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에서는 인생이 아름다워진다 박종호 글,사진 | 김영사 예술의 절정을 꽃 피운 오스트리아 빈! 문화여행자 박종호가 전하는 위대한 예술과 인생의 아름다움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 건축가 오토 바그너,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 빈에서는 그들이 모두 살을 스치고, 말을 섞으며, 살고 사랑하고 창작하고 있었다. 예술가들의 치열한 정신과 열정으로 유럽 예술의 절정을 이루어낸 도시 빈! 그 아름다운 역사의 현장에서 문화여행자이며 정신과전문의인 박종호 가 위대한 예술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전한다!

  빈에 카페들은 실로 많고 또 다양하다. 그런데 그들이 자랑하는 역사나 개성을 떠나서 커피만 생각해보자. 누군가가 나에게 “빈에서 커피가 가장 맛있는 집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물론 내가 빈에 있는 모든 카페의 커피를 다 맛본 것도 아니고, 커피에 대한 취향도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르다. 하지만 그 집 커피 맛에 경의를 표할 만한 곳으로 나는 ‘하벨카’를 꼽고 싶다. 하벨카는 일반적으로도 커피가 가장 맛있는 집으로 통한다.

하벨카는 후미진 곳에 있다. 소문을 듣고 찾아가려고 해도 찾기가 쉽지 않다. 쉬운 방법은 슈테판 성당 앞의 광장에서 그라벤으로 들어가다가 왼편으로 두 번째 골목을 들여다보면 오른편에 하벨카가 보인다. 아니, 사실은 잘 안 보인다. 혹시 보인다 하더라도 들어가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낡은 입구에선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뭐 이런 데가 있어? 너무 허름한 거 아냐? 영업은 하고 있나? 이젠 더 이상 예전의 하벨카가 아니라 쇠락해버린 거 아닐까?’ 그럼에도 일단 용기를 내어보자. 문을 한번 빼꼼히 열어본다. 그러면 물론 사람들에 따라 반응은 다들 다르겠지만 여러 가지 놀라운 충격에 빠질 것이다. 왜냐고? 너무 더럽거나, 너무 어둡거나, 너무 시끄럽거나, 너무 사람이 많거나, 아니면 안개처럼 담배 연기가 자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춤거릴 수밖에 없다.


손님이 문에서 주춤거린다면 카페로서의 영업은 글러버린 거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카페는 입구부터 폐쇄적으로 보이고 왠지 거부하는 듯 보인다. 카페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사람이라면 열의 아홉 들어가지 않을 곳이다. 이곳은 관광객을 원치 않는다. 물론 원하는지 아닌지 알 길은 없지만, 관광객에게 친절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이곳은 관광의 도시 빈에서 빈 사람들이 자기들끼리만 모여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나는 촌스런 관광객임에도, 아시아인의 얼굴임에도, 눈총을 무릅쓰고 이곳에 들어간다. 이유는 바로 하벨카이기 때문이다. 빈 사람들이 빈 시내의 많은 카페들 중에서 가장 커피가 맛있는 곳이라고 말하는 그 하벨카다. 빈을 떠나 외국으로 간 빈 사람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그들의 카페 하벨카, 빈 사람들이 시내에 나오는 날은 이곳에 들러서 커피 한 잔부터 마시고 난 후라야 볼 일을 보기 시작한다는 그 하벨카다.

영미 쪽에서 출간된 권위 있는 여행 가이드북들을 펼쳐보면, 빈을 소개하는 사진에 거의 빠지지 않고 나와 있는 것이 바로 하벨카다. 그 사진에는 보통 노인이 한 명, 또는 두 명이 서 있다. 한 명은 주인이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웨이터다. 둘 다 한참 노인이지만, 나이 든 것이 자랑스러운 듯 그들은 거만하고 당당하다.

사람이 많으니 하벨카에는 보통 아침 일찍 가는 것이 좋다. 점심시간 이전까지가 가장 한가하다. 아침에 들어가면 마음 약한 나는 혹시 내가 불청객은 아닌지 먼저 확인한다. 그리고 명당인 창가에는 절대 앉지 않는다. 물론 4인석에도 앉지 않고 한두 명밖에 앉지 못할 불편한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는다. 그 다음 가방을 의자에 놓고 코트를 벗고 앉는다. 커피를 주문한다. 이 집에서는 멜랑주나 아인슈페너 같은 것은 시키는 않는 것이 좋다. 이 집의 최고 커피는 단연 브라우너다. 만일 크림이 아주 싫으면 “슈바르처”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일단 브라우너를 먹어보아야 한다. 왜? 여기는 하벨카니까.


