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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의 제대로 미안해 하기] 건전한 사회란, 거짓말을 두려워하는 곳

문광훈 교수 인터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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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한 사회란, 간단하게 말하자면, 거짓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거짓말을 해도 무신경하게 받아들입니다. 혹은 실체보다는 ‘그럴듯함’이 우선시된다고나 할까요?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문광훈 교수와는 비 내리는 토요일에 만났다. 나는 그와 인터뷰하면서 송구스럽게도 잠시 딴 생각을 했다(맹세코 섬광처럼 짧았다). 문광훈 교수를 열심히 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문광훈 교수의 머리가 루소와 볼테르로 나뉘어 보였던 것이다. 루소와 볼테르는 카페에서 칼(펜처럼 보이지만 칼이 분명한)을 들고 싸우고 있었다. 둘은 서로 “나는 당신을 증오해”라고 외치고 있었다. 볼테르는 타인 지향적이었고 루소는 내면 지향적이었다. 볼테르는 개인주의를 믿었고 루소는 개인이 공동체의 일부라 믿었다. 볼테르는 진보를 옹호했고 루소는 단순한 삶을 선택했다. 볼테르는 무신론자였지만 루소는 신의 섭리를 굳게 믿었다. 루소는 겉으로는 윤리적이지만 속으로는 냉소적인 사람을 미워했다. 루소는 고통과 절망이 가득한 세계라도 이 세계가 최선이란 것을 믿으려 했고 모든 것이 좋진 않아도 전체적으로 보면 좋다고 말했다.

볼테르는 『깡디드 낙관주의자』에 나오는 무지한 철학자를 내세워 루소의 이런 생각을 마음껏 비웃어 줬다. 대체로 모든 것이 매우 나쁘다가 볼테르의 생각이었기 때문에 볼테르는 모든 종류의 불의와 맞서 싸우는 것을, 단 한 사람이라도 구해내는 것을 자신의 영예로 알았다. 결국 루소와 볼테르의 다양한 변종 전쟁을 우리도 이리저리 나뉘어 치르고 있는가? 난 문광훈 교수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런 생각을 하고 만 것이다. 생각이 내 맘의 내부와 외부로 출렁 출렁 왕복 운동을 했다. 내면 지향적이면서 사회적일 수는 없는 것일까? 단순하고 내밀한 삶의 기쁨을 누리면서 동시에 사회를 향한 귀를 닫아버리지 않는 방법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녀가 맘껏 행복한 동안에 사회는 맘껏 비참했단 말을 어느 날 듣고 만다면 그 삶은 고립, 환영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런데 내친김에 한 가지 더 고백할 것이 있다. 문광훈 교수랑 인터뷰하다가 두 번째로 딴 생각을 하고 만 것이다. 이번엔 몽테뉴 생각이 났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지속적으로 나 자신을 관찰하며, 나 자신을 평가하고, 나 자신을 음미한다. 다른 이들은 항상 어딘가로 간다. 그들이 멈추어 서서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항상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내 속에서 데굴데굴 구른다.”

몽테뉴가 자신을 관찰하고 점검할 때 경계했던 것은 자기기만이었다. 자기기만적 인간은 아무리 미안해라고 말하고 아무리 반성한다고 해도 자기 합리화에만 관심 있는 거짓말쟁이에 불과할 것이다. 말년의 푸코는 우리는 몽테뉴를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몽테뉴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자기 윤리와 자기 미학을 복원하기 위해서이다. 바로 그것이 푸코가 말한 자기 배려였다. 자기를 어여삐 여기거나 안쓰럽게 여기는 것이 자기 배려가 아니라 자기 윤리와 자기 미학을 복원하는 것이 자기배려란 말인데 나는 문광훈 교수의 『렘브란트의 웃음』을 읽다가 푸코의 자기 배려를 알게 되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다시 느꼈다. 각자 있는 힘껏 자신을 돌보고 고유한 인간성을 실현하려할 때에만 우리는 확장되고 이렇게 확장된 마음을 삶의 중심축으로 삼을 때 그 삶이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 특별한 노력의 한 방법에 예술이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 배경 화면에 고흐나 모네의 그림을 깔아놓은 것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샤갈전에 몰려드는 것도 보았다. 좁은 벽에 이중섭의 사진을 걸어놓은 사람도 봤고 노트에 시를 옮겨 적어 놓은 사람도 봤고 지하철에서 북카페에서 공원에서 도처에서 책을 읽는 사람도 보았고 버스를 기다리며 카페에서 음악을 듣는 사람들도 보았다. 우리는 왜 읽고 쓰고 듣는가? 이 또한 자기 배려와 관련이 있는가? 그리고 자기를 돌볼 수 있는, 자기 기만적이지 않은 진정한 반성이란 무엇인가? 반성을 통해 냉소적이거나 무기력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나는 문광훈 교수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졌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던질 때 내가 믿고 있는 이런 말을 생각했다 ‘셰익스피어를 잘 알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그를 읽으면 자기 자신을 키우려고 한다.’

