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윤하정의 공연 세상
오늘을 살아가는 여자들의 지친 마음, 손숙의 <아내들의 외출>
연극이 나를 구원했어요. 무대는 위로와 치유의 공간이니까요!
“연극이 갖고 있는 기능이 사회에 중요한 화두를 던져서 함께 생각해보고, 관객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는 거니까요. ‘저건 내 얘기잖아’ 공감하고, ‘다른 사람들도 저렇구나’ 위로받는 거죠. 연극은 돈을 내고 시간을 내서 극장까지 찾아오는 관객들에게 살아가는 희망과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현대 여성들이 앓고 있는 증세들, 병이라기보다는 증세가 맞는 것 같아요. 들여다보면 누구나 조금씩 갖고 있는 증세들에 대해 얘기하고 나누는 작품이에요.”
아내들의 외출. 연극 제목이 심상치 않다는 기자의 말에 손숙 씨는 작품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줬다. 이야기는 엄마와 딸, 며느리가 모처럼 해외여행을 하다 비행기를 놓치면서 낯선 공항대합실에서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며 펼쳐진다.
"3명의 여자가 각각 앓고 있는 증세들이 있어요. 엄마는 치매 초기 증세, 또 딸이 앓고 있는 우울증, 며느리도 슈퍼우먼이 돼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고요. 현대사회가 물질만능주의에 경쟁사회, 교육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어서 작품을 보시면 누구나 조금씩은 비슷한 부분을 발견할 거예요. 다른 사람의 얘기가 아니잖아요, 배우들도 모두 공감하는 내용이거든요.”
그녀 역시 딸과 며느리, 아내와 엄마라는 모든 이름을 가지고 살았다. 어떤 이름이 가장 마음에 남을까?
“아무래도 엄마겠죠(웃음). 모든 이름이 다 걸리지만, 보통의 엄마는 아니었으니까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한국 어머니 상인데, 저는 일하는 엄마였고, 자식에게 100% 희생하는 엄마가 아니라서 항상 미안했거든요. 아이들이 별다른 문제없이 잘 자라줘서 고맙지만, 그 부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요.”
극중에서 엄마 역이다. 관객들과 가장 공감하고 싶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어떤 것인가.
“세 여자 모두 들여다보면 고통 받는 나름의 원인들이 있어요. 가깝지만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얘기들을 낯선 시간, 낯선 대합실에서 하게 되거든요. 관객들도 갖고 있는 증세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했으면 좋겠어요. 아프면 병원에 가고, 가족이나 주변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기를 바라는 거죠. 사람과 사람이 서로 나누고 도와주다 보면 극복할 수 있거든요.”
그녀는 연극을 통한 공감과 치유를 강조한다.
“연극이 갖고 있는 기능이 사회에 중요한 화두를 던져서 함께 생각해보고, 관객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는 거니까요. ‘저건 내 얘기잖아’ 공감하고, ‘다른 사람들도 저렇구나’ 위로받는 거죠. 연극은 돈을 내고 시간을 내서 극장까지 찾아오는 관객들에게 살아가는 희망과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녀 역시 무대에서 토해내고 무대에서 위로받았다. 그녀는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서 남편의 사업 빚을 갚느라 오랜 시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사정을 밝혔다. 그때 그녀를 구원해준 것은 바로 연극이었다.
“연극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죠. 하지만 연극이 없었더라면 그 어려운 시간을 못 견뎠을 거예요. 그때 나를 구원해준 것은 연극이었어요. 연습실에 나와 있는 시간, 무대 위에 있는 시간들은 현실을 잊게 하잖아요. 전혀 다른 인생이니까. 셰익스피어의 대사처럼 연극이 현실인지 현실이 연극인지 잊어버릴 때가 있으니까요. 그런 힘이 나를 위로하고 나아가게 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그녀는 50년 가까운 시간을 무대 위에서 쉼 없이 달려왔다.
“150편 정도의 작품을 하지 않았을까. 정말 쉬지 않고 했어요, 다른 걸 할 줄 모르니까(웃음). 방송이나 다른 일들은 연극을 통해 파생된 것이지, 다른 일을 찾아가거나 그것 때문에 연극을 포기한 적은 없어요. 연극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편안하고, 무대 위에서 위로를 받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무대에서는 언제나 청춘이다. 손숙 씨를 비롯해 이순재, 오현경, 박정자, 윤소정 씨 등 70세 안팎의 베테랑 배우들이 1년에 3~4편의 작품과 함께 짱짱하게 무대를 지키고 있지 않던가.
“연극에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좀 바보 같은 사람들이에요. 이 좋은 시절에 할 일도 많고 돈 벌 기회도 많은데 죽어라고 여기 남아 있잖아요. 연극처럼 안 바뀌는 곳도 없어요. 젊은 친구들도 연극하는 아이들은 참 달라요. 순수하고, 고집스럽게 바보 같아요. 돈벌이가 돼야 할 텐데, 그런 점은 안타깝고 미안하고 그래요.”
바보처럼 40여 년의 시간을 무대에서 걸어온 그녀는 희망하는 것 역시 소박하다. 그저 ‘괜찮은 배우’로 기억되길 바란다.
“저는 ‘배우’라는 말이 좋아요. 그래서 그냥 ‘괜찮은 연극배우’ 정도로 남고 싶어요. 한길을 열심히 걸어온 저의 작품을 보고 관객들이 어떤 희망이나 새로운 용기를 갖는다면, 아주 잠시라도 후련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내 능력이 있는 한은 무대에 설 것이고, 그러나 무대에서 죽겠다는 욕심까지는 없어요. 같이 하는 배우에게 폐가 된다면 가차 없이 내려올 거예요. 그때는 좋은 관객으로 후배들을 응원해야죠. 그렇게 물 흐르듯이 살아가고 싶어요(웃음).”
욕심 없는 연극배우 손숙 씨는 매일 오전 2시간 동안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아내들의 외출> 이후에도 연말까지 무려 3편의 작품이 예정돼 있다. 그녀가 체력만큼은 욕심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대에서 언제나 ‘여자’ 그리고 ‘엄마’로 열연하는 손숙 씨의 <아내들의 외출>은 3월 23일부터 4월 15일까지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랙에서 공연된다. 삶에 지친 수많은 이름의 여자들, 그녀가 전하는 위로와 무대가 선사하는 카타르시스를 만끽해보자.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
<윤하정> 저11,700원(10% + 5%)
공연예술계의 인물을 인터뷰한 윤하정의 책. 책은 그동안 진행했던 인터뷰를 기초로, 추가 인터뷰를 하면서 인물들의 진솔함을 더욱 끌어내고자 했다. 이 책 속에서 인터뷰한 인물들은 ‘배우, 연출가, 피아니스트, 하모니카 연주자, 미술해설가’라는 직업을 가졌다. 무대에 서는, 또는 무대를 만드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