우리는 어느 카페를 가든지, 자신이 알고 있거나 좋아하는 커피를 시킨다. 그것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통한다. 왜냐하면 어디나 똑같은 유명 브랜드의 커피집들이 있고, 그런 곳의 커피 맛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빈의 유명 커피하우스들은 그들만의 커피가 있다. ‘이미 간을 쳐 놓은 명품 커피’, 즉 그들의 레시피를 자랑한다. 이미 자신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배합으로 커피에 크림까지 섞어 놓은 것이다. 그것이 빈의 커피 문화다. 심지어는 설탕까지 넣는 곳들도 있다. 이런 배합은 이미 수십 년 이상 최고의 맛을 내는 것으로 검증되었으며, 그 비율로 카페의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그러니 당연히 그것을 맛보아야 하지 않을까? 특히 하벨카의 브라우너는 유명하다.

웨이터가 다가오면 “브라우너”라고 말하라. 그러면 웨이터가 물을 것이다. “그로서? 클라이네?” 큰 잔을 원하면 “그로서”, 작은 잔을 원하면 “클라이네”라고 답하라. 커피가 나오면 설탕을 취향대로 넣는다. 우리가 흔히 먹는 브라운 슈거나 각설탕, 심지어 말도 웃기는 커피 슈거 같은 것은 진짜 커피 집에는 없다. 커피 맛이 변하지 않도록 백 년 전부터 변함없이 지켜온 하얀 정백당을 넣는다. 정말 맛있다.

커피의 원두는 단 한 가지다. 모든 커피는 브라질 산으로, 늘 최고급 원두를 주인이 직접 고른다. 오직 그것만을 쓴다. 아마 이 집에서 ‘최고급’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오직 원두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하지 뭐”가 이 집의 신조다.

그리고 또 하나 유명한 것이 이 집에서 직접 만든다는 케이크다. 가운데 딸기가 들어 있는 좀 촌스러운 것이다. 나는 절대 먹지 않는다. 케이크를 좋아하지만 여기서는 먹지 않는다. 하벨카에서 나올 때까지 내 입 속에 하벨카의 커피 향이 그윽하게 남아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하벨카의 짙은 커피 맛이 내 입 안 어디선가 살살 돈다. 하벨카는 일단 들어오면서 놀라고, 그 다음 커피에 놀란다. 그러고 나면 그제야 카페 내부가 보이기 시작한다. 낡은 천장에 낡은 전등은 정말 언제 것이지 알 수도 없다. 허름한 벽에는 수십 년 된 포스터가 떼지도 않은 채 덕지덕지 붙어 있다. 그런데 그 위에 지금 열리는 전시 포스터가 또 붙어 있다. 벽에는 코코슈카의 그림이 하나 걸려 있는데, 나는 이 집의 위세에 눌려 그것이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정체불명의 그림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하벨카도 작가들이 와서 글을 쓰거나 토론을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첸트랄 다음 시대를 잇는 문학 카페가 지금은 없어진 헤렌호프였고, 그 다음이 하벨카였다. 《북회귀선》의 작가 헨리 밀러는 미국 태생이지만 유럽을 너무 좋아했고, 중년 이후 대부분의 작품을 유럽에서 썼다. 그런 그가 빈에서, 아니 유럽에서 가장 좋아했다는 카페가 하벨카다. 밀러는 그림도 그렸는데, 이 하벨카에서 빈 분리파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그렸다.

많은 작가와 화가들이 늘 구석진 자리에 모여 담배 연기와 커피 향 속에서 담론을 펼쳤던 예술의 현장이 이곳 하벨카다. 그들의 명작들을 탄생시킨 것이 이곳의 커피라는 게 하벨카의 자부심이다.

빈의 번화가가 아닌, 뒷골목의 작은 카페에서 나는 백 년 전의 화가들과 작가들을 만난다. 그들에게로 잠시 돌아갔다가, 최면에서 풀리듯 현실로 돌아온다. 진짜 빈을 느끼고 진짜 빈 커피를 마시려면 하벨카로 가라. 그곳에는 관광객들을 위해 짙은 분을 바르고 화사하게 가짜 미소를 짓는 빈이 아닌, 정말 촌색시 같으나 옷을 벗기면 훨씬 에로틱한 빈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