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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남자보다 남성 심리를 더 잘 안다
와락 안아주는 거리의 의사 - 정혜신
“무슨 생각으로 그 사람들을 만나는 거냐고 묻는 이가 많습니다. 사상이나 신념의 문제로 보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단순합니다. 가장 급한 사람, 정신과 의사가 꼭 필요한 사람이 그들이기에 만나러 가는 거지요. 그들 바로 앞에 죽음이 있어요. 그걸 막고 싶은 겁니다.”
기적 같은 ‘와락’
정혜신은 “적응장애나 우울증이 개인의 심리적인 취약성 때문에 불안, 우울 등의 문제를 보이는 것과 달리 ADD증후군은 예측 불가능하고 위협적인 외부적 요인 때문에 그 상황을 겪은 사람의 대다수가 걸릴 수밖에 없다”며 “이런 혼란을 겪고 힘들어 하는 자신을 ‘못났다’거나 ‘나약하다’고 비난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또 “우리 사회는 이 생존자 그룹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잘 적응하고 있다’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하지만 실제로 이들 내부에서는 심각한 정신적 황폐화가 진행중이므로 체계적인 접근을 통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19)
2011년 10월 30일 경기도 평택. 쌍용차 노동자와 그 가족을 위한 심리치유센터 ‘와락’이 문을 열었다. 77일간의 옥쇄파업 이후 파업 후유증을 앓는 쌍용차 노동자 2500여 명과 가족을 위한 공간이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과, 그의 남편이자 심리기획자인 이명수가 각계각층의 후원을 받아 마련한 것이다.
2009년 8월 파업 이후 이 글을 쓰는 2012년 2월까지 세상을 떠난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만 20명.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의 죽음이 이어지자 정혜신은 “늦게 와서 미안하다”며 2011년 3월부터 평택을 찾았다.1) 2월 쌍용자동차 노조원 임무창 씨의 사망 소식을 듣고 “치유 프로그램이 시급하다”며 평택으로 달려온 것이다.2)
“2009년 파업 때부터 늘 마음에 걸렸어요. 저분들 심리적인 상처가 클 텐데 어쩌나 싶었죠. 자살이 이어지다 몇 달 전 아내가 자살했던 임무창 씨가 그마저 돌연사했다는 기사까지 나왔을 때는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떻게든 치료를 시작해야겠다 싶어 평택 쪽에 연락을 했어요. 희망자를 모아달라고요.”3)
그렇게 달려온 평택에서 정혜신은 8주간 상담을 진행했다. 그런데 과정이 녹록치 않았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3월 먼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측에 연락해 사람을 모아달라고 하고 무작정 달려가 보니 고작 40~50명 정도가 모였는데, 파업 종료 후 가장 많이 모인 숫자라고 하더군요. 파업 70여 일간 공안부, 경찰특공대 등이 투입되고, 수도와 전기가 끊긴데다가 위에선 헬리콥터가 계속 최루탄을 퍼붓고 결국 무력 진압으로 이어지는 그런 ‘전쟁’을 경험했기에 폭력에 의한 트라우마가 너무 심했어요. 그 당시를 생각만 해도 두통, 가슴 통증, 악몽이 시작돼 그 기억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왔던 거죠. ‘ㅆ(쌍시옷)’자만 들어도 화들짝 놀라고 그래서 쌍용자동차 관련 뉴스나 문자, 노조 연락도 다 끊고 있었어요. 자신의 몸을 극한으로 몰아붙이거나 자해도 잇달았고, 자연히 가정폭력으로도 이어졌죠. 자신이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자괴감과 함께 공포와 불안이 통제가 안 돼 그게 가족에게로 향한 거죠. 같은 피해자인 노동자들끼리도 사소한 일에 서로 욱하고 다투며 쉽게 폭발하곤 했어요. 그래서 치유의 첫걸음은 개인이 못나고 약한 게 아닌 집단의 문제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거였어요. 이를 통해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면서 함께 얘기할 수 있게 되자 자연히 집에서도 편해지기 시작했죠. 물웅덩이를 보면 최루액부터 연상하는 해고노동자 가정의 아이들의 내상에도 집중하게 되면서 통합적이고 조직적인 치유센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어요. 5월 말 처음으로 센터 건립을 위한 회의를 시작했는데, 이렇게 연말에 와락센터가 개소하다니, 참 기적 같은 일이죠.”4)
과연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의 내상은 어느 정도였을까?
