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조선소, 제85호 크레인
2011년 1월 6일. 칼바람이 휘몰아치던 영도조선소 노조 사무실 옆 생활관에서 밤샘농성을 벌이던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이 새벽 1시 50분쯤 혼자 몰래 빠져나왔다. 당시 한진중공업 노조는 사측의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함께 농성을 하던 그가 향한 곳은 영도조선소 제85호 크레인. 2003년 당시 전국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이던 김주익이 사측의 정리해고 반대를 외치며 129일 동안 농성을 벌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 그 현장에 이번에는 김주익의 오랜 동지 김진숙이 올랐다. 침낭과 전기장판, 생수 등을 넣은 배낭을 어깨에 둘러매고, 미리 준비한 도구로 1시간여 동안 크레인 계단에 설치된 자물쇠를 부수고 올라간 길이었다. 한겨울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김주익이 죽은 그 현장에 김주익과 똑같은 목적으로, 8년 만에 김진숙이 다시 올라간 것이다.
크레인에 오르고 나서 김진숙은 “회사가 지난해 2월 정리해고를 하지 않겠다고 노조와 합의하고서는 1년도 지나지 않아 400명을 정리해고하려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 농성에 들어갔다”며 “회사가 정리해고를 철회하지 않으면 스스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말했다.1)
김진숙이 크레인에 오른 이유는 2003년 김주익이 크레인에 올라갔을 때와 똑같았다. 또 2010년 김진숙이 회사 앞에서 24일간 단식농성을 하다 실신해 병원으로 옮겨진 이유와 똑같았다. 이렇게 반복에 반복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한진중공업 측에서 끊임없이 정리해고의 칼날을 휘두르며 약속을 번복했기 때문이었다. 번복이 반복을 불렀고, 그러한 반복은 한진중공업 민주노조 위원장 중 2명(박창수와 김주익)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한진중공업 사측은 2003년 김주익의 죽음으로 정리해고를 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번복했다. 2010년 김진숙의 단식농성 때에도 정리해고를 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1년 만에 번복했다. 그 번복이 결국 김진숙을 85호 크레인으로 향하게 한 것이었다.
김주익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죽었고, 죽은 뒤에야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아무도 없는 크레인 위에서 그는 누구의 응답도 받지 못한 채 세 아이를 두고 2003년 10월 1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진숙도 그와 비슷한 처지였다. 사람들의 관심선상에서 그는 비켜나 있었다. 김진숙은 크레인에 오른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2011년 2월 14일 <한겨레> 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지난달 6일 새벽 3시 15분. 85호 크레인 위로 오르던 저는 직각으로 이어지는 계단 하나를 탁 잡았습니다. 순간 날카로운 칼날이 심장을 쓱 베며 지나갔습니다. 세상을 향해 처절히 절규했으나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이 단절의 공간에서 세 아이의 아버지이자 노동자의 대표였던 김주익 지회장이 그 무거운 짐을 비로소 내려놓았던 그 자리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8년 만에 예감으로 확인한 자리였습니다. 저는 지금 주익 씨가 앉았던 자리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보고 간 세상의 풍경을 봅니다. 무심히 지나다니는 행인들과 분주히 오가는 차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스물여섯 살에 해고된 뒤 동료 곁에 돌아오겠다는 꿈 하나를 붙잡고 27년을 견뎌온 여성 노동자가 그 동료를 지키겠다며 다시 이 크레인에 매달려 세상을 향해 간절히 흔드는 손을 저들 중 몇 명이나 보고 있을까요. 2) |
김진숙, 희망이 되다
크레인에 올라 자신의 주장을 펼치던 초기에 김진숙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사측은 대화를 거부했고, 정치권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김진숙은 고립무원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곧 희망의 아이콘이 되었다. 소셜네트워크와 희망의 버스로 그는
“보이지 않던 존재에서 보이는 존재”가 되었다.
3)중앙대 강내희 교수는 2011년 7월 9일 제2차 희망 버스를 타고 영도에 다녀온 뒤
“참가자 대부분이 직업 운동가가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란 점은 서구의 캐러밴(Caravan) 시위에선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라며
“부단히 새로운 형식을 추구해온 한국의 사회운동이 희망의 버스를 계기로 새 국면에 접어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뭐라고 규정할 순 없지만, 거대한 변화를 향한 움직임이 막 시작된 느낌”이라고도 말했다.