그 대답의 와중에 많은 중요한 생각할 거리들이 또 등장했다. 우리 사회는 왜 그렇게 명령조나 당위적인 말이 넘쳐나는가? 우리 사회의 어떤 사람들은 왜 비슷하게 옷을 입고 비슷한 몸짓으로 가득 차 있는가? 예술 작품을 왜 단순한 취향의 대상이나 감상의 대상으로만 삼아서는 안되는가? 진정한 교양이란 무엇인가? 예술에 기대어 제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읽고 듣고 보려는 우리 마음의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는가?

정혜윤 PD가 묻고 문광훈 교수가 답하다

문광훈 교수
저는 1992년부터 99년까지 7년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공부했습니다. 전공은 독일 현대소설이고, 학위논문은 페터 바이스(Peter Weiss)라는 작가의 『저항의 미학』이라는 작품에 대해 썼습니다.

프랑크푸르트는 금융 도시고 차가운 도시고 모던한 도시지만, 스카이라인이 참 아름답습니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아름답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자기가 사는 도시의 경계를 가늠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도시 세부 목록을 보고 거기에 충실하되 또 동시에 그 세부 목록들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느냐 여부는 무척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 서울은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아름답다고 말하기 어렵지요? 아파트가 곳곳에 있고, 좋은 산은 몇 개 있지만 금방 다가가기엔 좀 멀지요. 그냥 일을 하다가, 혹은 점심을 먹고 잠시 거리와 골목을 거닐면서 문득 고개를 들어 우리 사는 도시의 전체를 볼 수는 없지요. 그렇게 하려면 마음을 먹고 도봉산이나 관악산에 오르거나, 어디 텅 빈 공간으로 가야 하지요. 그럴 수 있는 시간과 기회도 드물고요. 말하자면 자기 사는 도시와 공간의 테두리를 우리는 대체로 잊고 살지요. 자기가 사는 곳의 테두리 혹은 한계를 확인하기 어려울 때, 각자가 하는 일의 의미를 겸허하게 자각할 수 있을까요? 도시적 삶의 가장 큰 손실은 아마도 이것 아닌가 싶어요.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잊고 사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오늘 같은 날 제 하루 일과를 보면, 오전 오후에 정 피디를 만나고 집에 돌아가서 밥을 먹고, 가족하고 얘기하고,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다가, 오늘이 토요일이니까, ebs에서 주말영화를 볼 지도 모르지요. 이런 날에는 ‘내 시간을 내 나름대로 꾸려나간다’는 실감이 있지요. 하지만 그런 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날도 많습니다. 도시의 경계 그 너머를 본다는 말은, 마치 하루 일과의 윤곽을 그리는 것처럼, 자기 하는 일의 실감을 갖는데 도움을 줍니다. 실감 있는 일은 실감 있는 삶, 실감 있는 자아를 갖는 것과도 연결되지요.

자기 정체성을 하나의 구조물이라고 생각할 때, 그 구조물은 오랜 노력을 통해, 마치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 올리듯이, 만들어 가는 일이겠죠. 그렇게 조금씩 건물을 만들어갈 때, 세부에 충실하면서도 그 옆의 건물, 그리고 이 옆 건물에서 사는 이웃사람들, 그리고 이 마을과 이 마을이 속해있는 이 세상의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알 수 있겠지요. 세부와 그 테두리를 보는 것이 조망능력이죠. 내가 출근하면서 내가 일하는 곳을 한번 돌아보고, 이 직장/작업장을 품고 있는 도시를 가늠해 보는 것, 그래서 ‘아, 내가 오늘 하루 일한 곳이 바로 이런 곳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은 자기 일에서의, 또 삶에의 매우 중요한 실감입니다. 이 도시를 움직이는 수많은 노동 가운데 내 일은 어디에 있는가? 내 땀은 어디에 쓰이는가? 사람들이 흘리는 그 땀은 정당한 대가와 대우를 받고 있는가? 더 나아가 인간의 노고는 그 노고에 상응하는 어떤 의미를 각자의 삶에서 실현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 삶이 결국 ‘살만 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가? 이런 런 질문은 이런 조망능력 속에서 행할 수 있는 것들이겠지요.

