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를 다시 읽었다.
한 학기를 끝내고 이제 좀 숨을 돌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 스르르 낮잠에 빠지고 싶기도 했다. 따분한 책보다는 가벼운 책이 절실했다. 그리고 책장에 꼽혀 있는 책 한 권을 골랐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이 책은 내가 사지 않았다. 아마도 채린과 하린이 샀거나 선물을 받았을 것이다. 소녀 취향에 맞게 일러스트가 소녀풍으로 꾸며진 예쁘장한 양장본이었다. 과연 이런 책들은 읽기 위해 만든 것인지 아니면 선물로 주고받기 위해 만든 것인지 가끔 애매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째든, 예전에 읽은 책이었지만 다시 읽고 싶어졌다.
‘이런 책이었나’ 할 정도로 가볍지도 않았고 읽기에 널럴하지도 않았다. 만만하게 생각하고 고른 책이었는데 소파에 누워 읽다가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꿈을 꾼 것 같다. 깊은 어둠 속 터널로 떨어진 후, 수많은 별이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 그 터널이 앨리스가 빠진 “토끼굴”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블랙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참을 떨어진 후 도착한 그곳에서 바라본 풍경은 영화 <그랑블루> 속의 바닷가 풍경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푸른 색 바다 위 하늘에 촘촘히 박혀 있는 별들이었다.
평화로운 상황에서 공포로 빠진 것은 내가 위치해 있는 시선 위로 나의 키보다 수십 배 큰 물고기 한 마리가 잔잔한 바다 수면 위로 갑자기 튀어 오르고 난 후였다. 예측불허의 상황에서 내 눈 앞에서 튀어 오르는 뾰족한 부리를 가진 물고기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나는 내 모습을 숨길 수 없다는 생각에 공포에 떨었다. 그 와중에서 다행이도 수많은 별들이 움직이지 않고 빽빽히 하늘을 채우고 있어 위안을 삼았던 거 같다. 몇 번을 ‘어디로 나를 숨겨야 하나’ 하는 생각에 짓눌려 잠을 깨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일요일 오후 낮잠의 공포스럽고 우울한 꿈은 보상 받기 힘든 기분으로 몰아넣게 마련이다. 이런 날을 그냥 마무리해버리면 월요일까지 우울해진다. 기분을 풀어야 했다. 기분을 전환할 때는 사람이 즐겁게 모이는 곳에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 최고다. 핫초코 흡입으로 혈당을 높이며 밤 12시를 넘기기 전에 ‘느긋한 일요일 밤’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읽다 만 책을 들고 별다방으로 향했다. 별다방에서 책을 읽었고, 전화 통화를 하게 된 후배도 만났다.
“선배님, 나도 이 책 읽었는데 생각이 안 나는데요?!”“야 인마! 읽었는데 생각이 안 나면 읽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그런가요?! 내용이 뭐예요?”“블랙홀, 화이트홀, 그리고 웜홀 이야기야!?”“거짓말!”많은 사람들이 블랙홀의 존재에 대해 믿는다.블랙홀 실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말해주는 사람도 없다. 경험해본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그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다. 블랙홀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꺂원경을 통해 블랙홀이 보내는 신호를 확인하는데, 과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어 이제는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의 어려운 수식 속에도 확실히 존재하는 실체다.
우리가 만약 블랙홀에 떨어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블랙홀은 사후세계와 같다. 우리가 죽고 나면 무엇이 우리를 기다릴지 아무도 모른다. 블랙홀에 뛰어들면 다시는 되돌아 나올 수 없다. 죽음에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처럼. 반대편으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들어간 블랙홀이 화이트홀에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 화이트홀은 물질이 빨려 들어가는 블랙홀과 정반대로 물질이 튀어나오는 구멍이다. (화이트 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우주엔 블랙홀 이외에 웜홀이 존재한다.