“극단적인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고 느끼게 돼요. 너무나 남루하고 더 이상 초라할 수가 없고, 정말 버러지만도 못하다는, 그런 느낌을 아주 뼛속 깊이 새기게 되지요. 지금 쌍용차 분들이 그래요. 말씀을 나눠보면, 이분들이 죽고 싶다고 하는 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살 충동과 전혀 달라요. 자살을 하려는 사람들이 갖게 마련인 심리적인 긴장, 죽을까 말까에 대한 고민 자체가 없어요. 굳이 살 이유가 없으니,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상태인 거죠. 다들 자기도 모르는 새 넥타이 매듭에 목을 걸고 있거나, 옥상 위에서 뛰어내리려 하다가 깜짝 놀란 경험을 갖고 있어요. 문제는 저한테 그 얘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해고자 중에서는 심리적인 힘이 아주 강한 분들이라는 거죠. 그 말조차 안 하는, 심리 상담 장소에 나타날 생각조차 못하는 나머지 2,000여명은 지금 어떤 상황일까……. 생각하면 아찔할 수밖에요.”5)
아이들의 상처는 더욱 심각했다. 네 살 때 아빠가 경찰버스에 끌려간 것을 본 아이는 한동안 버스를 타지 못했고, 어떤 아이는 파업이 끝나고 1년 가까이 옷을 입을 때마다 허리에 막대기와 장난감 칼을 차고 “내가 경찰특공대를 죽여주겠다”고 엄마에게 말하곤 했다.6) 파업 당시 하루 종일 유치원에 있던 아이는 파업이 끝난 뒤 이유 없이 울음을 터트렸고, 나무에 올라가 자살할 거라는 아이도 있었다. 그렇게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에게는 깊은 트라우마가 남겨졌고, 그것은 아이에게 전이되고 있었다.
정혜신이 말한 것처럼 이들은 “심리적인 방사능 피폭상태가 된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던 것이다.7) 그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정혜신은 심리치유센터를 준비했고, 5개월 만에 ‘와락’ 문을 열었다. 정혜신이 상담했던 고문피해자들이 만든 재단법인 ‘진실의 힘’에서 지원한 2,000만원의 종자돈과, 5,600여명의 후원자들이 모아준 2억여 원으로 문을 열게 된 와락 개소식 현장에서 정혜신은 “와락은 기적”이라며 “와락은 투쟁 공간도 아니고 결기 어린 공간도 아닌 (말랑말랑한 힘으로 꽉찬 공간”이고,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공간”이라고 말했다.8)
그가 와락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일상의 복원이다.
“가장 핵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일상의 복원’이다. …쌍용차 해고자들 대다수가 부부관계, 이웃관계, 이런 일상이 다 무너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와락’이 자신들을 위한 공간이며 ‘와락’에 가면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도록 할 것이다. ‘나도 옛날에 이렇게 살았지, 이렇게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지’라는 자극을 일상에서 많이 받을 수 있어야 한다.”9)
그 일상의 복원을 위해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 식당이다. 그는 “치유의 시작이자 핵심은 일상의 기본인 밥을 먹는 것”이라며 “‘와락’에서는 따뜻하고 정갈한 밥을 늘 공급할 것이다. 엄마가 따뜻한 밥을 해주듯이 기본적인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10)
정혜신의 말처럼 ‘와락’은 기적이다. 준비 5개월 만에 와락을 개소하게 된 것도, 고문피해자모임인 재단법인 ‘진실의 힘’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돈을 기부한 것도, 5,600여명의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은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또 정혜신이 상담하던 기업 CEO들이 “그동안 평생 회사 일을 하면서도 노사갈등과 해고의 문제를 기업 정책의 큰 틀에서 구조적으로만 봤지, 한 개인의 삶 차원에서 바라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후원에 나선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11) 무엇보다 남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오랫동안 무관심 속에서 고통받았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사람의 마음’을 전해준 것 자체가 기적일 것이다. 그 기적의 중심에 정혜신이 있다.
회색빛 어린 시절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혜신은 어린 시절을 회색빛으로 기억한다.
“제 어린 시절은 온통 회색빛이었어요. 게다가 1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전 늘 ‘일찍 죽을 것’이란 공포에 휩싸여 있었죠. 다른 친구들이 그렇게 좋아하던 소풍조차도 제겐 아무런 느낌이 없었어요.”12)
그가 회색빛의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은 어머니의 부재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한국전쟁을 겪은 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희 어머니는 평양, 아버지는 신의주 분이셨어요. 두 분 다 본의 아니게 전쟁으로 남쪽으로 내려온 이산가족입니다. 그냥 옮겨 산 것이 아니라 처참한 죽음이 일상화된 극단적 상황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들 중 하나죠. 흔히 말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환자들입니다. 이런 분들을 절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이들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 회의를 가지게 되고 그것은 강력한 확신으로 심리 저변에 뿌리내리게 돼요.”13)
세상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 회의는 무기력을 동반한 우울증으로 나타났다.