사실 언어는 실감에서 벗어난 것 -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이죠. 그렇지만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게 됩니다. 마치 경험을 통해, 또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듯이 말이지요. 그러나 이 언어는 사실 경험이나 체험이나 지각처럼 그리 생생한 것이 아니지요. 언어는 근본적으로 물기 없는 건조한 것입니다. 누군가 사랑에 빠져있다고 칩시다. 그럴 때 ‘사랑’이란 단어가 사랑에 빠진 사람의 불안과 초조, 당혹과 두근거림 같은 온갖 감정들을 다 담아낼 수 있나요? 그렇지 않지요. 사람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모호하고 성기고 취약하고 공허한 것이지요. 글 쓰는 사람은 이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이렇게 언어의 추상적 모호함을 얘기하는 것은 오늘 제가 얘기하는 내용이 삶의 아주 작은 일부라는 것을 상기하기 위해서입니다. 행동이나 실천의 문제는 그 다음이구요, 각자의 삶의 내용은 그 다음 다음에 오는 문제겠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대상을 더 정확하고 더 면밀하게 이해하지요. 논리나 이성, 추론이나 논증은 언어의 서열화/체계화에 다름 아니지요. 그렇기는 하나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언어로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광대합니다. 이것은 자명하지요. 저는 ‘지식인’이란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어떻든 공부하는 이들은 언어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오히려 학문은 인간의 무교양을 촉진시키기도 하지요. 그것은 코스튬 플레이(costume play)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럴 듯한 제스처. 그럴 듯해 보이는 수사의 작용이 지식인의 언어일 수 있고, 더욱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언어일반의 성격일 수도 있지요. 한국사회도 그렇지 않나요? 우리 사회도 여러 가지 부분에서, 예를 들어 개인의 자기선전이나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혹은 사회적 명분에 의해 과장된 것이 많은 사회지요.



건전한 사회란, 거짓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회

건전한 사회란, 간단하게 말하자면, 거짓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거짓말을 해도 무신경하게 받아들입니다. 혹은 실체보다는 ‘그럴듯함’이 우선시된다고나 할까요?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어떻든 거짓 사회에는 선전과 과시가 넘쳐나고, 이 과시가 과장된 제스처를 만들어내며, 이 제스처 때문에 거품이 일어나지요. 이런 사회에서 전략과 술수가 지배하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할 겁니다. 그 중 한두 가지 원인으로 진단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지만, 대개는 진단하는 자의 자기만족일 때가 많지요. 만약 어떤 사회 구성원들이 다 비슷한 몸짓을 하고 비슷하게 행동할 때는 가족, 관습, 사회 구조, 그 사회의 가치, 그리고 개인의 성향과 기질 등 여러 요소들이 고루 영향을 미친다고 봐야 할 겁니다. 이런 곳에서 제대로 살아가는 데도 물론 여러 요소가 필요하지만, 중요한 두 가지만 고른다면, 그것은 사회의 투명한 구조 - 합리적 제도와 개인적으로 견뎌낼 만한 내구력이 되겠지요. 특히 이 후자 -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는 능력이 시민적 덕성입니다. 이런 덕성을 훈련하는 게 시민성의 훈련입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이렇게 문제 제기를 했다. 선생님 이 부분에서 ‘시민성’이라 하면 독일로 치면 헤세나 토마스 만의 문제의식을 통해서 저는 조금 짐작만 하는데요. 오히려 시민성이란 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게 하기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사람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요? 이를테면 헤세의 『황야의 이리』나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

그렇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바른 의미의 시민성이란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개인성’이란 뜻입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은 자기감정, 자기 느낌을 조금씩 조금씩이라도 갖고 표현하고 매일 매순간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데 있지요. 어떻게 내 삶을 꾸려나갈까에 대한 나름의 절실성을 가지고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면서 자기 생각을 만들어가고, 이런 감각과 사유를 통해 자기 생활을 축조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각과 사고와 언어와 표현은 자기 삶의 주체적 구축에 결정적이라는 뜻이지요. 거꾸로 각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려는 것에 대한 자각과 문제의식이 부족할 때, 우꺸는 쉽게 남을 따라합니다. 그것이 편안하고 안전해 보여서겠지요. 그러나 여태 우리는 편안함을 대가로 주체적으로 독립적인 삶을 희생시켜야 합니다.