1935년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동료 네이선 로젠과 함께 우주와 우주를 잇는 다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증명해냈다. 이 결과는 우주 시공간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로 “아인슈타인-로젠의 다리”로 알려졌다. 2개의 시공간이 서로 결합한 기하학적인 구조로 1955년 블랙홀의 대가인 존 휠러가 시공간을 연결하는 통로가 존재할 수 있다는 웜홀의 존재를 다시 한번 증명했다.
그 논문은 순전히 이론적인 이야기였지만 상상력이 좋은 사람들에게는 열린 두 시공간의 여행이 가능한 것처럼 생각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로, 만약에 가능하다면 그건 매우 작은 공간에서의 일이었다. 특히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마치 휘어진 시공간을 타고 여행이 가능한 것처럼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 당시 대표적인 이야기가 칼 세이건이 쓴 웜홀이라는 초공간을 통과해 외계문명과 접촉하는 내용을 담은
『콘택트』 라는 소설이다. 칼 세이건은 실제 천체물리학 박사로 코넬 대학교의 행성 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서로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웜홀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야기19세기 수학자들은 구부러진 공간과 높은 차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 연구발표 이전에 영국의 수학자 찰스 도지슨은 1865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라는 동화책을 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당시 그는 루이스 캐롤이란 필명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출간 했고 순식간에 전세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앨리스가 토끼를 쫓아 아인슈타인-로젠의 다리인 웜홀을 통해 다른 우주로 들어가는 장면을 연상하는 토끼 굴로 들어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현실세계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이상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지구 현실과 다른 기이한 우주 속의 이야기다. 지구의 일반적 사실인 중력의 법칙이라든지 동식물의 일반상식을 뛰어 넘는 그야말로 상상의 세계 속 이야기다. 앨리스가 토끼 굴을 빠져나와 다시 눈을 뜨면서 모든 게 따분한 현실로 되돌아온다. 마치 화이트홀을 통해 빠져 나온 것처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의 저자 루이스 캐럴은 1890년
『실비와 부르노』 를 발표한다. 이 동화 역시 당시 수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수학적 공간기하학에 대한 기초에서 출발한다. 우주 안에 있는 지름길의 존재에 대한 수학적 해답에 대한 상상력의 동화다. 한 요정의 나라에서 1000마일 떨어진 시골마을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할 수 있는 타임머신을 이용하여 시간적 이동이 지름길로 연결된다. 또 시간과 속도의 변화, 시간의 반전을 통한 과학적 판타지가 신기하고 허무맹랑한 캐릭터들과 만나 모험을 하는 파격적인 동화다.
그의 책은 출판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렸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화가 됐다. 그 기발한 상상력 때문에 환상문학의 효시가 된다. 하지만 생전 그는 자신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의 원작자라는 사실을 밝히기 거부했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아이를 키위본 적이 없는 독신. 그래서 더 어린아이의 마음에 접근하고 무한의 상상력을 제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본다. 사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상상력이고 뭐고 동화책 읽어주기도 바쁜 시간을 보낸다. 좌우지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를 우연히 읽고 토끼 굴과 블랙홀, 웜홀을 상상할 수 있었던 일요일 행복했다. 지금까지도 그 토끼 굴속에 있는 느낌이지만.
◎ 에필로그요즘 동화책 하나를 마무리하고 있다. 제목은 『박치기 깍까』 완결판이다. 예전에 그림을 그리고 쓴 동화책인데 이번에 전부 모아 완결편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동화책에서 주인공 깍까는 박치기의 힘을 이용해 공간이동을 한다. 지금 생각하면 이 방법은 로켓방법을 이용한 공간이동 방법이다. 앨리스가 선택한 토끼 굴 방법에 비해 역학적인 방법이고, 좀 구차한 방법이기도 하다. 만약 당시에 이 책을 먼저 읽고 동화책을 만들었다면 앨리스처럼 다른 공간이동 방법을 생각했을까? 못했을 것 같다. 김일의 박치기에 열광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게는 블랙홀이나 웜홀 이전에 박치기가 상상력의 최고의 정점이었기에. 이번에 내는 동화책이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처럼 출판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리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화가 되는 것보다(그것도 좋겠지만!) 한 사람에게라도 진정으로 사랑 받는 책이 되었으면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