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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에서 얻어 마신 커피 한 잔, 평생 잊지 못할 기억

때로는 커피 한 잔이, 우리의 짙은 상흔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거울 역할을 하는지도… 대부분의 상흔은 엉뚱한 곳으로 튀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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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보다 권위 있는 자에게 압박을 받은 이들은 자신보다 약한 이들에게로 그 독을 흘려보낸다. 배우자에게 상처를 입은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린 자녀들에게까지 두려움이 퍼지게 한다. 사랑을 하다가 배신이나 희롱을 당한 이들은 다음 사랑에게 함부로 그 고통을 풀어대기도 한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아픔을 사람에게 푼다. 만약 가해자에게 그 상처를 돌려준다면 씁쓸하되 어느 정도 공평한 게임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흔은 엉뚱한 곳으로 튀게 마련이다.

지치고 힘든 일이 넘쳐날 때,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웅크려 숨고 싶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거울을 향해 웃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완벽히 즐거워 보이면 나는 안심한다. 내 스트레스와 상처가 다른 이에게 전염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아무에게도 내 슬픔을 떠넘기는 일은 없을 테니까.

잡생각들로 인해 몸이 무거울 때면, 나는 훌쩍 북한산에 오르고는 한다. 구기 터널 쪽을 지나가다가 마음이 동하는 바람에 북한산으로 운전대를 돌린 적도 있다. 차에 늘 싣고 다니는 등산화로 갈아 신고 서너 시간쯤 북한산 능선을 걷다가 내려오면, 복잡했던 마음의 매듭들이 어느새 차분히 풀려 있다. 등산의 맛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산이 이렇게나 친근한 거리에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

지인 중에도 나만큼 북한산을 좋아하는 이가 있다. 외국에 거처를 두고 있는 그분은, 한국에서 어느 것 하나만 뚝 떼어 가져갈 수 있다면, 주저 없이 북한산을 옮기겠노라고 농담하고는 한다. 세상 어디를 돌아다녀 봐도 북한산만큼 접근성이 좋은 동시에 산세조차 야무진 명산이 없다는 것이다. 그분은 한국에 올 때마다 북한산에 오른다. 최근에도 일 때문에 서울에 잠깐 들를 일이 있었는데, 찰나의 짬이 생기자마자 혼자서 북한산에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산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커피 한 잔을 마셨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블랙커피 맛이 혀 끝에 느껴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느지막한 평일 아침에 그녀는 홀로 북한산을 찾았다. 친척집에 잠시 머무르고 있던 터라, 평소 등산할 때만큼 여유롭게 배낭을 꾸릴 처지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구기 터널 입구에서 김밥 한 줄과 생수를 구입해 산에 올랐다. 그날은 대남문을 통과해 문수봉과 사모바위를 거쳐 비봉까지 갔다가 내려올 계획이었다. 만만하게 볼 산이 아닌데다가 겨울에 홀로 하는 산행이기에 제일 안전한 코스를 잡았던 것이다. 응달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 있었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벌어졌다.

산을 오르는 내내, 여기저기서 커피 향이 희미하게 퍼져왔다. 옹기종기 앉은 등산객들이 추위를 녹이려고 저마다 뜨거운 커피나 차를 마셨기 때문이었다. 커피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추운 날 산행을 한다면 코끝을 스치는 커피 향을 무시하기 힘들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매일 아침 원두를 갈아서 막 내린 커피 한 잔과 빵 한쪽으로 하루를 시작할 정도로 커피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콧속으로 밀려드는 커피 향이 얼마나 진하고 매혹적이었는지, 그녀는 산행 내내 커피를 챙기지 않은 자신을 책망했다고 한다. 혹시 누군가가 커피 한 잔을 건네주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도 있었다. 지난해 바로 이 산에서 등산객의 인심을 경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그는 김밥 한 줄과 생수만 달랑 들고 산에 올라가는 바람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 허기를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무리가 자리를 마련해주고는 막걸리에 밤고구마, 컵라면, 초콜릿 몇 조각까지 내주는 것이 아닌가. 그 경험은 자연스럽게 그 해 최고의 고국 방문 선물이 되었고 잊지 못할 기억이 되었다. 그런 인심 좋은 커피에 대한 굶주림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한 발 한 발 산을 오를수록 누군가에게 커피를 청하자는 마음이 굳어져가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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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민(물나무)

 