한국 사회는 여러 가지 점에서 불합리하고, 사회적 불평등도 산재한 곳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사회적 도덕적 압박이 심한 사회이기도 하지요. 말하자면 집단주의적 테제나 슬로건이 많은 곳이라고나 할까요? ‘도덕적 압박이 심하다’는 건 무슨 말인가요? 뉴스나 인터넷 글을 보면, 대부분의 언어는 ‘해야 한다’거나 ‘반드시 무엇이다’거나 ‘절대로 불가하다’지요. 말하자면 당위적 술어들이 우리 시대의 지배적 진술형식이지요. 그래서 무엇이 도덕이고 무엇이 정의란 말이 매일 공시되고 선전되고 전시되고 나열됩니다. 부정의한 사회에서 정의로운 말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죠. 그러나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말들이 난무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도덕적이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못하기 때문 아닐까요? 제 말은 도덕적이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도덕을 말하지 않고도 도덕적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도덕적인 사회는 도덕이란 어휘를 필요로 하지 않겠지요? ‘도덕’이나 ‘정의’란 말의 관성적 비성찰적 남용 자체가 우리 사회의 비도덕성을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도덕성이 회자되는 비도덕 사회

우리 사회는 도덕성이 회자되는 비도덕 사회입니다. 좋은 사회는, 어떤 사람의 삶이 특별히 사회적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 그의 언어와 사유와 행동의 방식을 존중하는 사회 아닌가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너 착한 일해라’, ‘거짓말 하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지금의 상태로도 넘쳐나지요. 한국사회엔 훈시하고 설교하고 계도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지 않나요? 선의가 꼭 필요하다면, 저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거짓 사회에서 거짓말하지 않는 것은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따라서 선해지길 원한다면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당신은 손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럴 준비가 되어있다면, 그 사람은 선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그러니까 결의 혹은 다짐 혹은 주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좋은 결의로 인한 손해와 불이익을 얼마나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느냐’, 이것이 건전한 사회를 위한 핵심입니다.

좋은 일 한 후에는 불쾌한가요? 아니지요. 선한 일은 우리를 흐뭇하게 합니다. 삶을 ‘살만한 것’으로 느끼게 합니다. 그것이 삶의 기쁨이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훈련이 필요하고, 이 훈련은 오랜 시간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제가 문학을 공부하고, 예술과 미학을 즐겨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왜냐하면 예술의 언어는 이런 훈련을 강제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술은 비강제적 자발성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 저는 예술의 언어, 시의 언어를 믿습니다.

예술은 미(아름다움)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1800년대에는 아름다운 것이 대상이었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추한 것, 충격과 경악과 전율과 같은 범주까지도 포함합니다. 심미적인 것의 범주가 확 바뀐 것이죠. ‘추’도 ‘미’의 대상이 된 겁니다. 시적 언어, 심미적 언어는 상대를 강제하지 않고, 또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대로 있음을 존중합니다. 이 현재의 있음을 존중하는 가운데 그 내용을 조금씩 변화시켜가려 하지요. 감각과 사유의 교정을 통해 말이지요. 제가 미학을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저는 명령의 언어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요사이 저녁에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있는데요, 그걸 읽으면서 ‘톨스토이는 이렇게 해서 아직도 살아남는구나!’ 하고 느낀 부분들이 좀 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안나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또 레빈이란 사람의 이야기가 다른 한 축으로 전개되죠. 농촌에 사는 레빈을 어느 날 도시에 사는 그 형이 찾아옵니다. 형은 농촌은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좋고 농민들은 선하다고 말을 하지요. 형은 도시와 농촌을 대립적으로 보고, 뭐든지 농촌과 결부된 것을 미화하지요. 그런데 레빈은 농촌에서 농민들과 동료로 살아가면서 형과는 다른 생각을 합니다. 그는 농촌과 농민을 사랑하지만, 농민들은 게으르고 무능하고 어떤 면에서는 불신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가 만약 나에게 ‘당신은 농민을 사랑해요?’ 라고 물으면 ‘나는 난감할 것이다’, 라고 레빈은 속으로 생각하죠. 레빈이 두 가지 현실 - 농촌이라는 사회현실과 농민이라는 인간현실을 정확하게 본 것일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노동이나 노동자가 농촌개혁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전히 생각하죠. 그리고 이것은 작가 톨스토이의 견해이기도 할 것이고요.