4) 경희대 이택광 교수는
“‘노동자 역시 사람이며 시민’이라는 근대적 윤리가 소셜네트워크라는 기술적 민주주의를 통해 비로소 제도화되기 시작하는 징조를 이 사건을 통해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5)희망 버스에 어떤 의미 부여를 하든 또 SNS 덕분이든 그것이 새로운 사건임은 틀림없다. 직업운동가도 아니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희망 버스에 올라 영도조선소로 향한 것은 한국 사회운동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것은 연대였다. 자발적 연대였다. 소외받고 억압당한 사람들의 연대였고 희망이었다. 그 중심에 김진숙이 있다.
2차 희망 버스에 참여한 나연정 씨는 이런 말을 남겼다.
“김진숙 씨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만나는 오작교, 시민과 노동자가 만나는 오작교, 양심적 시민이 서로 만나는 오작교가 되었다.”6)3차 희망 버스에 참여한 박윤미 씨는
“아이들에게 다 같이 사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어서 온 가족이 함께 오게 됐다”고 말했다.
7) 이것이 연대의 힘이다.
2차 희망 버스에 타고 영도조선소를 방문한 이들에게 김진숙을 이렇게 말했다.
“희망의 버스는 모든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향한 새로운 희망이고 미래를 향한 힘찬 출발입니다.”8)그리고 3차 희망 버스를 보내며 쓴 연설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207일 전 이 크레인에 오를 땐 몹시 추웠습니다. 한겨울의 새벽 세 시 그 캄캄한 어둠 속에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삶에 대한 의지보단 죽음에 대한 결의가 더 비장했습니다. …… 207일 전 그 캄캄한 새벽 여길 오를 때 저는 혼자였습니다. 배낭을 몇 번이나 쌌다 풀기를 반복하면서 숱한 시간을 번민했습니다. 52년을 살았는데 처분해야 할 것도 정리해야 할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게 다행이면서도 서러웠습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렇게 전선에 섭니다. 매일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하루하루의 투쟁을 이어갑니다.
KTX 여승무원 동지들이 3년을 싸울 때도, 기륭전자 동지들이 6년을 싸우는 동안에도 애처롭긴 했으나 그 싸움이 우리들의 것이 되진 못했습니다. 쌍용차에서 15명이 죽어나가는 동안에도 안타깝긴 했으나 우리 모두의 전선이 되진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연대가 어떤 힘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았습니다. 나약하고 소심한 개인들이 모여 어떻게 기적을 만들어내는지를 놀랍게 확인했습니다. …… 그동안 우리가 왜 울어야 했는지, 왜 패배해야 했는지 그리고 왜 죽어야 했는지, 희망버스는 뼈저리게 가르쳐줬습니다. 그 처절한 절망의 대가로 이제야 비로소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9)김진숙의 말처럼 85호 크레인과 희망 버스는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지를 배웠다”는 말처럼 김진숙은 ‘오작교’가 되었고, 그를 중심으로 거대한 연대가 자생했다. 만약 그가 젊은 시절 부끄러워한 ‘노동자’ 신분을 계속 부끄러워했다면,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과 힘든 현실 때문에 ‘체념’했다면, 1986년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의 전신)의 어용노조 대의원이 되었을 때 현실과 타협했다면, 20여년 간 해고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노동현장에서 끊임없이 노동운동을 벌여오지 않았다면 이 연대는 결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김진숙은 희망 버스로 통칭되는 2011년 지금 현재 거대한 연대의 중심에 서 있다.
빈대 핏자국같이 말라붙은 청운의 꿈김진숙은 1960년 인천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집안은 가난했다. 그 가난 때문에 큰언니는 7살 때부터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해야 했고, 김진숙은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가출해서 부산으로 떠나야 했다. 그곳에서 ‘모진 노동자’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18살. 누가 그랬지요. 숫자만으로도 찬란한 축복 받은 나이라고. 그 나이에 공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반여동 대우실업, 가난한 농촌 출신인 저에겐 어마어마한 공장 건물과 100대가 넘는 통근 버스를 가진 회사라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자랑거리이기에 충분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일을 했지요.