대남문에 이르니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점심을 먹는 무리가 두엇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아저씨들보다는 같은 아줌마끼리가 조금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녀는 조심스레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 부근이 가장 양지 바른 곳이라 자리도 고슬고슬하게 말라 있던 차였다. 혹시 커피가 있을까 싶어 자신도 모르게 그 무리에게 흘깃흘깃 시선이 향했다. 결국 그녀는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갔다. 쿠킹 포일로 둘둘 만 김밥을 꼭 움켜쥔 채로 “실례 좀 할게요” 가볍게 목례를 하면서 말을 건네자, 대번에 “실례하지 마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대답은 날이 잔뜩 서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반문을 했으나, 상대방은 여전히 날카롭게 “방해하지 마세요”하고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무안함이 온 몸을 휘감았다. 속은 이미 부글부글 끓었다. 북한산의 이 양지 바른 장소가 모두 당신의 땅이냐고 따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낯선 상대를, 그것도 또래의 동성(同性)을 단칼에 내치는 이유가 내심 궁금해졌다.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물었다. “이쪽 볕이 좋아서 김밥이나 먹고 가려는데, 그것도 안 된다고요?” 이 물음에 가장 수더분한 인상의 아줌마가 나서서 “전도하려는 거 아니세요?”라고 되물었다. 그제야 어찌된 연유인지 이해가 갔다. 허름한 일상복에 등산화만 갖춘 채로 산을 오른 모양새가 영 심상찮았을 뿐더러,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던 행동(커피를 얻어 마시려 했던 것뿐인데!)이 꼭 특정 종교를 선교하러 다니는 사람처럼 보인 것이다. 그러한 오해를 품고 있던 차에 슬그머니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자, 절대로 곁은 내주지 않고 단번에 내치자고 의견을 모았다고 했다. “저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저쪽에서 김밥이나 먹고 가려구요.” 다행히 오해는 풀렸지만 바람대로 커피 한잔 나누어 마시자는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아줌마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그녀는 생수를 곁들여 김밥을 먹었다. 몸을 녹일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아쉬웠지만 별 수 없었다.

김밥의 꼬다리 하나가 남았을 무렵, 그쪽 일행 중 하나가 “괜찮다면 커피 한잔 드실래요?”라고 물어왔다. 어찌됐든 그날의 커피 구걸 계획은 성공한 셈이었다. 하지만 인스턴트커피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건네준 그 커피는 지독히도 썼다. 그녀는 쓰디쓴 커피 한 잔을 급히 마시고 어색한 그 자리를 얼른 떠버렸다.

그날 문수봉에서 내려다본 서울은 유난히도 흐렸다고 한다. 가늠할 수 없이 뿌연 서울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아줌마들의 그런 날선 반응이 돌아오기까지, 특정 종교를 선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악스러웠는지를 가늠해보았다. 한눈에 셈했던 첫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해 낙인을 찍고 밀어내는 마음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 헤아려보기도 했다. 이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피를 우려내듯이 점점 더 깊고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일상에서 얻은 무수한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이유에까지 도달했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상처나 스트레스가 엉뚱한 타인에게 엄혹한 방어벽으로 치환되는 모습을 직접 마주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낯선 이로부터 내 아픈 곳에 다가오지 마, 건드리면 나도 가만 있지 않아’하고 아우성치는 상처의 존재가 쓰라리게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문득, 나는 이성복 시인의 시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가 떠올랐다.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 기억의 카타콤에는 공기가 더럽고 아픈 기억의 아픈, 국수 빼는 기계처럼 튼튼한 기억의 막국수, 기억의 원형경기장에는 혀 떨어진 입과 꼭지 떨어진 젖과…… 찢긴 기억의 天幕에는 흰 피가 눈 내림, 내리다 그침, 기억의 따스한 카타콤으로 갈까요, 갑시다, 가자니까, 기억의 눅눅한 카타콤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을뿐더러 휴식도 찾아들지 않는 것 같다. 상처의 기억은 카타콤 같은 지하 묘지처럼 더럽고 아프다. 그 퇴폐한 공기가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지금 내가 머무는 곳까지 스며든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자신보다 권위 있는 자에게 압박을 받은 이들은 자신보다 약한 이들에게로 그 독을 흘려보낸다. 배우자에게 상처를 입은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린 자녀들에게까지 두려움이 퍼지게 한다. 사랑을 하다가 배신이나 희롱을 당한 이들은 다음 사랑에게 함부로 그 고통을 풀어대기도 한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아픔을 사람에게 푼다. 만약 가해자에게 그 상처를 돌려준다면 씁쓸하되 어느 정도 공평한 게임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흔은 엉뚱한 곳으로 튀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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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민(물나무)

 

북한산에서 지인이 당한 일도 마찬가지다. 실례하겠다는 한 마디만으로 그 아줌마들이 대번에 정색을 표한 이유도, 자신과 상관없는 종교의 권유에 진저리 칠 정도로 염증이 났기 때문이다. 두어 마디 귀담아 듣는 여유가 있었더라면 생판 처음 보는 남을 몰인정하게 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봄가을마다 사람 몸살을 앓을 정도로 아름다운 북한산에서는 더욱 마음이 넉넉해지게 마련인데 왜 그랬을까. 좀 더 품이 넓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생긴다. 그러나 지인과 같은 소박한 차림의 무수한 종교인으로부터 받았을 자잘한 괴롭힘이 단단하게 날선 가시로 거듭난 게 아닐까……. 그리고 이런 스트레스는 정작 자신을 못살게 군 이들이 아닌, 엄한 사람에게 향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건 모두, 상처가 시킨 일이다.