“제가 어릴 때인데, 휴일이면 아버지가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시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친구 분들이 단풍구경이라도 가자고 하면 ‘그딴 걸 봐선 뭐 하냐’며 집에만 계시곤 했어요.”14)
아버지의 이런 증세는 집안 분위기는 물론이고, 정혜신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가 어린 시절을 잿빛으로 기억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연세대 의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또 그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내가 살기 위해 정신과를 택했다.”15)
정신과 레지던트 시절 정혜신은 2년 동안 1주일에 두 번씩 정신분석을 받았다. 의사가 되기 위한 훈련이었고, 월급의 절반 이상을 자신의 치료비로 쓴 시절이었다.
“돌아보면 제 유년 시절은 온통 잿빛이었어요. 환자로서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제 상처와 고통을 생생하게 다시 느꼈죠. 환자적인 감정이 끓어올라 낮에 정신과 회진을 돌 때 많이 힘들었어요. ‘본질적으로 이 사람들과 내가 다른 게 뭔가. 나도 이 안에 입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16)
그런 경험을 통해 정혜신은 “정신과 의사로서 내가 장점을 갖고 있다면 ‘바닥까지 환자가 돼본 경험’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면서 “모든 정신적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17) 그리고 이때의 경험이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마음에 대한 호기심이 특별히 강해 많은 의학과목 중에서 정신과를 선택했지만, 정신과 의사를 해도 좋을 만한 자질과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아무에게도 검증받은 바가 없질 않은가. ……나의 지나친 경쟁심리,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의식 저 깊숙한 곳에서 나를 괴롭히던 열등감들이 뿌리째 뽑혀 나와 내 의식에 명료하게 자리를 잡았고 그에 따라 해결의 실마리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의사 가운을 입고부터는 왠지 내가 완전한 사람인 줄 아는 허무맹랑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시간들이었다. 지금 정신과 의사로서 내게 가장 소중한 자산은 내가 환자가 되어 분석치료를 받던 바로 그 시절의 생생한 경험이다. 의사와 환자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느낀 바로 그 경험이 내 의사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모티브가 되고 있는 것이다.”18)
남성심리 전문가
정신과 전문의로서 정혜신이 유명해진 것은 1998년 IMF시대, 대규모 구조조정 바람이 불 때였다. 당시 정혜신은 구조조정 후 회사에 살아남은 사람들 상당수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와 증상이 비슷한 ADD증후군(After Downsizing Desertification Syndrom)을 앓고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구조조정이 끝났거나 진행 중인 국내 5개 대기업의 사무직 종사자 41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이들 중 80.6%가 ‘구조조정 뒤 정신의 황무지화 현상’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ADD증후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또 구조조정 후 정신과를 찾는 남자들이 많아지면서, 그리고 한국사회 남성들의 맨 콤플렉스를 중요하게 다루면서 정혜신은 남성심리전문가로 알려졌다. 1999년 7월 6대 대기업 사무직 남성 600명을 상대로 실시한 면접조사를 통해 64.2%가 맨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결과를 발표한 바 있는 정혜신은 맨 콤플렉스의 위험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회사와 집을 오가는 게 그냥 일상적인 것 같아도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긴장수준은 대단해요. 온 가족의 목숨이 나한테 달렸다고 생각해요. 극단적이죠. 겉은 멀쩡해 보여도 늘 자괴감이나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어요. 하루하루가 배수의 진을 친 삶을 사는 것입니다.”20)
그가 말하는 맨 콤플렉스는 남자의 생명까지도 단축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맨 콤플렉스란 ‘남자다움’이라는 견고한 가치체계로 인해서 남자들이 ‘남자다움’에 대한 과도한 강박관념으로 시달리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현대사회의 남자들은 무의식 중에 ‘남자란 모름지기…’ ‘장남된 도리로…’ ‘가장 체면에…’ ‘감정을 절제해야 남자답다’ ‘남자란 죽을 때까지 주위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등의 강력한 자기최면을 반복하게 되는데 바로 그러한 집단적이고 권위적인 ‘남자다움’의 사고방식이 맨 콤플렉스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인기를 지나면 남자의 사망률은 여자에 비해서 2배가 넘으며 40대가 되면 남자 사망률은 여자 사망률의 3배가 넘게 된다. 자살률도 남자가 여자의 2배이며, 자살 성공률은 남자가 여자의 3배에 이른다. ‘남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남자들의 스트레스는 거의 강박적 수준으로 이것이 바로 남성들의 삶을 고단하게 하며 결국 생명까지도 단축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결국은 남자로 태어나서가 아니라 남자답기 위해 너무 애를 쓰기 때문에 죽게 된다는 것이다.”21)
