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삭막하던 아파트가 벽화 하나로…

구산동에는 그림이 가득해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머리가 아파서 해결되는 일은 별로 없다. 팔이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파야 해결된다. 그래서 더 아파보려고 한다. 다행히 엉덩이 하나는 타고났다. 얼마든지 뭉개고 앉아서 그림, 그릴 수 있다.

 
내가 즐거우면 세상도 즐겁다
밥장 장석원 저 | 마음산책
여기 실제로 자신의 작은 재능으로 세상을 바꾸는 그림작가가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대기업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이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밥장, 그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은 물론, 타인, 세상과 소통하는 삶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재능기부란 무엇일까? 그는 어떻게 재능기부를 시작했고, 왜 재능기부를 하게 되었을까? 『내가 즐거우면 세상도 즐겁다』는 재능기부로 자신의 세상을 즐겁게 바꾼 밥장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우리 동네에는 그림 그리는 아저씨가 살아

난 은평구 구산동에 산다. 15층짜리 아파트 4층에 산다. 별로 높지 않은데도 북한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끔 부석사에서 소백산 자락을 내려다보는 기분도 든다. 날씨가 좋을 때 망원경으로 독바위를 올려다보면 불꽃같은 점퍼를 입은 등산객들이 바위 위에 빼곡히 붙어 있다. 가끔 멀리서 우다다다다 프로펠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소방 헬기가 뜨는 모양이다. 에이그, 오늘은 또 누가 실족했나”라며 혀를 끌끌 차신다.

아파트가 있는 언덕을 내려와 구산 사거리를 지나면 선진운수 버스 종점, 같은 번호가 붙은 버스들이 빈틈없이 주차되어 있다. 종점에 오면 왠지 지도에서 점선으로 경계를 나누듯 여기가 서울 끝자락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그 뒤로 신사동과 역촌동을 오가며 고등학교에 다녔다. 대학교에 다닐 무렵 어머니는 동네에 조그마한 갈빗집을 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밥 먹고 학교 가라며 상을 차려주었다. 반찬은 늘 양념 돼지갈비나 쇠고기 로스구이였다. 채소 없냐며 투덜거리면서도 밥 한 공기를 깨끗이 비웠다.

처음 이사 왔던 5층짜리 한남아파트는 2006년, 15층짜리 브라운스톤 구산아파트가 되었다. 그 뒤로 다시 구산동에 산다. 택시를 타면 가끔 운전기사도 갸우뚱하며 내비게이션 스크린을 만지작거린다. 그래서 어디 사느냐고 물어보면 연신내나 역촌동에 산다고 대충 얼버무린다. 역촌동과 갈현동, 경기도 고양시에 둘러싸여 있는 구산동은 1제곱킬로미터 크기의 땅에 약 3만 명이 산다. 동네 주민이 모두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으로 출동해도 절반밖에 채우지 못한다.


내가 즐거우면 친구들도 행복해지지

아파트에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많이 산다. 대부분 아파트 맞은편에 있는 구산초등학교에 다닌다. 서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낡은 학교, 시멘트벽이라도 이 정도면 썩지 않았을까 은근 걱정된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은 아파트 사이를 신나게 누빈다. 시끄럽게 소리 지르며 축구공을 차거나 보이지 않는 트랙을 따라 돌며 자전거를 탄다. 가끔 자기들끼리 알 수 없는 놀이를 하다 주먹이 오가기도 한다.

동네 아이들은 놀이터보다 101동 건물 아래 빈터에서 노는 걸 더 좋아한다. 여름에는 다리 아래처럼 그늘이 지고 바람이 잘 통하는 데다 비가 와도 빗물이 들이치지 않아 초미니 돔 구장처럼 든든하다. 어른들도 뻥 뚫린 공간 아래 계단에 앉아 더위를 식힌다. 놀이터도 아니고 주민들을 위해 따로 설계한 공간도 아니지만 늘 활기가 넘친다. 그렇다고 대단히 멋지거나 특별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저 101동 3호와 5호 라인 사이의 뻥 뚫린 공간일 뿐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커다란 캔버스로 보였다. 그래서 어머니를 꼬드겼다. 여기에다 내가 벽화를 그려보면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밥장의 어머니는 아파트 회장이다. 어머니가 경비실을 지날 때면 경비 아저씨들은 늘 진지하게 경례를 붙인다.

맛보기로 우리 집 앞 복도에다 그림을 그렸다. 회장님은 주민들이 모여 회의할 때마다 우리 집 벽화 이야기를 꺼냈고 회의를 마치면 집 앞까지 데려와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우리 아들이 아니라) ‘밥장’은 아무 벽에나 평화로운 농촌 풍경을 그려대는 작가는 결코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1년 뒤 아파트 벽을 모두 새로 칠했다. 찜해둔 벽은 그림 그리기 좋게 매끈하게 다듬었다. 벽화를 그리기로 한 날, 마치 따귀를 때리기라도 하듯 바람이 몹시 불었다. 사다리를 세우고 올라 다리를 벌려 균형을 잡았다. 윗몸을 벽에다 바짝 붙이고 페인트 마커로 그림을 그렸다.


핑크색 아프로 머리의 용 한 마리부터 그렸다. 캐치볼을 하던 아이들은 그림이 신기한 듯 사다리 밑으로 모여들었다. 계단에 걸터앉아 닌텐도를 하던 친구도 따라붙어 금세 열댓 명이 모였다. 한두 명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아이들’이 되어버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커다란 에너지 덩어리가 되어 블랙홀처럼 시간과 공간을 왜곡한다. 사다리 위에서 나는 ‘이벤트 호라이즌’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불쌍한 우주선이 되어버렸다.


