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1층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
냄새와 기억은 한 몸일까… ‘프루스트 현상’
나는 천천히 걷는다. 일층, 여기는 백화점 전체에서 가장 좋은 향기가 나는 층이다. 이 향기는 어디서 왔을까. 코를 킁킁거리며 향기를 따라간다. 향기는 부드럽게 내 몸을 껴안곤 살며시 그쪽으로 이끈다.
공원, 카페, 시장, 학교 운동장, 한강, 공터, 극장. 누구에게나 자주 가는 장소가 있을 것이다. 그 장소가 야외인가 실내인가 구분하면 백화점만큼 넓은 실내 공간은 도시에서 흔치 않다. 입장료도 필요 없고 원한다면 누구나 다 외부와 차단된, 다른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구경꾼이 될 수도 있고 만보객이 될 수도 있으며 물론 쇼퍼shopper가 될 수도 있다. 폐쇄돼 있지만 완벽한 보호성을 지닌 장소다. 이 거대한 실내에 들어서면 한동안 시간을 잊게 되는 것도 이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진 사실과 같이 백화점 내부엔 시계도 창도 없다.
동선은 자유롭다. 백화점을 건축계획할 때 내부 공간은 먼저 동선계획부터 시작된다. 고객의 흉부 위치에서부터 고객이 가방을 하나 들었을 때, 두 명이 팔짱을 끼고 지나갈 때의 너비와 길이까지 고려해 치수를 계산하는데, 그 공식 또한 따로 있다. 백화점을 구성하는 핵심 동선요소는 고객, 상품 그리고 종업원이다. 취재를 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백화점 바닥에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고객 동선’과 ‘직원 동선’이 엄밀하게 나뉘어 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상품의 동선’까지. 동선계획의 첫째 목적은 고객이 자유롭게 걸어다니면서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구경꾼이 될 때도 있고 만보객이 될 때도 있다(개인적으로 나는 내가 시장에 있을 때는 ‘산책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화점 같은 대규모 실내 공간에 있을 적에는 이 ‘만보漫步하다’ 라는 말을 쓴다. 두 단어 모두 ‘한가롭게 거닐다’의 뜻을 가졌지만 만보에는 그러한 ‘걸음걸이’까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을 자주 가는 편이라고 말해야 하지만 내가 진정한 쇼퍼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도 백화점에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천천히 걷는다. 일층, 여기는 백화점 전체에서 가장 좋은 향기가 나는 층이다. 이 향기는 어디서 왔을까. 코를 킁킁거리며 향기를 따라간다. 향기는 부드럽게 내 몸을 껴안곤 살며시 그쪽으로 이끈다. 세상에는 사십만 가지의 냄새가 존재하며 인간은 약 만 가지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고 한다. 코라는 감각기관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코’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조건반사처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코』가 떠오른다. 길이가 대여섯 치에 턱 밑까지 늘어진 “가늘고 긴 순대 같은” 코를 가진, 소심한 젠치全智 법사의 이야기다. 밥 먹을 때 국그릇에 빠지기 일쑤인 긴 코가 불편하기도 했지만 법사가 코를 짧게 만들고 싶어 한 건 타인의 시선 때문이었다. 자신의 일을 돕던 상좌에게 배운 대로 법사는 뜨거운 물에 코를 삶기로 결정한다. 삶은 코를 남에게 질근질근 밟게 하면 코가 짧아진다는 거였다. 법사의 코는 드디어 짧아지긴 했지만…… 열 페이지쯤 되는 짧은 소설이다. 인간에게 있는 모순된 두 가지 마음, 그리고 상대방의 궁지가 속속들이 드러나고 묘사될 때 사람이 얼마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가, 하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담고 있는. 법사가 뜨거운 물에 삶은 코를 상좌에게 밟게 할 때, 그 코의 생김새와 모공에서 나오는 “깃털의 심 같은” 피지들이 우스꽝스럽지만 꽤나 노골적으로 묘사돼 있어 비위가 약한 독자라면 그 부분에서는 마음의 준비가 약간 필요하다. 생각날 때면 다시 펼쳐 읽곤 하는 소설인데 나는 매번 이게 궁금하다. 그렇게 크고 긴 코를 가진 젠치 법사라면 남보다 더 냄새를 잘 맡았을까? 코의 크기와 길이는 후각의 기능과 역할에 영향을 미칠까 아닐까?