그가 이렇듯 남성심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대규모 구조조정이란 시대적 배경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외교관이 꿈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터진 뒤 외교관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전공을 택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호구지책으로 장사를 해야 했다.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꿈 얘기를 반복해서 했던 정혜신의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아내를 여의고 삼남매를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으로 살아야 했다. 정혜신의 말대로 “우리 삼남매를 보살피는 것에 인생을 저당 잡혀”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스트레스성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정혜신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의 책임감 하나로 일터를 지켰던 아버지는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하면서 희망도 즐거움도 다 접은 잔인한 날들을 보내야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마음은 점점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었나 보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 점점 시대에 뒤쳐지는 사양 산업이 되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손도 쓰지 않았다. 어느덧 정신과 의사가 되어서 아버지를 한 남자로 바라볼 수 있었을 때 아버지는 이미 만성적인 무기력 상태의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힘든 인생을 사셨어도 힘들다고 말 한마디 못하신 아버지. 남자의 인생이라는 게 그런 거라고만 생각하셨던 아버지. 평생 참으면서 살아오신 아버지. 정신과 의사인 딸에게조차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혼자 견디셨던 아버지. 그 인생이 너무 가슴 아파 나는 아직도 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목이 메인다. 그런데 지금 정신과 전문의로서 진료실에서, 기업이라는 남자들의 삶의 현장에서 남자들을 접하며 정도의 차는 있지만 내 아버지의 삶이 대부분 남자들의 공통적인 삶임을 알게 되었다.”22)
1998년 이후 실직자를 비롯해 명예퇴직자가 늘어나면서 40대 이상의 남성들은 직장과 집에서 설자리를 잃어갔고, 그로 인해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면서 정신과를 찾는 남성들이 많아졌다. 정혜신은 이런 남성들을 상담하며 남성심리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2001년 유명한 남성들의 심리를 분석한 『남자vs남자』(개마고원)를 펴냈다. 그리고 중년남성들이 겪는 위기를 공유하기 위해 2003년 3월 <남자들>이란 감성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참여적 관찰자
정혜신은 칼럼가로도 유명하다. 「한겨레」, 「신동아」 등에 실린 그의 칼럼은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한겨레」의 권귀순 기자는 “제목이 언제나 다섯 자 안팎일 정도로 엄밀한 글쓰기를 하는 정혜신씨는 정신분석학으로 세상일의 단면을 예리하게 분석해내는 특이한 필자”라며 “그 촘촘한 내용으로 채워진 콘텐츠의 차별성으로 많은 독자들을 불러 모았다.”고 평했다.23) 또 도서평론가 최성일은 “정혜신은 독자에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정혜신의 글은 늘 새롭다. 그러면서도 낯설지 않다. 또 흔히 하는 말로 여린 듯 강강하다.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럽고 포근하면서도 냉철하다. 수시로 사안의 핵심을 찌르며 독자의 마음을 정화시킨다.”고 평했다.24)
이 평처럼 정혜신은 칼럼으로 우리 사회의 현안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그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평을 곁들이는 것은 물론, 상식적인 차원에서 문제점을 낱낱이 파헤친다. 무엇보다 정혜신의 칼럼에서 느껴지는 힘은 공감능력이다. 그는 어떤 문제든 공감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국가의 역할에 대해,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국가폭력에 대해 날을 세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칼럼을 통해 이런 얘기를 할까? 그 단초를 2003년 참여정부 출범에 대해 쓴 한 칼럼에서 엿볼 수 있다.