나는 인간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인간을 절대적으로 증오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인간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하지요. 그러니까 나는 인간 앞에서 사랑과 미움,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에서 오가는 것이지요. 또 내가 사랑하는 것은 아마도 어떤 종류의 인간이겠죠.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마치 모든 현실이 아니라 어떤 다른 종류의 현실 - 꿈꾸고 소망하는 현실을 마음에 품듯이 말이지요.

인간이나 현실을 볼 때, 우리는 획일적 판단을 삼가야 할 겁니다. 데카르트 식으로 말하자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의심하는 나 자신도 의심하고, 이런 무한한 자기질문 속에서 결정하고 책임지는 연습을 부단히 하는 것이 좋지 않나 여겨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행동의 계기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부터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니까 좋은 일도 ‘권유의 형식’을 띠어야 하고, 이 권유의 형식 속에 상대방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반경을 허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다운 삶의 실천이지 않나요? 또 이런 자발적 삶의 권유에서는 명령하고 검사하는 듯한 훈계나 설교의 언어란 불필요하겠지요.

가르치려 드는 언어로부터 자유롭기를

우리 사회는 가르치려 드는 언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명령과 지배의 훈육사회죠.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는 좀 더 유연하고 좀 더 많은 가능성을 허용하는 우회로를 걸어가야 합니다. 예술의 언어는 가능성의 형식, 소망의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아마 많은 것은 약속의 형식일 것입니다. 아도르노는 예술을 가리켜 “지켜지지 않은 행복에의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행복에 대한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란 말이죠. 우리 인생이 70년이라면, 그 폭과 깊이는 70년 세월을 훨씬 넘어서야 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한국사회에서의 행복론은 지나치게 자폐적이고 사인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이라고나 할까요? 아니면 지나치게 현상적이거나 즉각적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행복의 개인적 물질적 차원이 사소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참된 행복은 ‘사회적으로 확장된’, ‘공적 광장으로 자신의 창문을 열어놓는’ 개개인의 행복이지요. 공적으로 열려있는 개인, 그것은 근대적 의미의 시민이지요. ‘광장으로 나가라’ 혹은 ‘나가야 한다’가 아니라 ‘개인의 내밀한 삶을 누리면서도 이런 생활 속에서 공동체 전체의 이슈에 관심의 촉수를 열어둔 창문 몇 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게 글쓰기는 ‘완벽하게 헛된 것과 덜 헛되어 보이는 것 사이의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즐거이 감당할 수 있는, 그나마 덜 헛된 일’이 내게는 바로 글쓰기였습니다. 글쓰기나 읽기는 기본적으로 ‘놀이play’이지요. 그러면서 그것은 ‘진지한’ 것이지요. 그것은 내가 스스로 선택하여 즐기는 것이기에 놀이이고, 이 놀이를 통해 뭔가를 깨우치고 각성한다는 점에서 진지하지요. 그리하여 예술경험은 ‘진지한 놀이(serious play/ernstes Spiel)’입니다. 예술의 놀이 속에서는 회심하게 하는 순간, 각성하게 되는 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문학의 시간론에서 ‘영원한 순간’이나 제임스 조이스가 말하는 ‘에피파니(epiphany)’도 이런 시적 전환의 순간을 뜻하지요. 그러나 그런 순간들은 아주 드물게나마 찾아옵니다.

독일유학 후 돌아와 제가 글을 쓴 지 이제 12년 다 되어 가는데, 내 책을 가지고 서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이런저런 곳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됩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어딘가에서 제 책을 읽고 그 글의 진의에 공감하고, 정확하게 내 맘을 집어줄 때, ‘아 내가 허투루 산 게 아니구나’ 하는 느낄 때가 가끔 있죠. 나는 어떤 경험이든, 사람과의 만남이건 사물에 대한 인상이건, 이 모두를 예술작품에 기대어 그 생각을 심화하고 확장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말하자면 심미적 경험을 통한 삶의 가능성 탐구인데, 이 즐거운 경?이 이런 독자와의 만남을 통해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것이지요. 미학에 대한 첫 저술인 『숨은 조화』의 부제가 “심미적 경험의 파장”인 것은 그 때문이지요. 사실 삶의 감동이나 전율, 어떤 회심이나 의미 있는 각성은 이렇듯 ‘큰 흔적 없이, 그러나 어떤 잊기 힘든 무늬를 만들며 천천히 번져가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것이 불미(不美)한 세계에서 구할 수 있는 미적 가능성이 아닐까요? 좋은 의미로 다른 사람을 감염시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사회적인 개입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현실참여의 회로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고, 또 다양하니까요.

