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를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오늘, 강연에서 한 유명 교수가 말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고
나는 온몸이 후들거렸다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내 몸 안이었으니까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교회와 시인들 속에 진정한 꿈과 노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는 것은
교회가 많고, 시인이 많은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문정희, 「러브호텔」 중에서
1.
지리산(智異山)의 일몰은 장엄할 뿐만 아니라 서글프다. 철쭉만 더 붉은 것이 아니라 지리산에서 지는 해는 다른 곳보다 더 붉게 보인다. 그것은 지리산이 인간의 애절한 죽음을 피눈물로 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지리산은 예나 지금이나 삶의 터전에서 내몰렸을 때 우리가 마지막으로 몸을 위탁할 수 있는 곳이다. 불행히도 지리산마저 품어주지 못한다면, 1950년대의 경우처럼 사람들은 철쭉이나 지는 해보다 더 선연한 피를 뿜으며 쓰러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냉정해졌다고 해도 지리산은 어머니와 같은 산이다. 그들의 김이 나는 더운 피를 지리산은 모른 척하지 않는다. 마치 죽은 아기를 껴안는 어머니처럼 눈물을 흘리며 받아준다. 홀로 버려졌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짐을 꾸려 지리산으로 가라. 아마 생각하지 못한 너른 어머니의 품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젊은 시절, 무슨 외로움과 한이 그리도 많았는지 지리산에 자주 발을 디디곤 했다. 80리터에 가까운 배낭은 어디서나 잘 수 있도록 온갖 짐들로 가득했다. 내가 선택한 길은 흔히 대원사 길이라고 알려진 코스였다. 넓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깊은 지리산은 많은 사찰들을 품고 있다. 그 중 대원사(大源寺)는 비구니 스님들만이 모여서 부처가 되려는 수행에 몰두하는 사찰로서, 경상남도 산청군에 속해 있다.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天王峰)으로 바로 올라가려면 대원사를 거치는 길 아니면 중산리를 거치는 길을 이용해야 한다. 중산리가 성질 급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이라면, 대원사 길은 아무래도 무엇인가 여유가 있는 사람이 천왕봉에 오를 때 선택하는 길이다. 대원사를 지나서 다섯 시간 정도 오르자 해가 어느덧 뉘엿뉘엿 지려고 하였다.
텐트 칠 곳을 찾던 나는 붉은 빛을 뿜으며 막 지려고 하는 해를 바라보며 바위 위에 고즈넉이 앉아 있는 스님을 한 분 발견했다. 화려한 일몰의 장관 때문인지, 스님이 비구니 스님이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조금 지난 다음이었다. 무척 젊고 아름다운 스님이었다. 지는 해의 붉은 빛에 젖어들었는지, 스님의 얼굴에 비친 홍조는 더욱 붉었다. 호기심 때문인지 간만에 만난 인간이 반가워서인지, 나는 그녀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스님이 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유명 여대 국문과 81학번이었던 스님은 무척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다며 미소를 띠운다. 불행히도 두 사람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남자가 그녀를 배신한 것이다. 앞으로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그녀로서는 애인의 배신은 견딜 수 없는 절망으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자살도 꿈꾸었지만 모진 것이 사람의 목숨이라 뜻대로 되지 않고, 마침내 찾아온 것이 지리산이었다. 한때 애인과 같이 올랐던 지리산, 지리산에서 보았던 일망무제의 산군들, 그리고 슬프도록 아름다웠던 일몰 광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그녀는 아름다웠던 기억을 마지막으로 회상하며 여기서 삶을 마무리하려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대원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그 남자를 생각하고 있나요?” 약간은 장난스럽게 묻자, 그녀는 웃으며 말한다. “지금은 부처님이 내 님이에요. 이제는 모든 것이 편안해졌어요. 그렇지만 가끔은 그도 생각나고 내 삶도 애처로워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이렇게 이곳에 올라와 지는 노을을 바라보곤 하지요.” 스님은 잘 자라는 말과 함께 표연히 절로 내려갔지만, 나는 텐트 칠 생각도 잊고 스님이 앉았던 바위에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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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무슨 외로움과 한이 그리도 많았는지 지리산에 자주 발을 디디곤 했다. | |
2.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초월종교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 사랑을 약속하는 초월자가 상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초월자의 사랑은 ‘자비’라고 불리든 ‘사랑’이라고 불리든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 사랑, 심지어 인간들이 배신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사랑을 철회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사랑에 배신당하고 인간에게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이 사찰이나 교회에 찾아가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놈은 혹은 그년은 나를 버렸지만, 신은 나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변덕스럽기 그지없지만, 종교에서 약속하는 신은 바위와 같인 굳건하기만 하다. 신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 인간이 아무리 변덕을 부려도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니까 말이다.
