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의 시작은 역시 방콕(Bangkok)이다. 홍콩, 도쿄가 될 수도 있고 그보다 멀리 가서 런던이나 뉴욕, 이스탄불이나 요하네스버그, 혹은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호주머니에 돈 몇 푼 없고 머릿속에는 뾰족한 계획이 없는, 떠나기 위해 옷 몇 벌 가방에 구겨 넣고 의기양양 대문을 나섰지만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어리바리 풋내기가 인생의 비밀을 몸소 깨닫게 되는 최초의 장소는 어쩐지 방콕이어야만 할 것 같다. 정신머리, 돈지갑, 버지니티를 차례로 잃기에 적당한 그곳.
이제 막 여행의 신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배낭족들이 난생 처음으로 매운맛-말 그대로 매운맛이기도 하다-을 보게 되는 곳은 이 도시가 되기 십상이다. 세계 각지에서 일광욕, 마사지, 쇼핑, 다이빙, 매춘, 성형수술, 그리고 식도락을 위해 몰려드는 명실상부 아시아 부동의 쾌락 캐피털.
바로 여기서 여행자가 태어나고, 무럭무럭 자라나고, 간혹 숨을 거둔다.
“나는 여태 방콕에 일곱 번이나 왔단 말이지!”
카오산 로드에서 마주친 솜털 뽀송한 이십대 초반의 여행자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일도 아닌 일이다. 아시아를 여행한다면 방콕은 운명처럼 절대 피해갈 수 없다. 인디아에 가든, 티베트에 가든, 몰디브에 가든, 혹은 더 멀리 중동이나 아프리카에 갈 때에도 이 도시는 오다가다 툭하면 들르게 되기 십상이다.
방콕에서 내가 주로 묵는 곳은 외국인들의 게토인 카오산 로드가 아니라 이보다 알려지지 않은 카셈산. 소위 중년들의 카오산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스타호텔’. 어지간한 실용주의자라고 할지라도 아는 사람 마주치면 별로 자랑스러울 것 없을 듯한 허름한 여관이다. 카오산의 시끌벅적함을 피하고 싶은 여행자들, 숙박비 아끼려는 동유럽계 보따리상인들, 어딘지 수상한 느낌을 솔솔 풍기는, 노란 털로 뒤덮인 몸뚱이에 산스크리트어 문신을 빽빽하게 새겨 넣은 늙수그레한 서양인들이 주 고객층이다.
번식력 강한 나방이 몇 세대 알을 깠을 듯 우중충한 갈색 소파에 가방을 던져놓고 서둘러 바깥으로 나간다. 빨리 가야 한다. 늦게까지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목적지는 카셈산 골목 입구 버스정류장 앞. 간판이 붙어 있지 않은 어느 식당.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식당들 중 상당수가 이름조차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제일 예쁜 여자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이름을 떨치는 게 아니라 어느 산골 또는 어촌 구석에서 무심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간판은 없지만 손님은 많다. 올 때마다 그렇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과 길을 걷다 들어온 사람,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찾아오는 나 같은 단골들 때문에 반노천인 식당은 언제나 흥청망청 몹시 붐빈다.
닦기가 무섭게 다시 지저분해지는 낡아빠진 테이블, 흉측한 플라스틱 의자, 행주인지 걸레인지 구별이 힘든 회색 천 조각을 손에 들고 팽이처럼 빙글빙글 테이블 사이를 누비는 여자들….
차분한 분위기의 위생적인 식당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광경이겠지만 오랜 시간 적은 돈을 가지고 밥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이곳이야말로 가격 대비 최고의 한 끼를 보장하는 보기 드문 식당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음식 하나만을 위해 그 밖의 불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과감히 제거해버린 실용주의자의 밥집. 주머니는 가볍지만 길에서 갈고닦은 입맛 하나만은 누구 못지않게 날카로운 가난한 미식가를 만족시킬 수 있는 싸구려 식당.