‘삶의 이중화(Verdoppelung des Lebens)’란 말이 있습니다. 독일의 작가 크리스타 볼프(Ch. Wolf)가 자기의 글쓰기를 설명하면서 한 말이지요. 말하자면 삶을 ‘겹겹으로 만드는’ 것인데요. 저는 오히려 ‘삶의 다중화(Vervielf?ltigung des Lebens)’라는 말을 쓰고 싶습니다. 삶의 모습을, 삶의 형태를 갖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시도해 보고 싶은 거지요. 자기 외양이나 자기가 사는 집 모습을 다양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모습을, 거기로 들어가서 펼쳐보면 펼쳐볼수록, 다채롭게 드러나는 것이게 하고 싶은 소망의 표현이지요. 일종의 ‘내면의 만화경’이라고나 할까요? 세계의 현상과 그 심연을 내면의 세계에서도, 마치 거울처럼, 담고 있어, 이 다채로운 내부를 외부로 비춰 이 외부의 다채성과 어울리게 하고 싶다는 것이지요. 그럴 수 있다면, 그 삶은 이미,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우주적으로 확장된 무한성의 한 조각’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글이란 바로 이 우주경적 만화경의 한 조각이어야 마땅합니다.

왜 그런가요? 왜 이런 충동이 있는 것인가요? 흔히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인생에는 예로부터 70년이 드물다)’라고 하지요? 그러나 이 70년의 생애마저도 제대로 못사는 것이 인간의 실제적 삶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시공간 같은 것을 넘어 설 수 없지요. 이것을 ‘한계 조건’이라고 합니다. 이 조건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상상력을 통해, 허구적으로 가능할 것이지요. 그래서 허구의 형식인 소설을 쓰고, 나아가 예술의 형상화 작업을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예술적 표현을 통해 사실은 한번 밖에 살지 못하는 삶을 이중화하고 다중화하는 것이지요. 연극배우가 멋진 이유는 무대 위에서의 여러 배역을 통해 ‘수많은 삶의 가능성을 그 나름으로 살아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뛰어난 소설가도 자기가 쓰는 작품의 주인공을 통해 거듭, 기존과는 다르게, 한번 살아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문학은, 소설과 글쓰기는 하나의 상상적 시도가 됩니다. 마치 철학이 ‘사고실험’이듯이 말이지요. 예술은 근본적으로 일회적으로 주어진 삶의 협소한 조건을 허구적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의 하나입니다. 신을 생각하는 것도 꼭 종교의 이름으로만 가능한 게 아닙니다. 삶 너머의 가능성, 현실 저편의 가능성은 신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 나이 올해로 마흔 여덟입니다. 아주 끔찍한 일인데, 오십이면 공자가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죠. 저는 지천명이란 말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늘의 운명을 안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의미를 안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 겸손해집니다. 사십 세는 ‘불혹(不惑)’이라고 하죠. 저는 그 말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지 않고, 또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자기 세계에 매진하는 때’라고 말이지요. 그렇게 할 때,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진의 40대를 지나면, 자기 분수를 헤아릴 줄 아는 지천명의 50대를 맞이하는 건 아닌가, 라고 말지요.

인간은 생물학적 정치경제적 시공간적 근본한계 속에서 사니까, 그의 삶은 그런 의미에서 ‘운명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저 ‘운명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런 운명적 한계 속에서도 어떤 운명의 자리는 거부하고 역행할 수 있어야지요. 그래서 운명의 어떤 일부는 부단히 개선시킬 수 있어야지요. ?러나 이런 거부와 확장의 의지 또한, 더 넓은 맥락에서 보면, 삶의 운명의 일부는 아닌가, 라는 생각이 요즘은 듭니다. 인간 삶의 무서움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점에서 제 자리를 다시 둘러보기도 하구요. 물론 그렇다고 이 운명에의 저항을 그칠 순 없지요. 단지 더 내밀하고 더 불연속적으로, 각자에게 적절한 실효성 있는 방식이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저항의 방식을 만들어 가야지요. 글은 제게 그런 성찰의 매체지요.

