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영화와 소설을 각각 1편씩 봤다.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이하 혹성탈출)」과 『꽃의 나라』다.
「혹성탈출」은 유인원이 인간을 대신하여 지구를 지배하는 내용을 그린 SF영화다. 치매 예방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제약회사가 침팬지를 실험용으로 사용한다. 뇌세포 기능을 활성화해 치매를 방지하려 했던 백신은 침팬지의 지능을 비약적으로 높였다. 똑똑해진 침팬지는 인간이 친구가 아니라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저항하기 시작한다.
『꽃의 나라』는 섬과 바다를 주로 써 온 한창훈 작가가
『홍합』,
『섬』에 이어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이번 소설이 새로운 점은 ‘바다와 섬의 작가’ 한창훈이 바다가 아닌 공간을 작품의 배경으로 설정했다는 데 있다. 물론
『꽃의 나라』에서도 가끔 바다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 소설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주로 다룬다.
얼핏 보기에 두 작품은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혹성탈출」은 잘 만들어진 할리우드 SF영화고,
『꽃의 나라』는 실제 역사 사건을 배경으로 한 성장소설이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두 작품을 보는 내내 나를 사로잡은 질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이었다. 왜 그런고 하니, 「혹성탈출」에서는 백신 하나로 인간과 침팬지의 경계가 사라졌고
『꽃의 나라』에서는 호랑이와 같은 맹수보다 더 잔인한 인간성이 묘사되기 때문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생물 교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그런 것 말고 사람이 동물과 어떻게 다른지 진지하게 대답해봐. 예를 들면 아버지가 있다. (중략) 사람이 동물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서 내가 생낹 교사가 되었다고 봐도 그 답은 끝이 없다. 지금도 찾고 있는 중이다. (중략) 같은 종족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짓은 동물세계에선 없다.” (59-62쪽, 『꽃의 나라』)생물 교사의 질문은 백신 하나로 원숭이가 인간처럼 행동할 수 있는 영화의 내용과 겹쳐졌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사실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면 더는 생각할 것도 없겠지만 썩 만족스러운 답이 아니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자살한다는 사실이다대답은 ‘자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택한 답이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자살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벼랑으로 뛰어내리는 레밍이나 해변에 올라와 죽음을 맞는 고래를 동물이 자살할 수 있다는 증거로 내세우기도 했다.
이후에 레밍이나 고래의 죽음을 모두 자살로 보기가 확실하지 않다는 반박이 나왔다. 레밍은 천적에 의해 내몰리다 앞의 무리가 서지 못해 벼랑으로 떨어졌고, 고래 역시 질병의 유행이나 기상 이변 등으로 뭍에 올라온다고 한다. 동물이 말을 할 수 있어 자신의 죽음을 설명한다면 명쾌하게 해결될 문제이나 불가능하므로 동물이 자살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하게 나오지 않을 것 같다.
다만,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켐이 사회적 현상으로써 정의한 자살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칼 마르크스, 막스 베버와 함께 근대 사회학을 정립한 뒤르켐은 그의 저서
『자살론』에서 자살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로 취급했다. 자살은 개인적인 원인에서도, 사회적인 원인에서도 할 수 있지만 그가 다루려는 것은 후자였다.
물론 인생 만사가 그렇듯 이분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게 많고, 개인과 사회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뒤르켐의 작업은 시작부터 한계가 있다. 자살하는 이유로 공적 측면과 사적 측면을 딱 나누려 했지만, 실제 인생에서 공/사 구분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방대한 통계 자료를 근거로 내세우며 자살을 사회적 현상으로 인식하게 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명쾌하다. 사회적 실체로써 자살은 엄연히 존재하며, 인간은 공동체가 제시하는 가치를 상실했을 때 사회적 자살(아노미적 자살)을 감행한다. 여기서 뒤르켐이 강조하는 것은 ‘공동체’다.
뒤르켐의 학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성장 과정을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그는 유대 관계가 끈끈한 유대인 가정에서 자랐고 배교를 경험하며 공동체와 단절하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깨달았다. 뒤르켐이 종교와 사회를 공동체로써 정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자살을 ‘공동체’의 관점에서 정의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숟가락 하나 얹기도 힘든 시대, 표백 세대에게 남은 건 자살이다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표백』은 아노미적 자살을 그렸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대다. 넓게 잡으면 30대 초반까지다. 조선일보에서 글로벌(global) 마인드를 갖고 자란 세대란 뜻으로 G세대, 삼성경제연구소가 디지털(digital) 네이티브란 의미로 D세대라 칭하지만 정작 가장 익숙한 용어는 ‘88만 원 세대’다.
‘88만 원 세대’는 우석훈과 박권일이 함께 쓴
『88만 원 세대』에서 비롯한 말이다. 이 책은 고용 없는 성장으로 괜찮은 일자리는 갈수록 없어지지만, 최저임금 정도만 지급하는 임시직만 증가한다며 이러한 현상의 가장 큰 피해자는 20대라고 지적한다. 세대 간 갈등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청년 실업 문제는 앞으로 대한민국 미래를 좌우할 심각한 사안이다.
