스튜디오에 들어갈 때는 성전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어요.

기억의 서랍에 항상 들어 있는 인절미 세 개. 그 서랍을 닫았다가 열 때마다 다시 만납니다.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주고 동생을 배부르게 해주겠다며 길고 긴 골목길을 올라가던 열세 살 청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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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다, 내 인생 신정선 저 | 예담

맛은 추억이고, 위로이다. 맛있는 먹을거리가 풍성해진 요즘에도 사람들은 어릴 적 먹던 거칠고 투박한 음식을 기어이 찾아다니며 먹는다. 추억을 음미하고,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서이다. 이 책은 이순재 신경숙 이승철 에드워드권 김대우 윤대녕 패티김 배병우 김수영 황주리 강수진 박찬일 이원복 하성란 이지나 배한성 서상호 이진우 진태옥 문훈숙 이왈종 장석주 조태권 이희 승효상 전무송 정끝별 안효주 김윤영 조은과 같은 이 시대 최고의 명사들과 함께 한 끼 식사를 나누며, 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간절한 맛의 기억을 함께 음미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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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정선

1974년 3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언어학과를 어렵게 입학해 간신히 졸업했다. 2001년 8월 수습 41기로 조선일보에 입사해 날마다 책상에 머리를 찧으며 기사를 쓴다. 2011년 12월 현재 문화부에서 공연을 담당한다.

맛있다, 내 인생

<신정선> 저12,510원(10% + 5%)

추억으로 맛을 내고, 그리움으로 차려낸 생애 잊을 수 없는 맛 맛은 추억이고, 위로이다. 맛있는 먹을거리가 풍성해진 요즘에도 사람들은 어릴 적 먹던 거칠고 투박한 음식을 기어이 찾아다니며 먹는다. 추억을 음미하고,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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