얘들아, 이제는 밥장 아저씨라고 불러

지형이가 나는 돼지 옆에다 제 얼굴을 그려달라고 했다. 아이들 이야기는 늘 농담이면서 진담이다. 농담처럼 가볍게 받아넘겼다간 호되게 대가를 치른다. 그래서 주저 없이 그려주었다. 얼굴 밑에 이름까지 또박또박 적어주었다. 기다렸다는 듯 “저요! 저요!” 다른 아이들도 아우성쳤다. 그때부터 나는 녀석들이 뿜어내는 강한 중력장에 질질 끌려갔다. 처음 머릿속에 떠올렸던 그림은 이벤트 호라이즌 너머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진솔이, 하늘이, 동근이, 건우, 주영이, 주혁이, 바다, 진성이, 재혁이, 하준이, 윤우, 지형이, 현규, 루리, 아란이, 한샘이, 한솔이, 한별이, 현서, 나현이……. 아이들은 사다리 아래서 목이 휘어지도록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제 차례를 기다리며 길게 줄을 섰다. 어두워서 더 이상 그릴 수 없을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다음 날 아침 아크릴 물감을 챙겨 벽 앞에 섰다. 어떻게 알았는지 일찍부터 아이들이 몰려나와 사다리 밑에 줄을 섰다. 아이들은 재미있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절대 포기하지 않고 개껌을 문 비글처럼 집요하게 물어뜯는다. 1명씩 얼굴을 그려주다 보니 어느새 40명이 훌쩍 넘었다. 나중에는 그릴 데가 없어서 사다리 끝에 까치발로 서서 그렸다.

“누가 제일 잘생겼어?”
“저요! 저요! 저요!”

벽화를 다 그린 뒤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서로 제 얼굴이 최고라며 악을 썼다. 물어볼 걸 물어봤어야지. 한 어머니는 캐러멜 마키아토를 챙겨주었다. 주영이는 직접 종이컵에 따뜻한 커피를 타서 가져다주며 엄마한테도 타주지 않았다면서 생색을 냈다. 그림 그리는 내내 아이들은 사다리 밑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별걸 다 물어보았다.

“아저씨는 왜 여자들만 예쁘게 그솷줘요?”
“머리카락은 왜 다 검게 칠해요?”
“아저씨 집에 놀러가도 돼요?”
“무슨 만화 좋아해요?”
“그림 그리면 먹고사는 데 문제없어요?”
“아저씨 유명하잖아요. 근데 왜 전 몰랐을까요?”

얘들아, 이제부터는 밥장 아저씨라고 불러. 우리 동네에서 그림 제일 잘 그리는 아저씨지. 마주치면 인사 잘하자. 그리고 아저씨 나름대로 유명해. 못 믿겠으면 네이버 검색창에서 밥장을 쳐보려무나.


그림 밑에다 <구산동에는 그림이 가득해>라는 제목을 붙였다. 진짜 동네 골목마다 그림이 가득하다면 어떨까. 주차금지 푯말 대신 벤치가 놓이고 대문마다 꽃이 걸린다면 어떨지 상상해보았다.

가을에는 아파트 벽화 축제를 열어보고 싶다. 아파트 이웃들이 모여 벽에다 그림도 그리고, 서로 음식을 나눠먹으며 수다도 떨고 말이다. 그러면 아파트 빈터가 정원이 되고, 마당이 되고, 노천카페도 되겠지.

머리가 아파서 해결되는 일은 별로 없다. 팔이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파야 해결된다. 그래서 더 아파보려고 한다. 다행히 엉덩이 하나는 타고났다. 얼마든지 뭉개고 앉아서 그림, 그릴 수 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내가 즐거우면 세상도 즐겁다

<밥장 장석원> 저11,250원(10% + 5%)

재능기부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이 가진 재능을 활용해서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을 돕는 활동을 말한다. 흔히들 재능기부 하면 특출한 재능이 있어야만 기부할 수 있다 여기고 멀게만 느낀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리 대단한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니다. 여기 실제로 자신의 작은 재능으로 세상을 바꾸는 그..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산업의 흐름으로 반도체 읽기!

『현명한 반도체 투자』 우황제 저자의 신간. 반도체 산업 전문가이며 실전 투자가인 저자의 풍부한 산업 지식을 담아냈다.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반도체를 각 산업들의 흐름 속에서 읽어낸다. 성공적인 투자를 위한 산업별 분석과 기업의 투자 포인트로 기회를 만들어 보자.

가장 알맞은 시절에 전하는 행복 안부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사람, 작가 김신지의 에세이. 지금 이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작은 기쁨들, ‘제철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1년을 24절기에 맞추며 눈앞의 행복을 마주해보자. 그리고 행복의 순간을 하나씩 늘려보자. 제철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은 우리 곁에 머무를 것이다.

2024년 런던국제도서전 화제작

실존하는 편지 가게 ‘글월’을 배경으로 한 힐링 소설. 사기를 당한 언니 때문에 꿈을 포기한 주인공. 편지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모르는 이와 편지를 교환하는 펜팔 서비스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성장해나간다. 진실한 마음으로 쓴 편지가 주는 힘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소설.

나를 지키는 건 결국 나 자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물질적 부나 명예는 두 번째다. 첫째는 나 자신. 불확실한 세상에서 심리학은 나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무기다. 요즘 대세 심리학자 신고은이 돈, 일, 관계, 사랑에서 어려움을 겪는 현대인을 위해 따뜻한 책 한 권을 펴냈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