예술은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삶의 탐색법

제 전공은 현대소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독일 현대소설이지만, 문학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일정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존과는 다르게 인간과 문학과 현실과 세계를 파악하자,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일반의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라고 말이지요. 이런 문제의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세 가지 목표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첫째는 독일문학이나 철학 미학을 철저하게 읽자는 것이고. 둘째는 그렇게 읽은 것으로 이론적 무장을 한 후 한국의 문학과 예술과 문화를 이해하고 감상하고 분석하는 일이지요. 그렇게 해서 강운구 선생의 사진론, 김수영론, 장정일론을 썼습니다. 여기에 아직 출간되지 않은 최윤론이 있습니다. 셋째 이런 걸 통해 나의 미학, 나의 문학론. 나의 예술론을 정초해보고 싶은 꿈이 있지요. 그 사이에 즐겨 읽은 책 가운데는 무엇보다 제 은사인 김우창 선생님의 여러 저작이 있지요. 지난 십년 동안 열한 권 정도의 책을 썼는데, 처음부터 그런 목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 김우창론은 네 권 있고요. 올해와 내년에 서너 권이 더 나올 겁니다.

우리가 ‘독일문학’, ‘프랑스문학’, ‘영미문학’, ‘한국문학’... 이런 말을 하는데, 사실은 거기서 ‘독일’이나 ‘한국’이란 말을 떼어내고 그냥 ‘문학’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문학작품은 지극히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일상을 통해 보편적 가치와 그 지평을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결국 인간의 삶, 동료 인간, 우주의 넓이와 깊이, 그 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 관심은 문학을 포함한 예술 일반 - 시와 그림과 건축과 음악과 춤과 연극과 영화 등등이 어떻게 인간을 이해하고 있는가, 어떻게 현실에 대응하고, 이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가, 이러한 이해와 인식에서 우리가 배울 만한 것은 없는가, 그리고 이렇게 배우면서 무엇보다 각자의 삶을 제대로,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르게 조형할 수 있을까?, 에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생각하면, 한때는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말이지요. 물론 그래도 잘 것은 다 잤지요.

사실 『렘브란트의 웃음』의 부제는 ‘문광훈의 예술론’인데, 이것은 이를테면 ‘제 이름으로 던진 미학적 출사표’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허황된 것이지만요. 자기 발언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 전에 한길사에서 나온 김우창론 두 권을 동시에 쓰고 나니까, 이 두 권 합해 원고지 4000장 정도 됐는데, 거의 죽는 줄 알았습니다. 능력 없는 사람이 과분한 것을 하니까 그런 거지요. 어쨌든 그렇게 쓰고 나니까, ‘이제 내 글을 써야 되겠다, 그렇게 써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렘브란트의 웃음』은 그야말로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썼습니다. 내 오랜 갈망을 언어 속에, 예술의 경험을 빌려 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썼지요. 그 책을 읽은 어떤 독자가 이 책은 단지 예술론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본 삶의 철학’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본 것입니다. 예술과 철학에 기대어 제 삶의 방법론을, 삶의 기술을 구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방법론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설득력을 가진다면, 그것은 어떤 신뢰할 만한 양생술(養生術)이 될 수도 있겠지요.

저는 예술작품이 단순히 감상의 대상이나 해석의 대상에 그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거기에 의지하고 에너지를 얻고 경험을 넓히고 생각을 바꿈으로써 자기 삶을 재조직하는 것입니다. 그 에너지로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예술은 활력의 원천이자 자기 삶의 동반자지요. 내가 활력을 얻을 수 있는 변함없는 에너지의 원천, 그걸 통해 내 삶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 그것이 예술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거듭 질의하고 확인하게 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기존의 예술론이나 미학 이론 혹은 예술철학은 때로는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대부분의 미학 관련 책을 보면, 미학의 역사, 미학의 주요개념에 대한 풀이나 설명이나 소개나 개념규정으로 차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그것이 어떻게 내 삶에, 우리의 ?에, 나날의 일상에 관련성을 갖는가 하는 문제지요? 내가 여기서 내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고민하는데 어떻게 미학적 논의는 이어지나요? 쇼핑하고 검색하고 다음 달 이자를 걱정하고 매일의 생계를 유지하고 아이를 키우는데, 어떤 도움이 되나요? 답답하고 지루하고 재미없습니다. 우리가 예술을 이해하는데, 모든 개념을 그렇게 도식적으로 알아야 하는 걸까요? 개념이 뭡니까? 니체는 개념에 붙박인 상태나 사람을 가리켜 ‘개념의 미라’라고 말했습니다. 개념의 사체(死體)란 말이죠. 주요개념 같은 전문술어를 하나하나 면밀하게 따져보아야 할 시간이 있긴 있습니다. 대상을 면밀하게 파악하려면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예술경험, 심미적 현상의 문제가 개념만의 기계적 놀이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것이 나날의 일상과 유리된 채, 마치 나와 무관한 듯 파악되면, 곤란하지요.

