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와 20대 젊은 세대에게 김수철을 아느냐고 물으면 상당수로부터
“이름은 들어봤지만 잘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하긴 싱싱한 여성 아이돌 그룹들의 비주얼과 춤의 재미에 흠뻑 젖어있는 어린 세대들한테 1980년대 전성기를 보낸 그의 이름이나 노래가 가깝게 다가올 리 없다. 하지만 가끔 오르지만 어쩌다가 그의 무대를 보게 된다면 소스라치는 전율과 감동을 느낄 것이다.
2009년 9월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개최된 <웹진 이즘의 8주년 콘서트>는 잊을 수 없다. 현란하면서도 집중하게 만드는 기타연주는 물론이요, 오랜 음악 이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능란한 보컬, 관객을 압도하는 흥에 넘치는 퍼포먼스 그리고 지금은 견주기 어려운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 「못다 핀 꽃 한 송이」와 같은 명곡들에 관객들은 연신 경탄의 갈채를 무대에 띄웠다.
얼마 후인 2009년 11월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열린 <한국대중음악축제-2009 올해의 슈퍼루키>를 본 사람들 사이에서도 축하 스페셜로 마련된 그의 무대는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한 관객은
“같이 출연한 다른 젊은 뮤지션들은 감히 할 수 없는, 관록의 급수나 천재적 역량이 아니면 풀어낼 수 없는 환상의 무대였다”며 찬사를 보냈다. 다른 관객은
“앞으로 그의 공연스케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면서 가능한 한 그의 공연을 다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가 남긴 명곡은 수두룩하다. 상기한 곡을 빼고도 송골매에게 써준 「모두 다 사랑하리」, 영화 <박하사탕>에 삽입되기도 한 「내일」을 비롯해 아이들이 좋아하는 「치키치키차카차카」와 「정신차려」와 같은 곡은 세월에 불구하고 사랑을 받는다. 2002년 월드컵 때 주목 받은 청춘의 송가 「젊은 그대」는 이제 국민가요급이다.
김수철은 ‘작은 거인’으로 통한다. 체구는 작으나 거목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1978년에 결성한 밴드명이 ‘작은 거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음악 출발점은 당대의 마니아들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일곱 색깔 무지개」가 말해주듯 강력하고도 변화무쌍한 록이지만 국악 풍의 애절한 「별리」가 말해주듯 애초부터 국악에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1984년, 음악 하는 것을 아버지가 반대하는 바람에 음악을 관두고 거의 마지막 기념음반 격으로 낸 앨범에서 「못다 핀 꽃 한 송이」와 「내일」이 초(超)대박을 치면서 그는 음악을 그만두려는 결심을 접어야 했다. 그해 연말의 KBS 최고가수상, MBC 10대가수상을 비롯해 언론이 주는 상만 16개를 받았을 만큼 당대 최강 조용필이나 나중의 서태지가 부럽지 않은 슈퍼스타덤에 올랐다. 게다가 이 무렵 안성기 이미숙과 함께 출연한 최인호원작의 영화 <고래사냥>은 그의 인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김수철의 진정한 면모는 여기서 시작된다. 남들 같으면 비슷한 패턴의 가요를 써서 인기의 연장을 꾀하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작은 거인’ 시절부터 가졌던 국악, 즉 우리 전통음악 쪽으로 모든 음악적 과녁을 정한다. 맘만 먹으면 언제든 히트가요를 써낼 수 있는 충분한 음악가가 돈 안 되고 잘해봤자 본전이라는 국악에 투신한 셈이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통렬한 자기 전복’으로 묘사한다. 그는
“그 당시, 음악에 우리 것을 보여줘야 한다, 양악을 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국악, 연주음악 그리고 영화음악으로 내달려갔다. 이 과정에서 그는 1987년 <대한민국 무용제의 국악앨범> 그리고 1989년 태평소 연주를 끌어들인
<황천길> 그리고 1993년 국악으로 채색된 영화음악 <서편제> 등의 지금도 대중음악사에 손꼽히는 명반을 내놓는다.
최초로 랩을 시도해 역사에 길이 남는 1989년의 영화 <칠수와 만수>나 <성(聖)리수일전>을 비롯한 영화음악 분야에서도 그는 선두의 길을 밟았다. 당대 가수들 중에 김수철처럼 본격적으로 영화음악 작곡에 에너지를 투하한 사람은 없었다. 고 유재하가 김수철이 녹음 중인 스튜디오까지 찾아갈 정도로 그에게 지대한 관심과 경배를 보인 이유는 바로 그러한 실험적 자세 때문이다.
이제는 오래 전 얘기가 됐지만 영화 <서편제>의 음악은 단지 영화를 본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로 출발했지만 영화의 폭발적인 흥행성공과 영화에서 들린 음악에 대한 관객의 폭발적 요구에 힘입어 70만장의 판매고를 수립하는 기염을 토했다. 전혀 성공을 기대하지 않던 레코드회사 측에 그는
“국악이 한번은 되니까 날 믿어 달라”고 주장했고 끝내 음반사 사장은
“자네가 이겼네!”하고 백기를 들었다.
그는 지금도 기다림과 인내를 뮤지션의 최고미덕으로 삼는다. 그렇지 않다면 미련하게 승산이 어려운 국악이나 행사음악에 매달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는 대중을 존경하지만 결코 대중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대중은 바람과도 같습니다. 바람은 잡을 수가 없지요. 모든 것을 만족시켜줄 수 없는 아티스트는 그래서 자신의 길을 고집스럽게 가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궁극적 지향은 자메이카의 전통음악인 레게를 세계화시킨 밥 말리(Bob Marley)처럼 우리의 전통음악, 우리 고유의 좋은 음악, 우리만의 건강한 음악을 써내서 서양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의 꿈대로 그는 현재도 음악작업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조금의 흔들림이 없다. 그가 언젠가 이런 문자를 보냈다.
“약속합시다. 임진모씨도 죽을 때까지 열심히 글을 써요. 나도 죽을 때까지 음악을 할 거니까요!”
글 임진모(jjinmoo@izm.co.kr)
제공: I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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