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2일, 우리는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디바를 잃었다. 목소리만으로 세계 음악계를 사로잡았던 여왕은 너무나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났다. 그래미 시상식을 불과 하루 앞두고, 전야 행사 참석차 방문한 로스앤젤레스에서 4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것이다. 약물중독 치료 후 순조로이 재기를 준비하는 듯 보였기에 이같이 갑작스런 죽음은 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2010년 월드 투어 차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찾았을 때, 공연장에서 극심하게 쇠락한 목소리로 힘겨워하던 당시에도 대다수 팬들은 그가 몇 년 뒤 세상을 등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목소리는 힘에 부쳤지만, 무대에서의 활력은 전성기 시절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시선은 해외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망 소식에 팬들 뿐 아니라 음악계 인사들도 패닉에 빠졌고, 아레사 프랭클린, 머라이어 캐리, 존 레전드 등 동료들은 트위터와 페이스 북 등 소셜 미디어에 메시지를 남겨 고인의 넋을 기리는 추모 행렬에 동참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13일 오전에 열린 그래미에서도 추모 분위기는 계속 되었다. 이날의 호스트였던 래퍼 엘엘 쿨 제이는 영롱한 팝계의 흑진주를 위해 기도문을 낭독했고, 알리시아 키스, 스티비 원더 등도 무대 위에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레코딩 아카데미 위원장 닐 포트나우(Neil Portnow)도 메시지를 남겼으며 이어 등장한 제니퍼 허드슨이 휘트니의 대표곡 「I will always love you」를 부르자 추모 분위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휘트니 휴스턴은 1985년 데뷔와 동시에 팝계의 판도를 변화시킨 혁신적 디바였다. 불안정한 미래를 공상하던 뉴웨이브와 남성적인 메탈 사운드가 주를 이루던 시기에 비주얼, 퍼포먼스 등 외형적인 면을 앞세우기보다 목소리로 승부하던 22살의 소녀는 팝계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곧 대세로 자리 잡았다.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이 미국 내에서만 1300만장 판매를 기록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소포모어 작품은 여성가수 최초이자 마이클 잭슨(
< Bad >)에 앞서 앨범 차트 1위(1987년 6월 27일)로 데뷔했으며, 1985년 「Saving all my love for you」부터 1988년 「Where do broken hearts go」까지 7곡을 연속으로 싱글차트 정상에 올리기도 했다.
타고난 체형과 외모도 뛰어났지만, 목소리의 다양한 매력이 휘트니를 가장 빛나게 했다. 그의 대모이자 ‘퀸 오브 소울‘ 아레사 프랭클린의 카리스마, 이모인 디온 워윅의 중후함, 패티 라벨의 폭발력과 다이아나 로스의 대중성까지, 그의 보컬은 흑인 여성 가수의 완성판으로 평가된다.
휘트니의 성공을 이끈 음반업계의 베테랑 클라이브 데이비스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휘트니 휴스턴은 자신이 지닌 옥타브 내에서 낼 수 있는 모든 음을 낸다, 라고 평가했다. 넓은 음역대를 소화하는 풍부하고 따뜻한 표현력과 폭발적인 성량이 컨템포러리 팝/알앤비의 전성기를 여는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이전까지 흑인 보컬이 지니고 있었던 진중함과 더불어 백인 보컬의 청량감까지 가진 국보급 보이스야말로 그가 가진 최고의 무기였다.
이처럼 거칠 것 없던 그녀의 커리어는 바비 브라운과의 결혼 이후 서서히 침체기를 맞았다. 바비와의 결혼 생활동안 잦은 폭행과 약물 중독에 시달렸고, 마리화나와 코카인 등 약물에 직접적으로 다리를 놔준 이가 다름 아닌 남편이었음이 드러났다. (2007년 휘트니와 바비 브라운은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고, 그녀의 약물 중독설은 2009년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를 통해 사실로 밝혀진다.)
1992년 결혼생활과 동시에 음악 활동은 뜸해졌고, 본격적으로 연기활동을 병행하며, 1999년까지 2장의 사운드트랙(
< Waiting To Exhale >,
< The Preacher's Wife >)과 한 장의 정규 앨범(
< My Love Is Your Love >)을 발표하는 데 그쳤다. 그 사이 그의 보컬은 점차 총기를 잃어갔으며, 2003년 열린 VH1 디바스 듀엣 콘서트에서 자신의 상태를 온전히 드러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 후 6년 만에 발표한 컴백 작품
< I Look To You >가 앨범 차트 1위에 오르며 선전했지만, 이미 보컬은 회복이 힘들만큼 악화되어 있었다. 여타 가수의 재기를 극진히 예우하던 그래미 측은 단 한 부문에도 후보에 올리지 않은 채 컴백을 평가절하 했다. 그 사이 언론들은 음악 외적인 가십 기사를 양산했으며, 사망 몇 주 전인 최근까지 파산설이 보도되는 등 고난의 시기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개인사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지만, 음악계에 미친 영향력은 여전히 화려하게 빛을 발한다. 휘트니는 특출한 성대를 통해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하며 여가수 전성시대를 열었고 이후 머라이어 캐리, 토니 브랙스턴, 셀린 디온,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출현을 가능케 해준 반석을 마련했다. 남성 아티스트와 동등한 대중적, 상업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차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재의 음악계 풍토도 휘트니 휴스턴의 등장으로 활성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그래미에서 돌풍을 일으킨 아델의 경우처럼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가수의 진심어린 보컬이다. 휘트니는 이런 기본적인 것을 자신의 유니크한 성대로 충실하고 높은 수준으로 구현했으며, 이를 통해 대중적으로나 평단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은 선구자적 싱어 중 한명이다. 비록 휘트니는 가고 없지만, 그와 그의 음악은 누구보다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오랫동안 대중 곁에 자리할 것이다.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글 / 성원호 (dereksung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