가마솥만 한 검은 웍(Wok)에서 빠지직 기름이 튀고, 큼직한 나무 주걱을 이용해서 뭔가를 재빨리 들들 볶는다. 구리구리한 피시소스 냄새가 확 풍기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팍붕파이댕(모닝글로리볶음)이 완성, 몇 개의 접시에 나누어 담긴 채 각 테이블로 척척 날라진다. 식당 입구에서 끓고 있는 양은솥 뚜껑이 달그락거리며 자극적인 커리 향이 피어오른다. 탕탕 나무 도마에 뭔가를 경쾌하게 다져대는 소리….
기름기가 묻은 메뉴를 펼친다. 크지 않은 식당이지만 주문 가능한 음식의 범위는 놀랄 만큼 넓다. 마술사가 자신 있게 들고 있는 검은 실크햇 속처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음식은 뭐든 다 있다. 식욕 해소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박람회장에라도 온 기분이다. 방콕에 도착, 첫 번째 식사에서 내가 주문하는 것은 정해져 있다.
카오팟 바이카파오(Khao Phat Bai Kaphrao).
요리라고 말하기도 뭣한, 태국인들이 하루 중 어느 때나 즐겨 먹는 심플한 덮밥. 맛난 음식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많은 시간과 화려한 재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간단한 진실에 대해 확실한 증명을 하는 대표적인 태국 음식. 몇 가지 재료만 들어갈 뿐이지만 하나하나 충실하게 제 몫을 한다. 2~3분이면 거뜬히 완성 가능하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이렇게 쉽고도 결과가 근사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단맛이 강한 홀리바질(Holy Basil)에 씹는 맛을 내기 위해 닭고기 또는 돼지고기 약간, 거기에 쁘릭키누(쥐똥고추)를 송송 썰어 넣고 피시소스를 조금 뿌린 후 화력 센 불에 휘리릭 날렵하게 볶아 보슬보슬한 하얀 쌀밥 위에 살짝 얹어 내어준다. 작은 접시에 얌전히 담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덮밥이 내 앞에 놓인다.
후아.
평범한 겉모습과는 달리 폭탄처럼 강력한 맛이다. 뜨거운 불 맛과 이보다 더 거센 고추의 화끈한 위력이 입안 전체에 확 퍼져나간다. 오래간만의 자극적인 맛에 침이 폭발적인 기세로 터져 나와 침샘 부분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다.
비싼 재료를 사용할 수 없는 저렴한 식당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식재료 간의 조화다. 미지근한 타액과 뒤섞이며 고추의 매운맛, 바질의 달착지근한 맛, 피시소스의 짠맛이 하모니를 이루면서 목을 타고 넘어간다. 마실수록 목이 마른 소금물처럼, 첫술이 그다음 한 술을, 다시 한 술을 부르는 격이다. 어서 다시 한 입, 그리고 또다시 한 입.
크지 않은 접시는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아득한 곳에서 대양을 닮은 포만감, 나른한 만족감이 파도처럼 뭉클거리며 밀려오는 것도 잠시, 곧 거품처럼 사라져간다.
태국 음식의 1인분은 한국보다 양이 작다. 다행이다. 이제 시작이고 끝은 아직 까마득하게 멀리 있다. 방금 도착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그러기를 바란다.
여기는 크룽텝. 방콕. 아시아의 넘버원 쾌락 도시.
순전히 먹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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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대식당 박정석 저 | 시공사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태국과 베트남은 서민이 즐겨 먹는 메뉴를, 가장 와일드한 나라 인도네시아에서는 모험적인 미식 경험을, 가장 불쌍한 나라 버마에서는 변변한 요리 없이 힘겹게 끼니를 이어가는 그곳의 상황을 소재로 인간애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음식은 직접 먹고, 냄새를 맡아야 제맛이지, 그에 대한 글을 읽는 것으로 좀처럼 감동을 얻기는 어렵다는 편견이 『열대식당』에는 통하지 않겠다. 탁월한 에세이스트의 역량은 '상상하게 만드는 문장'에서 정점을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