ⓒ 마인드프리즘
“정신과 의사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느낌은 금테안경 너머의 날카로운 눈매로 요약된다. 마음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관찰과 분석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핵심요소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얘기다. 상대의 얘기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의사의 정서적 ‘참여’ 없이 예리한 ‘분석’만으론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없고, 따라서 치료는 한걸음도 진행되지 않는다. 인간의 자아(ego)는 ‘관찰적 자아’(observing ego)와 ‘참여적 자아’(participant ego)로 나뉘어 있다. 어떤 현상이나 사람을 볼 때 그를 객관적으로 판단, 분석하는 것은 관찰적 자아의 기능이고, 공감이라는 과정을 통해 대상의 현실이나 삶에 참여하는 것은 참여적 자아의 몫이다. 정신과 수련과정 중에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은 냉철한 관찰자가 아닌, ‘참여적 관찰자’(participant observer)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을 움직이고 주체적 자아로 거듭나게 하는 핵심이 바로 ‘참여’에 있다는 정신과적 교훈이다.”25)
이 글을 읽으며 나는 정혜신의 마음자리를 엿보았다. 왜 그가 칼럼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했는지, 왜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참여해왔는지가 이 글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그의 말처럼, 정혜신은 칼럼을 통해, 또 크고 작은 실천을 통해 이 사회의 부조리를 밝히고, 또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정서적으로 참여해왔고, 참여적 관찰자로서의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 면면을 잠시 살펴보자.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는 탄핵안을 가결시킨 의원들을 이렇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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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절제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경우에서 이명박의 자신만만함은 하늘을 찌른다. 세상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스터키를 쥐고 있는 해결사처럼 보인다. 자신의 성공경험을 기초로 한 그의 자신만만한 문제해결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어떤 사안에 접근하거나 비판세력을 논박할 때 관습처럼 내뱉는 수식어는 ‘그거 내가 경험해봐서 다 안다’이다. 밥을 굶기도 해봤고, 달동네에도 살아봤고, 고학도 경험했고, 사회 밑바닥일 중 안 해본 일도 없고, 데모하다 감옥에도 다녀왔고,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도 역임했고, 안 가본 나라도 없고, 국회의원도 해봤고, 테니스?클래식?발레감상 같은 취미생활도 빠짐없이 등장하고, 미국에서 공부한 적도 있고, 종교적 봉사활동에조차 적극적이었다. ‘천하의 명박이가 이 나이에 안 해본 게 어디 있고 모르는 게 뭐 있겠나?’다.”39)
‘내가 해봐서 아는데’ 화법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분석을 읽을 때는 그 탁월한 혜안에 놀라기도 했다.
“‘개천에서 용 난다’고 했지만 요즘은 개천의 기억을 잃어버린 용들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라는데, 이명박은 예외인지 끊임없이 개천의 기억을 얘기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진짜 개천인지 의심이 생길 때가 있다. 이명박은 자신이 겪은 가난의 본질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극복한 자기 스토리에 깊이 공감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억은 우월한 쪽으로 흡수된다. 과거는 찬란했으나 현재가 보잘것없는 사람은 과거 쪽으로, 과거에 비해 현재가 월등한 사람의 과거는 화려한 현재를 돋보이게 하는 장식용으로만 기능한다.”40)
또 한편으로 정혜신은 이 글에서 이명박의 자신만만함이 ‘통제불가능한 파워’가 될 것을 우려했다.
“‘나는 나를 내리누르는 어떠한 힘 앞에서도 굴복한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이명박 같은 인물을 흔하지 않다. 쿨한 정도가 지나쳐 매사 쉽게 포기하고 타협해버리는 풍토에서 이명박처럼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당당한 사람을 보는 일은 즐겁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 성향이 그 사람이 가진 거대한 사회적 권력과 맞물려 ‘통제불가능한 파워’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면 찬찬히 따져볼 일이다.”41)
다른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추론하는 일이 흥미롭다는 정혜신은 자신의 인물평이 강준만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말한다. “그(강준만)는 어떤 인물을 다룰 때 공적 영역에서 널리 알려진 것만을 대상으로 하는 데 비해 나는 그 인물의 개인적 성향이나 속마음에 더 관심이 많”다고 말하는 것이다.42)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적 성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인적 성향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이유야 어찌됐든 정혜신의 인물에 대한 분석은 날카롭고, 흥미롭다.
거리의 의사
정혜신은 앞서 말한 것처럼 공권력이라 불리는 국가폭력에 관심을 기울여왔고, 그것이 거대한 폭력임을, 또 국가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내내 강조해왔다. 그래서 그가 고문피해자들의 치유에 나선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니, 어쩌면 고문피해자들을 만나면서 국가폭력에 대한 문제에 확고한 인식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앞섰던 간에 정혜신은 2005년부터 고문피해자들을 만나면서 국가폭력의 위험성과 폭력성을 고발해왔다.
