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장윤현 감독의 외로워서 완벽한.
프랑스인 흉내 낸 베트남 커피 맛의 비밀
삶은 ‘배리에이션 커피’다. 인생엔 그렇게 겹겹이 더해지는 맛이 있다
아이와 엄마의 대화를 듣던 중, 나는 머릿속에 번쩍 불이 들어오듯 순간적으로 깨달은 것이 있었다. 아, 빨간 불이 켜져 있을 땐 길을 건너면 안 되는구나. 그건 기다리라고, 차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켜지는 것이구나…….
젊었을 적엔 계획을 참 많이 세웠다. 삼십대가 되면 이런 걸 하고, 사십대가 되면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지, 그렇게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인생은 언제나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었다. 지리멸렬한 시간들, 아무것도 뜻대로 되는 일 없어 답답한 순간들이 있는 한편,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찾아와 내 상상과는 다른 곳으로 멀리 나아간 적도 많았다.
깊은 절망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 답답하고, 사랑하던 사람이 멀어져 가는 것을 느끼며 슬퍼지던 때가 있었다. 일은 일대로, 관계는 관계대로 어그러져 벼랑 끝으로 몰리는 듯한 심정이 되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도 알 수 없었고, 어디에도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답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나는 끝없이 좌절했고, 마음은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 불이 켜지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 사거리 신호등의 빨간 불은 오래도록 바뀌지 않았다. 내 곁에 작은 꼬마 숙녀와 그 엄마가 섰다. 노란 유치원 가방을 멘 그 아이는 조잘조잘 엄마에게 계속 말을 걸었고 엄마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엄마, 엄마, 나 왜 여기 서 있는지 알아요. 왠지 알아요?”
“왜?”
“엄마가 알려줬잖아요. 빨간 불이 켜져 있을 땐 길을 건너면 안 돼요. 차에 치일 수도 있으니까요.
빨간 불은 기다리라고 켜놓은 거예요.”
“그렇구나.”
“초록 불이 들어오면 건널 수 있어요.”
“그래, 잘아네.”
아이와 엄마의 대화를 듣던 중, 나는 머릿속에 번쩍 불이 들어오듯 순간적으로 깨달은 것이 있었다. 아, 빨간 불이 켜져 있을 땐 길을 건너면 안 되는구나. 그건 기다리라고, 차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켜지는 것이구나…….
당시 내 삶엔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이것도 저것도 다 막혀 있던 시절,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켜진 불이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전전긍긍,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구르며 왜 건널 수 없을까 좌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 고민도, 생각도 하지 않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렇게 결심하자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고, 더 많이 웃을 수 있게 되었다. 편안한 마음이 되자 세상은 또 다르게 보였고, 보이지 않던 기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삶에 다시 초록 불이 들어온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건널목을 지나 또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횡단보도 앞에 서 있던 그 꼬마 숙녀의 말을 되새긴다. 아무리 급박한 순간이라도 한 시간 정도는 마음을 편안히 먹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어김없이, 마음 한구석에서 초록 불이 반짝이는 것이 보이곤 한다.
ⓒ 이정민(물나무)
나는 평소에 설탕을 넣지 않는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신다. 혹은 아무것도 넣지 않는 드립커피, 아니면 에스프레소 샷에 물만 탄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설탕이나 우유를 탄 배리에이션 커피는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찐득하게 늘어지는 달콤함이나 고소함보다는 깔끔하게 떨어지는 신맛과 쓴맛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로 커피를 마실 때는 가끔 배리에이션 커피를 택하기도 한다. 고소한 카페라테나 달콤한 연유 커피를 마시면, 직전에 먹은 메인 요리의 맵고 짠맛이 중화되는 느낌이 든다. 강렬한 맛에 혹사된 혀가 한결 편안해지고, 마음까지도 푸근해진다.