과연 신과 사랑에 빠진 사람은 행복한가? 무엇인가 빠진 것이 있지 않은가? 대원사의 어느 스님이 노을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앉아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신은 내가 배신한다고 하더라도 나를 여전히 사랑하신다. 그렇지만 이런 절대타자와의 사랑은 인간이 꿈꾸는 사랑과 행복의 절정에서 조금은 비켜서 있는 것 아닌가? 신과 나누는 사랑은 절대적이고 안전하지만, 너무나 정적이고 심지어 회색빛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구님의 스님의 옷이나 수녀의 옷 색깔처럼 말이다. 이것은 사랑과 관련해서 신에게는 일체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신은 사랑에서만큼은 자유가 없다. 그는 무조건적으로 인간을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과는 달리 인간은 누군가를 배신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인간이 변덕스럽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동시에 인간에게 자유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아닌가? 사랑을 배신당한 사람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그를 떠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었던 셈이다. 만약 그에게 자유가 없었다면, 어떻게 그가 배신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배신당해 홀로 버려진 사람에게 애인의 자유는 변덕이라고 저주받을 일이지만, 배신한 사람이 새롭게 선택한 사람의 입장에서 인간의 자유처럼 소망스러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배신당한 사람은 절벽에서 밀쳐진 것처럼 괴롭기만 하고, 새롭게 선택한 사람은 절벽에서 구원된 것처럼 행복하기만 하다. 그렇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인간이 신보다 탁월한 데가 최소한 하나는 있었던 셈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변덕, 혹은 사랑의 자유다. 신이 고개를 갸우뚱거릴 일이지만 말이다.
신으로부터 받는 사랑보다 인간으로부터 받는 사랑이 우리에게 더 큰 희열과 행복을 주는 법이다. 그것은 상대방이 배신의 가능성, 즉 자유의 가능성을 억누르고 나를 사랑해주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었지만, 나를 사랑한 것이다. 같은 인간을 사랑할 때 우리가 항상 일말의 불안감을 갖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나를 사랑한 것이 그 사람의 자유인 것처럼 나를 떠나는 것도 그 사람의 자유라는 사실은 직감하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감 때문일까? 인간은 사랑에 대해 이중 잣대를 유지하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나를 사랑했던 그 사람의 자유는 긍정하지만,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유는 부정한다. 사랑과 자유의 이율배반이라고나 해야 할까? 나를 배신하는 자유를 부정하는 순간, 우리는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람의 자유마저도 부정해야 한다. 역으로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람의 자유를 긍정하는 순간, 우리는 나를 배신하는 그 사람의 자유마저 긍정해야만 한다.
3.
오래된 연인이 한 쌍 있다. 연애한 지 오래되었지만 결혼하기도 힘든 상황에 빠져 있다. 생활이 힘들어서인지 요새 여자는 어느 사이엔가 남자에게 별로 집중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함께 있을 때도 여자는 자꾸 딴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것이 영 꺼림칙한지 남자는 불안하기만 하다. 지금 여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던 그녀가 이제는 변한 것이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사랑해주던 그녀의 자유가 이제는 못마땅하기만 하다. 이럴 때 남자는 여자에게 오늘밤 들어가지 말자고 유혹한다. 물론 이것은 오늘밤 자신을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남자의 마음이다. 다행스럽게 그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일단은 안심이다.
처음에는 들어가는 것조차 부끄럽게 느껴졌던 러브호텔도 이제는 집처럼 편안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여자는 여전히 무엇인가 다른 일에 마음이 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자 남자는 정성스레 여자를 안고 애무하려고 한다. 지금 남자는 자신의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자를 만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금 잡을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을 잡아두려고 절망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최소한 자신의 손길에 반응한다면, 그것으로 그녀의 마음을 그녀 자신의 몸에 잡아두는 데 성공한 셈이니까 말이다.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도 말했던 적이 있지 않은가. 애무는
“타자의 육체를 순수한 살(flesh)로 존재하도록 만들려는 시도”라고 말이다. 육체에 마음이 가 있을 때, 육체는 살로 변하는 법이다. 그녀의 육체가 살로 태어날 때, 그는 잠시 동안 한시름 놓게 된다. 더 이상 그녀는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얼마나 절망적인 노력인가. 사랑을 나눈 뒤, 그녀는 또 다시 상념에 깊게 젖어드니 말이다.
문정희(文貞姬, 1947년 출생) 시인의 시선집
『지금 장미를 따라』에는 「러브호텔」이란 시가 실려 있다. 내 몸 안에는 러브호텔들, 교회들, 그리고 시인들이 많이 있다는 내용의 시다. 그렇지만 시인은 서글프기만 하다.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는 것은 교회가 많고, 시인이 많은 것은 참 쓸쓸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쓸쓸함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그것은 그녀의 말대로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고, 교회에는 진정한 꿈이 없고, 시에는 진정한 노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쓸쓸함의 핵심은 뭐니뭐니해도 ‘진정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녀가 시를 마무리하면서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고 노래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나의 요구만 받아들이고 요구할 줄 모르는 신과 나누는 사랑은 서글픈 것이고, 붙이지 못하는 연애편지와 같은 시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교회를 다니면서 혹은 시를 쓰면서 시인은 자신의 자유를 위로할 수 있었지만, 결국 외롭고 고독하기만 했던 것 아닌가?
그렇지만 러브호텔에서 시인은 나뿐만 아니라 타인의 자유도 예감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오지 않은 사랑을 갈구할” 수 있었던 탓이다. 오지 않은 사랑을 갈구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랑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랑은 자유와 함께 오고 갈 때 그 빛을 발하는 법이다. 더 이상 자유가 없는 사람과의 사랑이나 시를 통한 자기 사랑은 우리에게 안식과 평화를 가져다줄지언정 사랑의 정열과 희열은 가져다주지 않는다. 나와 타자의 자유, 그래서 배신의 가능성마저도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은 우리에게 지상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행복과 희열을 가져다준다. 누군가 이별을 고할 때, 그 이별마저 사랑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타인의 자유도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별이든 배신이든 자유가 없다면 사랑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제 곁에 있어주셔서, 너무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