2005년 9월 정혜신은 최재천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이 개최한 국가보안법 2차 청문회 자리에 출석해 1981년 ‘진도가족간첩단’ 사건 피해자인 박동운씨를 상담했다. 조작 간첩단 사건으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온 가족이 풍비박산 난 박동운씨를 상담한 직후 정혜신은 “국가보안법은 우리나라의 공권력을 ‘사이코 패스’로 만들었다”며 “공권력의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보안법의 폐지임이 자명하다.”고 말했다.43)
이 일이 있고부터 그는 박동운씨를 상담치료했고, 이 과정에서 다른 고문피해자들을 찾아내 집단상담하는 일을 시작하게 됐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가 주도한 이 일은, 그러나 쉽지 않았다. 고문피해자들을 찾아내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들을 모으는 것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모진 고문과 억울한 옥살이, 간첩이라는 손가락질과 가족의 붕괴를 겪은 이들은 세상에 나오길 꺼려했다. 상처가 깊은 탓이었다. 그래서 고문피해자치유모임을 결성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온 지 3년이 지난 2008년 5월에야 처음으로 봉은사에서 상담치료가 시작됐다. 강용주 가정의학과 전문의와 정혜신을 비롯한 여러 시민운동 활동가들이 동참했고, 그렇게 고문피해자들은 힘든 과정을 거쳐 서서히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해갔다.
정혜신은 “그동안 정신과 의사로 살면서 마음에 고통 있는 사람을 1만 명 이상 만나왔지만, 그중 누구도 고문 피해자들처럼 처절하게 살지는 않았다.”고 말한다.44) 그리고 이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국가에 분노했다. 사이코 패스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었다.
“사이코패스의 정의가 그거예요.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할 능력이 없는 것. 국가 폭력으로 사람이 마음을 다쳤는데, 그것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는데 아무도 반성하지 않는 게 말이 되나요. 그런 잔인함에 대한 분노는 정당한 거라고 생각해요.”45)
고문피해자들의 치유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끈질긴 과정을 통해 고문피해자들은 서서히 상처를 치유해갔고, 재심에서 무죄 판정을 받은 몇몇 고문피해자들이 받은 보상금을 바탕으로 2010년 6월 고문피해자들의 치료와 법률소송을 돕고 고문방지 활동에 나서는 재단법인 ‘진실의 힘’이 출범했다.
그리고 ‘진실의 힘’은 ‘와락’에 힘을 보탰다. 정혜신을 따라 쌍용차 노조원들의 상담치료장을 찾은 고문피해자들이 자신의 처지와 저들의 처지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내민 것이다. 정혜신은 그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분들의 성금은 아마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 거예요.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스스로 돕는다는 면에서, 진도간첩단 조작 사건 등 국가폭력 피해자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참담한 삶을 30여 년간 살아온 분들이죠. 안기부 남산 지하실에서 변호사 한 명 없이 두세 달 불법 감금에 밤낮 없는 고문, 그리고 바로 옆방에 가족까지 끌려와 그 고통의 비명을 보고 들어야 했던 상황을 그려보세요. 처음 이들과 상담을 시작할 때 ‘우리 청춘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이미 육십이 넘었다. 상담을 받아봤자 무슨 소용이냐. 당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절규하던 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여러 사람 앞에서 풀어내면서 치유가 시작된 거죠. 이들이 와락 개소식 날 비로소 세상에 ‘공식적’으로 나선 거예요. 법정을 제외하고는요. 이건 바로 피해자 콤플렉스를 벗어나 이 사회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의미하죠.”46)
정혜신은 또 다른 차원에서, 쉽게 공권력이란 이름의 폭력을 자행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것이 결국 폭력의 악순환이 되기 때문이다. 2012년 1월 대구에서 왕따로 자살한 학생과, 그 학생을 죽음으로 몰아간 가해자에 대한 공권력의 처벌을 놓고 정혜신은 이렇게 말한다. 다소 길지만, 우리 사회에 성찰할 거리를 안겨준다는 점에서 인용해본다.