쓴 커피와 달콤한 설탕, 그리고 우유는 잘 어울리는 궁합이다. 단순히 쓴맛과 달콤한 맛이 만나 중화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커피는 신맛, 떫은 맛, 쓴맛 등 여러 맛이 풍부한 미감을 선사하지만 사실 단맛과 지방은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커피에 설탕을 넣어 단맛을 보충하기도 하고 우유를 넣어 지방의 고소한 맛을 즐기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커피에 부족한 맛까지 겹겹이 더해져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
설탕과 우유를 따로따로 첨가하는 불편함을 한 방에 해결한 커피가 바로 베트남의 연유 커피다. 연유 커피를 처음 맛본 건 베트남 여행 중일 때 였다. 수수한 식당이 눈에 띄어서 해장 삼아 쌀국수나 먹자고 들어갔다가, 옆 자리에서 진한 커피 향이 전해오는 바람에 무심코 커피도 함께 시켰다. 주문을 받던 웨이터는 수십 가지의 커피 이름이 적힌 메뉴를 내오는 대신, 뜨거운 커피를 마실 것인지 차가운 커피를 마실 것인지만 물었다. 그 후 그가 내온 연유 커피의 인상이 너무 강해서, 해장 삼아 먹으려던 쌀국수 맛이 어땠는지는 거의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주문받기 전에 가져다준 투명한 물컵을 커피 잔으로 함께 사용하는 무신경함에 놀랐다. 물컵 아래 연유를 깔고 그 위에 ‘핀(Fin)’ 이라는 베트남식 커피 필터를 얹어서, 뜨거운 물과 함께 가져다주었다. 뜨거운 물의 양을 알아서 조절해가면서 스스로 내려 마시라는 식이었다. 투명한 물컵의 절반쯤 커피를 내려 바닥에 깔린 연유와 잘 섞어서 맛을 보았다. 진하고 달고 비릿했다.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 원두를 당분이 강한 연유로 교묘하게 포장했다는 느낌이 강해서 즐겨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한 번 경험한 정도로 충분했다고나 할까.
ⓒ 이정민(물나무)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커피 공부를 하면서 베트남이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 커피 생산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때 베트남 식당에서 내가 마신 커피가 바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양의 커피를 공급하는 나라의 대표 커피였던 셈이다. 그제야 그 이상한 조합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랑스는 식민지 베트남을 세계에서 두 번째의 커피 생산지로 개발했다. 그들에겐 별 쓰임새도 적고 관심도 없는 쌀농사보다는 대규모 커피 농장에 더 이끌렸던 것이다. 이렇게 베트남에 대규모 커피 농장이 퍼져나가면서, 지배 세력이자 농장주이기도 했던 프랑스인들의 커피 문화가 베트남 사람들 틈에 정착했다.
프랑스인들은 커피에 우유를 듬뿍 탄 라테를 즐겨 마신다. 프랑스의 커피 문화를 받아들인 베트남인들 역시 커피에 우유를 타서 마시기 시작했을 것이다. 베트남에서 주로 생산되는 커피는 향이 있는 아라비카 종이 아니라 쓴맛이 강하고 카페인 양이 많은 로브스타 종이다. 베트남인들은 쓰디쓴 맛의 그 커피에 단 설탕을 많이 넣어 마시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베트남 사람들은 우유 따로, 설탕 따로 섞는 불편을 당분이 듬뿍 든 연유로 해결하기에 이르렀다. 그 커피는 편리한데다 달콤하기까지 해서 힘든 농장 일을 버티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베트남인들은 프랑스인들을 흉내 내어, 또 한 단계 더 진화시켜 커피 맛을 즐겼지만 형식까지 갖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난한 농장 노동자였던 그들이 농장의 안주인마저 애지중지 다루는 은 식기나 도자기 세트의 우아함까지 따라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은 격식을 과감하게 생략해버렸다. 대신 흔한 물컵 위에 얹을 수 있는 그들만의 커피 거름망인 ‘핀’ 을 개발했다. 그건 빠르고 간편했다. 핀 하나만 있으면 어떤 컵 위에 얹어서든 커피를 내릴 수 있으니까. 심지어 오늘날에도 베트남의 거리 포장마차 카페에서는 그렇게 내린 커피를 비닐봉지에 담아 빨대를 꽂아 판다고 한다.