에르메스 대신 열정과 모험심으로 무장해도 부족할 청춘이다. 그런데 이 청춘이 도서관에서 공무원 수험서, 토익책, 시급 오천 원 알바와 씨름한다. 이런 의미에서 갈 곳 잃고 방황하는 청춘, 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이 시대 청춘은 자기가 할 바를 안다. 열심히 학점 관리하고, 어학연수 다녀오고 스펙 쌓기용 봉사활동을 해서 좋은 데 취직하면 된다. 그런데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표백』의 등장인물인 세연은 이렇게 쓴다.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 능통한 세대’라는 주장은 칭얼거림에 불과하다. 그게 무슨 소용인가? 과거 세대도 그들에게 주어진 무대에서 썩 잘했다. 게다가 과거 세대들은 민주주의라든가 자본주의 정착, 근대 체제로의 편입과 같은 중요한 역사적 과업도 이미 달성했다. 이제 남은 것은 양성 평등이나 환경문제와 같은 거대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소주제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30쪽, 『표백』)
세연의 허무는 이 지점에서 싹 튼다. 프랑스의 사상가 리오타르가 현대 사회를 포스트모던이라 규정하며 ‘거대 서사의 종말’을 지적했듯, 세연 역시 우리 세대가 인생을 걸 만한 거대서사가 없다고 판단한다. 제목이기도 한 ‘표백’은 가치를 잃어버린 지금의 젊은 세대를 뜻하는 말로, 완벽하게 하얀 세상에서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시대를 가리킨다. 세연의 말처럼 민주주의도, 자본주의 발전도 이미 앞선 세대가 이뤘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도 성공할 사람은 성공할 것이다. 다만, 그 성공이 사회를 바꾸지는 못하며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그녀는 단정 짓는다.
앞서 뒤르켐이 사회적 자살의 실체로 말한 아노미적 자살은 공동체가 제시했던 가치가 시공간 맥락이 변화하면서 없어질 때 발생한다고 했다. 아마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선진 사회도 전통에서 근대로 이행할 때 자살 문제가 심각했을 것이다. 뒤르켐이
『자살론』을 쓴 이유도 당시 자살 문제가 심각했음을 반증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뒤르켐이 살았던 19세기 말~20세기 초와 마찬가지로 자살이 심각한 문제다. 20대 자살을 소설의 주제로 다룬 작품이
『표백』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 증거다. 20대는 답이 없고, 그렇기에 자살한다는 이야기는 역시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권 리 작가의
『싸이코가 뜬다』에서 이미 다뤄졌던 주제다.
『표백』이
『싸이코가 뜬다』와 다른 지점은 자살을 공동체 차원에서 조망하려는 데 있다.
『싸이코가 뜬다』도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 사회가 20대에게 얼마나 부조리한지 말하지만,
『표백』은 자살이 주변인을 타고 퍼지는 장면을 그리면서 자살의 사회적 속성을 보다 효과적으로 묘사했다.
대기업에 입사가 확정된 대학 졸업생, 재벌 2세, 회계사 합격자, 미국 유수 대학에 입학한 유학생 등 외관상 성공한 이들을 모두 자살로 내모는 이 소설은 잔인하다. 하지만 웬만한 자살 사건은 사회면의 조그마한 지면도 차지 못하는 지금의 현실이 허구보다 더 잔인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넣고 다닙시다우석훈은
『디버블링』에서 지금 한국사회가 종족 재생산이라는 생명체의 본능마저 포기할 만큼 힘든 사회라 했고, 김태형은
『불안 증폭 사회』에서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키워드로 ‘불안’을 꼽았다. 통계 수치로 봐도, 한국이 OECD 국가에서 자살률 1위를 다툰다고 하는 등 상황은 심각하다.
『표백』의 세연이 자살한 과정을 떠올리면 씁쓸할 따름이다. 취업이 안 되어 자살했다면 사람들이 인정 안 할 테니, 나름의 성취를 이룬 뒤 자살을 감행한다. 그 나름의 성취가 바로 삼성전자 입사다. 20대가 이룰 수 있는 성취가 고작 대기업 입사라면, 이 사회가 팍팍하긴 팍팍한 모양이다.
현재 한국 사회는 살기 힘든가? 그렇다. 그렇다면 작금의 한국 사회가 다른 시공간에 존재했던 혹은 존재할 사회보다 살기 힘든가? 이에 대한 답은 모르겠다. 그래도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2,500년 전에도 고타마 싯다르타는 삶이란 고통이라고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게 어디 쉽겠는가. 더구나 자살할 수 있을 만큼 자의식 강한 생명체가 살기란 아메바의 분신술과는 차원이 다를 터. 인간이 느끼는 고통은 다른 동물의 감정보다 더 복잡하고 심오하다.
그럼에도 삶이란 어차피 힘든 것이라 여기고 타오르는 정열을 무기로 청춘을 불태우자. 답은 어쩌면 『표백』에서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세연의 친구 중에서 자살하지 않은 사람이 여러 명 있다. 그 중 한 명에게는 함께 이불을 덮고, 같은 화장실을 쓰며 사람이 있었다. 이른바 가족이란 존재. 애인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공동체다. 공동체가 뒤르켐이 의미했던 민족국가일 필요는 없다. 공동체는 그 존재만으로도 살아갈 의미를 준다면 충분하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넣고 다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