선적이 바쁠 때는 일주일 동안 곱빼기 철야까지 해가며, 비록 점심시간에 기다랗게 줄을 서서 밥을 타는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서서 졸지라도, 철야를 못 하겠다거나 오늘은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은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이었습니다. 손가락에 물집이 가실 날이 없어도, 쪽가위질이 서툴러 옷감을 상하게 하고 그때마다 볼때기를 쥐어 박히고, 행동이 빠릿빠릿하지 못하다고 발길질에 이리 차이고 저리 차여 종아리에 시퍼런 멍이 가실 날이 없었어도 매월 7일 월급날을 기다리는 기쁨 하나로 버텼습니다.”10)하지만 그 기쁨은 그리 크지도 또 오래가지도 않았다. 김진숙은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등 오사리 잡탕들이 모여 있던 그 방에는 애초 그들이 고향을 떠날 때 싸 들었던 보따리보다 더 컸을 청운의 꿈이 ‘슬라브’ 벽에 얼룩진 빈대 핏자국처럼 흔적만 얼룩덜룩 남기고 있었”던 그곳에서 나와 해운대 아이스크림 장사, 신문배달, 우유배달 일을 하다가 빚만 지고, 가방공장에 들어갔다가 김해에서 부산으로 가는 122번 버스 안내양이 된다.
11) 가방 공장보다 수입이 좋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새벽 4시 15분, 김해에서 첫차로 나오면 충무동까지 하루 6번 왕복. 차고지에 돌아가 입금하고 속옷 구석구석까지 홀딱 벗고 항문까지 몸 검신당하고, 다시 나와 ‘빠께스’에 하이타이 풀어 수세미로 차 청소하고 숙소에 들어가면 일러야 새벽 1시 30분. 2시를 넘기가 예사였습니다. 그리고 또 4시 15분. 이틀에 1번씩 쉬게 해준다는 건 그림의 떡이었습니다.”12)버스 안내양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자 버스 회사가 있던 김해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기 싫던 그는 신문광고를 보고 대한조선공사 용접공이 된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소의 젋은 여성 용접공 1호가 된 것이었다. 1981년 7월 1일의 일이었다.
“용접공 돈(월급)이 셌어요. 신발 공장 월급이 한달 5만 원이 안 됐는데 조선소는 13만 원이었으니까요. 대한 진학의 꿈을 키울 때였어요. 21살에 인생막장이라는 조선소에 용접공으로 들어갔으니 희한하게 봤죠. 더러 죽은 남편을 대신해 일하는 아줌마 용접공은 있었어요. 한창 조선업이 부흥기여서 인력이 모자랄 때죠. 사방 1m도 안 되는 좁고 환기 안 되는 공간(탱크)에 구겨져 들어가 용접을 했어요. 철판에 깔리고 바다에 떨어지고, 거미줄처럼 엉킨 전깃줄에 감전되고, 사고로 죽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안전장치에 돈을 안 쓴 탓이죠. 장비 설치보다 사람 목숨 값을 더 싸게 여길 때였습니다.”13)장비 설치보다 사람 목숨 값을 더 싸게 여기는 그곳에서 그는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전태일과의 만남과, 노동운동의 시작이다.
지리산 계곡처럼 흐른 부끄러움의 눈물김진숙은 대학생이 되는 게 꿈이었다. 강화도 집을 나와서 부산으로 향할 때 가방 안에 참고서가 그득하게 들어 있던 것도 그 꿈 때문이었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가장 큰 이유도 학업을 제대로 잇지 못하게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노동자가 되고 나서도
“누더기 인생을 기워 빛나게 할 수 있는 실과 바늘은 학교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진학할 뜻을 세웠다. 몇 년을 벼르고 별러 방송통신고등학교 입학을 위해 재직증명서를 떼러 갔을 때 대한조선공사 근로과 대리는
“방통고 나온다고 니 인생에 꽃이 필 거 같나?”라는 한마디 말로 그의 소중한 꿈에 비수를 꽂았다. 담당 과장도 어렵게 찾아간 김진숙을 향해
“회사가 오데 자선사업하는 덴 줄 아나?”라는 말로 일언지하에 그의 꿈을 짓밟았다.
14)
하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김진숙은 1984년 ‘억새풀 야학’이라는 근로야학에 찾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받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 전태일 평전』(돌베개, 1983)이라는 책을 통해 ‘전태일’을 처음 접하게 된다.