그 옛날 베트남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된 노동과 부족한 상황이 연유 커피를 탄생시켰듯, 힘들고 어려운 시절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만약 내가 슬프고 답답한 시절을 지나오지 않았다면, 횡단보도 앞에서 들었던 그 꼬마 숙녀와 엄마의 대화에서 아무 깨달음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삶의 비밀을 깨닫게 되는 때는,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이 아니라 깊은 좌절에 빠진 순간일지 모른다.
그래서 배리에이션 커피처럼 인생엔 그렇게 겹겹이 더해지는 맛이 있다. 그리 깔끔하게 떨어지는 맛은 아니지만 쓰고 시고 달고 고소한 맛들이 더해져 풍성한 맛을 선사하곤 한다. 아무리 슬프고 답답한 일들이 겹쳐진다 하더라도, 때로는 그 겹겹이 쌓인 마음들로 인해 새로운 빛이 보이곤 하는 것이다.
하기야, 삶이 그렇게 계획대로만 흘러가고 깨끗하게 딱 떨어지는 인생살이라면 얼마나 재미없을까. 삶이 복잡 미묘한 감정과 사건들로 가득 차있어 우리는 조그만 행운에도 신나고 살맛나는 것 아닐까. 그리하여 빨간불이 들어와 답답하고 절망에 빠진 순간이면 언제나 나는 배리에이션 커피 한잔을 곁들인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여러 가지 맛이 어우러져 혀에 감기는 풍미를 느끼며 삶이 또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이 감정들은 또 어디로 흘러갈까 설레는 마음으로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와 '보여 주고 싶은 이야기'를 세련된 감수성, 섬세한 감정선, 디테일한 연출력으로 그려내는 영화감독 장윤현의 첫번째 산문집이다.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접속」, 「텔 미 썸딩」, 「썸」 등 그의 영화에는 늘 인간의 외로움과 폐쇄된 감정 그리고 상처와 슬픔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이 묵직하게 담겨져 있다. 하지만 「황진이」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바리스타, 고종과 커피를 둘러싼 삶과 죽음을 그린 웰메이드 사극 영화 「가비」로 돌아오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관련태그: 에스프레소, 연유 커피, 베트남, 프랑스, 라테, 배리에이션 커피
1997년 영화 <접속>으로 데뷔해, 지금까지 영화감독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수수한 회사원에 가까운 모습이다. 외모나 옷 입는 취향, 일상의 습관 모두 평범하다. 한눈에 영화감독인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문화인다운 풍모도 없고, 촬영 현장에서의 카리스마가 풍문으로 나도는 사람도 아니다. 재기발랄함, 날렵하고 세련된 감각, 이런 것들하고도 거리가 멀다. 나는 그냥 단순 무식하게 꾸역꾸역 앞만 보고 가는 사람,지름길로 가지 못하고 언제나 돌아가는 사람, 다만 오래 꾸준히 파고드는 사람이다. 그건 영화를 만들 때도 그렇고, 커피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커피에서 삶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사람을 발견했다. 내 주요 관심사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사람을 관찰하고,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커피에서 발견한 사람들의 모습을 오래도록 생각하게 되었다. 그건 때로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일이었다.
가끔은 삶이 엇나간다는 생각에, 상처 받아 숨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날 위로한 건 한잔의 커피였다.
작품으로는 <접속>(1997), <텔 미 썸딩>(1999), <썸>(2004), <황진이>(2007)…… 그리고 <가비>(2012)가 있다.
<장윤현> 저12,600원(10% + 5%)
한편의 영화를 보듯 섬세한 관찰력으로 풀어낸 34가지 커피와 감정에 관한 이야기 헤아리다, 들여다보다, 응시하다, 바라보다, 귀 기울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와 '보여 주고 싶은 이야기'를 세련된 감수성, 섬세한 감정선, 디테일한 연출력으로 그려내는 영화감독 장윤현의 첫번째 산문집이다. 「오! 꿈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