글 쓸 때 내가 자주 막막해지는 이유 중 하나는 냄새, 향기에 관해서 언어로 표현하기가 특히 어렵다는 것을 깨닫곤 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벽에 부딪친 느낌, 바로 그렇다.
청각 촉각 시각 후각 미각. 인간에게 있는 오감五感 중 뇌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는 감각이 무엇일까? 투표를 한다면 나는 기꺼이 후각 쪽에 손을 들 거다. 시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긴 하지만 보는 행위는 빛이 존재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인체 해부도를 보면 콧속에 부비동이라고 하는 기관이 있다. 코 안쪽과 두개골을 연결하고 있는 구멍이다. 냄새를 들이마신다는 것은 그때 그 시간의 공기를 뇌 속으로 빨아들이는 것과 같다. 후각은 빛이 없이도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그 냄새를 처음 맡았던 바로 그때로 우리를 순식간에 되돌려놓는 힘을 가졌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홍차에 마들렌을 적셔 먹다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을 쓴 사실은 유명하다. ‘프루스트 현상’이라는 말은 그 후에 생겨났다. 어떤 특정한 냄새에 이끌려 기억을 찾아 되짚어보는 현상을 말한다.
나의 첫 책 『식빵 굽는 시간』을 쓰던 때는 오월이었다. 동네 집집마다 아카시아가 한창이었다. 밤이면 가끔 창을 활짝 열어놓은 채 글을 썼다. 우리 집은 봉천奉天이라는 지명답게 고지대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내 방은 거기서도 옥상에 있다. 좋은 향기를 맡게 될 때는 잊고 있다가도 악취 비슷한 것을 맡게 되면 냄새는 왜 고집스럽게 위로 올라오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러나 아카시아 꽃향기는 분명 기분 좋은 냄새에 속한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아카시아 향이 내 몸속으로, 피부와 뇌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글 쓰느라 곤두선 신경도 누그러지고는 했다.
그 후 십오 년이 흘렀고 우리 동네도 많이 변했다. 재개발 붐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집들은 대부분 기숙사처럼 생긴 잿빛 연립주택들과 오피스텔들로 바뀌었다. 풍경이 바뀐 건 말할 것도 없고 나무들이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도 오월 오후, 내 방에 한가로이 엎드려 책을 읽고 있을 적이면 어디선가 아카시아 향기가 스며들어온다. 아마 저쪽, 관악 어느 산자락에서 불어오는 냄새일지도 모른다. 혹은 아무 냄새가 나지 않은 것인지도. 그저 오월이라는 달력을 보면서 느낀 후각 감수성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달콤하고 싱그러운, 조금은 끈적거리는 듯한 아카시아 향을 알아차리고, 감각한다. 그리고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고는 불안과 긴장, 떨림과 매혹으로 첫 책을 쓰던 이십대 후반, 내 오월의 날들을 지금, 현재인 듯 떠올리는 것이다.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쓰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동시에 어렵고 아픈 시절이었다. 한 사람을 막 알아가던 때였다. 5월 1일에 시작한 원고를 17일에 마쳤다. 원고지 오백 매가 넘는 경장편이었다. 우리는 십칠 일 동안 만나지 않았다. 호출기와 테이블마다 전화가 놓인 카페가 유행하던 때였다. ……냄새는 기억을 불러내는 마법사 같다. 그 순간이, 생생하다.
냄새와 기억은 한 몸일까.
오월의 아카시아 향. 그러나 이것이 나의 가장 강렬한 ‘프루스트 현상’은 아니다.
소설가 조경란이 쓴 백화점을 직접 조명한 문화 에세이다. 백화점이라는 ‘장소’가 현대인들에게 갖는 의미와 기능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이 책은 현장 취재와 자료조사를 통해 깊이와 넓이가 더해져 오롯이 백화점을 다룬 최초의 논픽션이 되었다. 정신적인 삶, 물질적인 삶 사이에서 갈등한 저자의 고민이 엿보인다…
주변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인간의 고독과 우수를 부감시키며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깊이 있게 보여주는 작가 조경란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년 후에 서울예대 문학창작학과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소설집 『불란서 안경원』『나의 자줏빛 소파』『코끼리를 찾아서』 『국자 이야기』 『풍선을 샀어』, 중편소설 『움직임』, 장편소설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혀』, 산문집 『조경란의 악어 이야기』『백화점』 등이 있다. 문학동네작가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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