“이번에 왕따 문제가 나오면서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 같은 경우에도 그렇구요. 이제 그런 문제들이 자꾸 나오면서 보도의 방향이나 이런 것들이 가해학생들의 폭력성에 대해서 우리가 자꾸 접하게 되고 알게 됐죠, 유서를 통해서요. 그러면서 12살, 13살, 14살짜리 어린아이들에 대한 사회적인 분노, 그 아이들한테 수갑을 채우고 구속을 시키고 그러니까 그 가해학생의 폭력에 대한 분노로 우리 문제의 어떤 중심, 마음을 싣는 것들이 그쪽으로 넘어가는 것 같고요. 그래서 그 폭력을 처벌하기 위해서 또 다른 어른들의 공권력, 국가의 공권력 이런 것들이 또 집행이 되어야 된다는 쪽으로 문제해결 방향이 자꾸 또 넘어가게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이들이 겪고 있는 아주 섬세한 일상적인 고통에 대해서는 잘 감지 못하고 그런 능력도 없는데, 가해자들의 어떤 구체적인 폭력에 대해서는 쉽게 분노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서 그 폭력에 대해서는 또 폭력적으로 처벌을 하게 되는, 이런 고리로 자꾸 연결이 된다는 느낌이 들어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문제해결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주체인 그 존재들이 자기 존재나 문제 해결을 함에 있어서 어떤 방편으로 폭력을 너무 손쉽게 쓴다, 그래서 저는 쌍용차 같은 문제도 그런 측면이 아주 많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해결하기 위해서 경찰특공대가 투입이 되고요. 공안당국이 개입을 하면서 엄청난 폭력이 있었고 그 폭력으로 인한 내상 때문에 지금 거의 2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자살, 이런 것들로 죽어가고 있죠. 이런 힘을 가진 사람들이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폭력을 손쉽게 쓰는 것. 이런 것들이 또 다른 폭력, 또 다른 죽음, 피해자들의 또 다른 분노를 일으켜서 또 다른 폭력으로 연결이 되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들이 지금 반복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47)
폭력을 없애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오는 현실.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쉽게 폭력을 자행하는 현실. 이 악순환은 계속되고 있다. 본질적인 성찰이나 치유는 이뤄지지 않은 채 말이다. 정혜신이 그런 차원에서 체벌도 반대한다. 그는 “체벌은 ‘간접체벌’이든 ‘직접체벌’이든 굴종과 복종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폭력과 같은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며 “인간의 정신은 매우 예민해서 이는 한 청소년에게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를 남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48)
국가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정혜신의 행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사상이나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막기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치료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무슨 생각으로 그 사람들을 만나는 거냐고 묻는 이가 많습니다. 사상이나 신념의 문제로 보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단순합니다. 가장 급한 사람, 정신과 의사가 꼭 필요한 사람이 그들이기에 만나러 가는 거지요. 그들 바로 앞에 죽음이 있어요. 그걸 막고 싶은 겁니다.”49)
그래서 정혜신은 ‘거리의 의사’를 꿈꾼다. 진료실에만 앉아있는 의사가 아니라 심리적인 고통의 현장에 머물며,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들을 치료하는 ‘거리의 의사’ 말이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이곳이 정신과의사 입장에선 그 어느 곳보다 뜨거운 현장입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눈에 보이진 않지만 펄펄 끓고 있는 마음의 상처가 여기저기 있는데, 그것을 인식하지도, 실체를 알지도 못하죠. 고통스러워 정신과를 찾아가도 의사 쪽에서 충분히 공감해주지 않는다면 그 치료는 중도에 멈춰지거나 환자와 핵심은 공유하지 못한 채 습관적인 치료가 돼버리죠. 그래서 진정한 치유를 위해선 진료실 문을 열고 나와 가정과 직장, 농성장 등 삶의 현장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어요. 그곳은 또한 내 전공 분야가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 꿈은 ‘거리의 의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50)
이 글을 쓰고 있던 2012년 2월 1일,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사망 소식이 또 전해졌다. 벌써 스무 번째. 노조에 알려진 것만 스무 번째일 뿐 숨겨진 죽음이 더 있을 가능성도 크고, 앞으로도 죽음이 계속될 위험도 존재한다. 그 죽음을 막기 위해, 또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며 우리나라가 ‘나’라는 사람이 가진 “개별성을, 서로 다른 마음을 존중할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꿈을 향한 정혜신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51) 그의 발걸음에 작은 응원을 보낸다.