“그 책을 끝내 들추지 말았어야 했을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난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 꺼이꺼이 지리산 계곡처럼 울었다. 가슴에 큰 산 하나가 들어앉아 그 산에서 돌덩이가 와르르 쏟아져 양심에 돌팔매질을 해대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살아온 삶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산 사람. 그러나 그 삶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끌어안고 뒹굴었던 사람. 난 뭘까. 그의 삶에 비한다면 내 삶은 뭘까. 똥구덩이 같은 현장에서 혼자 비단신을 신고 내내 똥을 탈탈 털고 있었던 넌 뭐냐. 시집을 끼고 다니며 니체도 모르는 아저씨들을 비웃으며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던 넌 누구냐. ‘노동자’라는 말에 멸시를 보내며 ‘회사원’이라는 자만의 웃음을 질질 흘리던 넌 도대체…….”15)부끄러워 흘리던 눈물은 곧 세상을 달리 볼 수 있게 한 새로운 눈을 안겨주었다.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자신이 멸시하던 이들도 노동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내가 곧 그들이라는 사실이 이제 더 이상 부끄럽지도 치욕스럽지도 않았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 내가 달라져야 그들이 달라진다는 생각. 그들이 딛고 선 땅이 변해야 내가 딛고 선 땅도 변한다는 생각. 눈물은 곧 다짐이 되었고 가슴 벅찬 환희가 되었다. 인간이 참 고귀한 존재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때 평화시장의 상황이 눈앞에 훤히 그려지며 나를 더 깊은 자책과 질퍽한 공감의 늪으로 빠뜨렸던 건 평화시장과 똑같은 자갈치에서의 경험이 더해져서였을 게다.”16)‘전태일’이라는 노동자가 그에게 가르쳐준 것은 노동자도 사람이라는 사실과, 희망이었다.
“어딜 가봐도 비슷한 조건이라는 사실을 나는 일찌감치 체념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였고 그때마다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갈 뿐이었다. 1번도 그런 조건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안 했다. 아니 나는 내 존재 자체가 벌레처럼 징그럽고 싫었다. 벌레가 뭘 할 수 있으며 벌레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전태일은 너는 벌레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고 인간이 당연히 품어야 하는 희망에 대해서 절규하고 있었다.
희망. 세상을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을 품은 인간이라는 존재.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진실이 기뻤고, 그 진실은 뭐든 할 수 있다는 용기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24년 뿌리 깊은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는 일부터 시작했고 그 일로 대공분실 3번, 부서 이동 2번, 해고, 출근 투쟁, 무지비하고 끝이 없던 폭행, 수배 5년, 2번의 감옥……. 지금까지 나를 버텨왔던 건 그때의 자책과 용기가 아니었나 싶다.”17)전태일을 알고 난 뒤 그의 삶은 바뀌었다. 그리고 대한조선공사 어용노조 대의원이 되면서 그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사는 것 같았던 세상1986년 대한조선공사 어용노조의 대의원 선거가 있었다. 그때 김진숙은 동료 아저씨들에게 대의원 선거에 나가보라는 권유을 받게 된다.
“니는 처자식 멕여 살릴 걱정도 없고, 찍혀봐야 우리보단 헹펜이 안 낫나. 니가 총대 한번 매봐라.”18) 하지만 그는 이런 권유를 귓등으로 들어 넘겼다. 노동법에 대해 많이 알고, 남 앞에서 말도 잘하는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날 한 사고를 보고 마음을 바꾼다.
“작업 중이던 갑판 위에서 동료 한 분이 수십 미터 바닥으로 떨어져 뇌가 수박처럼 쪼개져 즉사했습니다. 발도 얼고 손도 얼고 몸이 꽁꽁 얼어붙어 손발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만큼 추운 날이었습니다. …… 안전과에서 관리자들이 찾아오고 사고 보고서를 작성한다고 목격자들의 진술을 받더군요. 그런데 바람도 많이 불고 몹시 춥고, 그래서 바람막이 하나 없는 바다 위 갑판 작업은 무리였다는 얘기는 하나도 없고 그저 그들이 작성해온 문구는, 사고자가 옷을 너무 많이 껴입어, 행동이 둔해서 추락한 걸로 적혀 있고 거기에 지장만 찍으라더군요. ……
가족들이 시신을 회사 문 앞에 갖다놓고 울부짖어도 그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본인 부주의로 인한 실족사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 보상이라도 제대로 받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린애들 학교라도 마치게 하는 게 그분의 마지막 소원을 지켜드리는 일 같았습니다. …… 그렇게 해서 대의원에 출마했습니다.”19)우여곡절 끝에 대의원에 당선된 김진숙은 곧 어용노조의 실상을 제대로 알게 된다. 첫 대의원대회 때 회의도 제대로 하지 않고, 횟집에 모여 색시들과 쌍쌍이 춤판을 벌이고, 돌아오는 길에 차비나 하라고 봉투를 건네?는 어용노조의 실상을 말이다. 그 봉투 안에는 월 기본급(13만 6100원)과 맞먹는 10만 원이 들어 있었다.