서점의 맨 앞줄에 놓여 있는 책들 중에는 심리 상태에 대한 고찰이나 상처 치유에 관한 것들이 차고 넘친다. 그만큼 수요가 많다는 건, 마음 한편에 상흔을 입었다 여기는 이들이 많다는 증거다. 누군가에게서 받은 고통을 다음 주자에게 건네고, 또 그 다음 주자에게 건네주는 릴레이가 끝 모르고 이어지는 현실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넘긴다고 해서 내 상처가 낫는다는 보장이 없는데도 그 야속한 릴레이는 멈추지 않는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들이 그렇게 치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지도 모른다. 혹여 내게 상처가 생기더라도 잘 보듬고 안아서 아물게만 한다면 다른 이에게 상처를 넘길 일이 없을 테니까.

지인은 북한산에서 얻은 씁쓸한 인스턴트커피 한 잔을 들여다보며, 혹여 자신이 치유하지 못한 상처를 남에게 건네지는 않았는지 한참 기억을 더듬어보았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들고 있던 블랙커피에 나를 투영해보았다. 블랙커피만큼 검은 상처가 나 자신도 모르는 어느 구석에 숨어 있는지 살펴보았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흉터더라도 우유를 섞은 카페라테처럼 잘 아물어 날카로운 가시로 변모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따금 블랙커피가 담긴 커피 잔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단단한 가시로 변모해 남을 괴롭히는지 지켜보아야 하니까……. 때로는 그렇게 커피 한 잔이, 우리의 짙은 상흔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거울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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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워서 완벽한 장윤현 저 | 쌤앤파커스

'하고 싶은 이야기'와 '보여 주고 싶은 이야기'를 세련된 감수성, 섬세한 감정선, 디테일한 연출력으로 그려내는 영화감독 장윤현의 첫번째 산문집이다.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접속」, 「텔 미 썸딩」, 「썸」 등 그의 영화에는 늘 인간의 외로움과 폐쇄된 감정 그리고 상처와 슬픔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이 묵직하게 담겨져 있다. 하지만 「황진이」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바리스타, 고종과 커피를 둘러싼 삶과 죽음을 그린 웰메이드 사극 영화 「가비」로 돌아오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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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장윤현(영화 감독)

1997년 영화 <접속>으로 데뷔해, 지금까지 영화감독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수수한 회사원에 가까운 모습이다. 외모나 옷 입는 취향, 일상의 습관 모두 평범하다. 한눈에 영화감독인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문화인다운 풍모도 없고, 촬영 현장에서의 카리스마가 풍문으로 나도는 사람도 아니다. 재기발랄함, 날렵하고 세련된 감각, 이런 것들하고도 거리가 멀다. 나는 그냥 단순 무식하게 꾸역꾸역 앞만 보고 가는 사람,지름길로 가지 못하고 언제나 돌아가는 사람, 다만 오래 꾸준히 파고드는 사람이다. 그건 영화를 만들 때도 그렇고, 커피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커피에서 삶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사람을 발견했다. 내 주요 관심사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사람을 관찰하고,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커피에서 발견한 사람들의 모습을 오래도록 생각하게 되었다. 그건 때로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일이었다.

가끔은 삶이 엇나간다는 생각에, 상처 받아 숨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날 위로한 건 한잔의 커피였다.

작품으로는 <접속>(1997), <텔 미 썸딩>(1999), <썸>(2004), <황진이>(2007)…… 그리고 <가비>(2012)가 있다.

외로워서 완벽한

<장윤현> 저12,600원(10% + 5%)

한편의 영화를 보듯 섬세한 관찰력으로 풀어낸 34가지 커피와 감정에 관한 이야기 헤아리다, 들여다보다, 응시하다, 바라보다, 귀 기울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와 '보여 주고 싶은 이야기'를 세련된 감수성, 섬세한 감정선, 디테일한 연출력으로 그려내는 영화감독 장윤현의 첫번째 산문집이다. 「오! 꿈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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