| 주 |
1) 김은지, 「아이들에겐 ‘놀이방’ 노동자에겐 ‘한 끼 밥’ 위로의 공간 문 열다」, 『시사IN』, 2011년 11월 12일, 39면
2) 임지선, 「“사회의 무관심이 죽음으로 내몬다”」, 『한겨레』, 2011년 4월 6일, 3면
3) 송화선, 「정신과전문의 정혜신의 ‘대한민국’ 비판」, 『신동아』, 2011년 8월호, 인터넷판
4) 이은경, 「상처투성이 현장으로 향하는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여성신문』, 2012년 1월 6일, 인터넷판
5) 송화선, 앞의 글
6) 송화선, 앞의 글
7) 곽상아, 「쌍차 19번째 죽음… “폭력진압의 고통, 평생 간다”」, 『미디어스』, 2011년 11월 11일, 인터넷판
8) 김규철, 「“인간 존엄성이 지켜지는 공간입니다”」, 『내일신문』, 2011년 10월 31일, 인터넷판
9) 박송이, 「“해고자들 ‘일상의 복원’ 가장 중요”」, 『주간경향』, 2011년 11월 1일, 인터넷판
10) 박송이, 앞의 글
11) 이은경, 앞의 글
12) 정용일, 「우리시대 자화상 돌아보게 한 100분 동안의 유쾌한 수다 : 마인드프리즘 대표 정혜신」,
『민족21』, 2009년 12월호, 31쪽
13) 정용일, 앞의 글, 30쪽
14) 정용일, 앞의 글, 31쪽
15) 이은경, 앞의 글
16) 송화선, 앞의 글
17) 송화선, 앞의 글
18) 정혜신, 「의사일기 : 의사와 환자는 종이 한 장 차이」, 『한겨레』, 1999년 7월 17일, 12면
19) 안선희, 「구조조정 생존자들에게도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한겨레』, 1998년 12월 2일, 19면
20) 박형숙, 「죽음에 이르는 병, 맨 콤플렉스」, 『월간 말』, 2002년 12월호, 162~163쪽
21) 정혜신, 「남자도 때론 울고 싶다」, 『월간 샘터』, 1999년 10월호, 53~54쪽
22) 정혜신, 앞의 글, 52~53쪽
23) 권귀순, 「한겨레 20년을 빛낸 필자들」, 『한겨레』, 2008년 5월 15일, 34면
24) 최성일, 「삼색공감-사람, 관계, 세상에 관한 단상들」, 『한겨레』, 2006년 2월 17일, M13면
25) 정혜신, 「정혜신 마음읽기 : 참여적 자아」, 『한겨레』, 2003년 2월 17일, 11면
26) 정혜신, 「당신들은 미쳤다」, 『한겨레』, 2004년 3월 15일, 19면
27) 정혜신, 「추가파병과 선택적 사고」, 『한겨레』, 2004년 4월 12일, 19면
28) 정혜신, 「국민을 학대하는 나라」, 『한겨레』, 2004년 7월 12일, 19면
29) 정혜신, 「5공 인사들의 궤변」, 『한겨레』, 2005년 6월 28일, 30면
30) 정혜신, 「두 죽음의 무게」, 『한겨레』, 2006년 1월 3일, 30면
31) 정혜신, 앞의 글
32) 정혜신, 「썰렁한 착각」, 『한겨레』, 2006년 3월 14일, 30면
33) 정혜신, 「원칙 없는 원칙」, 『한겨레』, 2007년 10월 23일, 34면
34) 정혜신, 「자석 언론」, 『한겨레』, 2008년 1월 3일, 30면
35) 정혜신, 「‘1억 달러 내각’」, 『한겨레』, 2008년 2월 28일, 30면
36) 정혜신, 「공기 없이 살 수는 없다」, 『한겨레』, 2010년 7월 1일, 30면
37) 정혜신, 「모든 확전 논리는 슬프고 끔찍하다」, 『한겨레』, 2010년 12월 2일, 30면
38) 정혜신, 「식판의 슬픔」, 『한겨레』, 2010년 12월 23일, 34면
39) 정혜신, 「이명박 vs 박찬욱 : 백미러 없는 ‘불도저’의 자신감, 상향등 없는 ‘크레인’의 자존감」,
『사람 vs 사람』, 개마고원, 2005, 27쪽
40) 정혜신, 앞의 글
41) 정혜신, 앞의 글
42) 정혜신, 「이수성 vs 강준만 : ‘마당발’의 닫힌 연대, ‘단독자’의 열린 고립」,
『남자 vs 남자』, 개마고원, 2001, 119쪽
43) 이태희, 「“다시 태어나면, 죽어도 이 땅에는 안 살라요”」, 『한겨레』, 2005년 9월 13일, 6면
44) 송화선, 앞의 글
45) 송화선, 앞의 글
46) 이은경, 앞의 글
47) 정혜신*김현정 대담,
48) 정유진,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의 ‘폭력 트라우마와 체벌 없는 교육’ 강연회」,
49) 송화선, 앞의 글
50) 이은경, 앞의 글
51) 송화선, 앞의 글
2005년부터 월간 <인물과사상>에 시사인물포커스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만화에 살다』(2002)와 공저 『환경주의자들』(2001), 『미래를 파는 디지절 상인들』(2001), 『남성의 광기를 잠재운 여성들』(2001), 『베스트셀러과 작가들』(2001), 『상상력과의 전쟁』(2002), 『한국영화산업 개척자들』(2003) (이상 인물과사상사 펴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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