김진숙은 곧 동료 박떿제, 이정식과 더불어 어용노조의 부패와 비리를 알려나갔다. 회사에서 그냥 두고 볼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2번의 부서 이동과 2번의 대공분실행을 거치고 난 뒤 1986년 7월 14일 그는 ‘상사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해고당했다. 그리고 이어진 남루하고 민망하고 촌스러운 출근투쟁.
“어용노조 간부 수십 명, 회사 관리자 수백 명, 경비 수십 명, 그걸로도 우리 세 사람의 막강한 힘을 감당할 수가 없어, 국가 기간산업을 불순분자의 준동으로부터 사수하기 위해 등장한 공권력, 그리고 줄지어 선 닭장차들. 많이 맞았다. 수천 대도 더 맞았고, 수백 번도 더 짓밟혔다. 매일 아침마다. 배나 허벅지처럼 표면적이 넓은 부위엔 발자국이 그대로 멍 자국으로 찍혀 있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그때는 욕 한마디 할 줄 몰라 ‘왜 퍄! 왜 자꾸만 퍄!’만 입술에 침버캐가 허옇게 말라붙도록 되풀이했던 진짜 촌스러운.”20)그 사이 김진숙과 박영제, 이정식은 대한조선공사 노동자들과 더불어 도시락 거부 투쟁을 벌였다.
“쥐들이 우글거리는 현장에서 새까만 꽁보리밥을 냄새 나는 공업용수에 말아서 후루룩 삼키는” 현실을 바꿔보고자 한 것이었다.
21) 대자보를 붙이고 노동자들의 동참을 요구하며 시작된 도시락 거부 투쟁은 사흘 동안 이어졌고, 사흘 만에 성공을 거뒀다. 사측에서 상여금 100% 지급과 연말까지 식당을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었다. 최초의 승리였다.
“하니까 되더라는 최초의 경험. 그리고 ‘거북선은 우리가 만들었다’는 통찰. 그 뒤 현장에선 관리자들의 말투가 시부저기 존댓말로 바뀌었고 ‘화이바’를 삐딱하게 쓰고 작업복 단추를 풀어도 더 이상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지적받지 않는. 자유였다. …… 참 사는 것 같았다.”22)연대만이 희망이다참 사는 것 같던 승리의 기쁨도 잠시, 김진숙은 1986년 7월부터 지금까지 해고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로 살아야 했다. 그 사이 대한조선공사를 1989년 한진중공업이 인수했다. 하지만 노동 현실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2002년부터 끊임없이 구조조정이라는 명목하에 정리해고를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진중공업이 대한조선공사를 인수할 당시 3200여 명이던 노동자 수는 2011년 7월 현재 670명으로 줄어들었다.
사측은 3년간 수주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고통분담 차원에서 정리해고를 했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영도조선소에 받을 수 있는 수주도 필리핀 수비크조선소로 돌린 정황이 드러나고, 2011년 2월 정리해고자 170명을 포함해 총 400여 명을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로 해고한 직후 주주들에게 174억 원을 배당하고, 임원들의 연봉을 2억 원에서 3억 원으로 인상한 사실이 드러나자 의도적으로 영도조선소 노동자를 해고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2011년 7월 한진중공업 노조에서 파업을 철회하기로 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 수주 계약 사실을 밝힌 것을 두고, 대규모 정리해고를 정당화하기 위해 수주계약 사실을 숨겨왔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참고로 한진중공업은 지난 10년간 4000억 원이 넘는 이익을 거뒀고, 2010년에는 그룹 전체적으로 2014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한진중공업 사측의 행태는 고통분담이 아니라 고통 ‘몰빵’이었다. 노동자에게만 몰아주는 ‘몰빵’ 말이다.
2003년 김주익이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고통 몰빵’을 막기 위해서였다. 노동자의 희생만을 요구하는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서였다. 김주익이 죽은 뒤 며칠 지나지 않아 한진중공업 노조원인 곽재규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를 계기로 김진숙과 함께 해고된 박영제와 이정식을 비롯한 해고노동자들이 복직되었지만 김진숙은, 그 이름도 어마어마한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반대한다는 이유로 복직이 되지 않았다.
이후 김진숙은 노동운동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어디든 연대해야 할 곳이면 찾아갔고, 그 중에서도 비정규직을 위한 노동운동에 끊임없이 앞장섰다. 2번의 감옥행도 그런 연대의 산실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 연대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세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전국에서 그를 보러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몰려오고 있다.
김진숙은 연대를 꿈꿔왔다. 자본의 연대에 맞설 수 있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포함한 모든노동자의 연대를 그는 꿈꿔왔다. 그는 2003년 10월 22일 김주익 열사 추모사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던 김주익이 죽는 방식이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국경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리는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그들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 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저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으므로 깨지는 겁니다. 만날 우리만 죽고 천 날 우리만 깨집니다. 아무리 통곡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는 고스란히 되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버이날 요구르트 병에 카네이션을 꽂아 놓고 아빠를 기다린 용찬이. 아빠 얼굴을 그려 보며 일자리 구해줄 테니 사랑하는 아빠 빨리 오라던 혜민이. 그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동지 여러분!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23)김주익의 아이들이 살아갈,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김진숙은 지금도 크레인에 올라가 있다. 그 사이 수많은 연대가 생겨났고, 정치권에서는 부랴부랴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청문회를 열기로 했다고 한다. 왜 꼭 노동자를 사지로 몰아야만, 또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만 움직이는지 한심스럽고 분노할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나마 움직이는 것도 연대의 힘 때문이니 연대, 해야만 할 일이다.
“내 걸 나눌 수 있을 때 진정한 연대는 가능하고 그래서 연대는 용기이다.”24)김진숙은 연대를 용기라고 말한다. 85호 크레인에 올라가는 용기, 18살 때부터 시작된 모진 노동자로서의 삶을 절대 후회하지 않고, 수많은 난관 앞에서도 절대 굴하지 않은 용기, 김주익이 죽은 후 한겨울에도 결코 난방을 틀지 않는다는 결기, 그리고 그 용기와 결기에 화답해 용기를 내어 김진숙과 연대하는 희망버스 사람들.
연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 연대만이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을 ‘절망의 크레인’에서 ‘희망의 크레인’으로 변신시키고, 김주익의 아이들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바탕이 될 것이다. 그래서 감히 이렇게 말한다. ‘연대만이 희망’이라고 말이다.
| 주 |1) 김광수, 「‘8년전 비극’ 크레인 올라 고공농성」, <한겨레>, 2011년 1월 7일, 21면
2) 김진숙, 「시론 : 85호 크레인 위에서 보냅니다」, <한겨레>, 2011년 2월 16일, 35면
3) 이세영, 「희망의 버스는 무엇을 싣고 달리나」, <한겨레21>, 2011년 7월 25일, 40면
4) 이세영, 같은 글
5) 이세영, 같은 글
6) 신윤동욱, 「‘크렌나무’ 그늘 아래서」, <한겨레21>, 2011년 7월 25일, 44면
7) 오마이뉴스 특별취재팀, 「김진숙 “매일 유서 쓰는 심정으로 버틴다”」, <오마이뉴스>, 2011년 7월 31일, 인터넷판
8) 신윤동욱, 같은 글
9) 오마이뉴스 특별취재팀, 같은 글
10) 김진숙,
『소금꽃나무』, 후마니타스, 2007, 253~254쪽
11) 김진숙, 같은 책, 36쪽
12) 김진숙, 같은 책, 255~256쪽
13) 김희연, 「24년간 복직투쟁 중인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씨」, <경향신문>, 2010년 4월 21일, 24면
14) 김진숙, 같은 책, 45쪽
15) 김진숙, 같은 책, 47쪽
16) 김진숙, 같은 책, 48쪽
17) 김진숙, 같은 책, 49쪽
18) 김진숙, 같은 책, 258~259쪽
19) 김진숙, 같은 책, 259~260쪽
20) 김진숙, 같은 책, 17쪽
21) 김진숙, 같은 책, 54쪽
22) 김진숙, 같은 책, 57쪽
23) 김진숙, 같은 책, 123쪽
24) 김진숙, 같은 책, 2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