‘미적 체험’ 혹은 ‘미적 경험’이란 말과 관련하여 짚어야 할 문제가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aesthetic’이란 말에 대한 번역입니다. 흔히 ‘미적’이라고 옮기지요. 이렇게 될 경우 ‘아름다운 것’만을 대상으로 할 가능성이 크지요. 그러나 인간의 삶이 아름다움에서만 뭘 배우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aesthetic’이란 1900년 전후해서, 그러니까 20세기로 들어오면서 광범위한 의미전환을 겪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추악이나 경악, 놀라움, 전율과 같은 온갖 부정적(否定的, negative) 현상도 내포합니다. 사실 현대의 모든 도시적 인간적 사회정치적 현상은 균열과 파편, 부정합, 불연속성과 같은 부정적이고 이질적인 요소들로 이뤄지지요. 그러니 aesthetic도 단순히 ‘미적’이 아니라 ‘심미적(審美的)’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이것은 『숨은 조화』라는 책의 앞쪽의 한 각주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심미적’이란 말에는 미를 ‘심판/판단’한다는 뜻이 배어 있거든요. 즉 이성적 작용이 개입하는 행위지요.

다시 말하여 예술경험은 감각적으로 행하는 것이지만, 이 감각적 감수성에는 동시에 이성적인 요소 - 판단과 검토의 작업도 포함합니다. 그래서 예술은 감성적 이성의 활동이 됩니다. 우리가 가장 개별적이고 구체적이고 특수한 사례로부터 이 사례를 넘어 보편적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결국 감성적 이성의 활동으로서의 예술체험은 그래서 구체적 보편성의 훈련이 되는 길입니다. 이것은 시민성의 훈련, 시민을 위한 교양교육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나의 예술론은 예술 속에서, 예술에 기대어 내가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삶의 탐색법입니다. 저는 글을 쓸 때 이런 원칙을 세웠습니다. 매번 다르게 쓴다, 또 철저하게 쓴다. 그러나 그때그때의 이런 차이가 전체 지도 아래 어떤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한다, 라고 말이지요. 그러니 예술은 참 좋은 파트너입니다. 왜냐하면 작품은 장르별로, 또 역사와 나라에 따라 너무나 다양하니까요. 이런 다양한 작품을 통해 삶과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하나하나 습득하고, 이렇게 습득한 것으로 내 내면의 성채를, 마치 하나의 성찰적 우주가 되도록, 구축하는 겁니다. 그것은 즐거운 일이고, 그래서 행복한 작업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나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 - ‘형성과정(Bildungsprozess)’이 되기 때문입니다. 독일어에서 Bildung은 ‘형성’이면서 ‘교양’이란 뜻을 갖지요.

우리는 흔히 ‘교양’이란 말을 자주 쓰지만, 교양에 처음부터 무슨 실체가 있어서, 또 어떤 학벌이나 지위 혹은 권력이나 돈에 의해 획득되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어떤 도움이 될 수는 있지요. 그러나 끝없는 자기형성의 과정에 우리가 있을 때, 우리 스스로 자신을 매일 만들어가고 있을 때,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는 교양적’이지요. 교양이란 말은 이때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교양은 배움을 통해 삶을 부단히 만들 때, 만들어가고자 할 때, 이미 내 자신의 것이지요. 자기 인생을 나날이 조직하는 과정이 곧 교양의 경로이지요.

사실은 반성(reflexion)이란 말도 이와 관련됩니다. 제가 ‘반성력’이? 말을 했지만, 반성력은 ‘우리 잘못하고 죄악을 저질렀으니, 이제 다 같이 반성하자’ 혹은 ‘회개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제겐 단죄와 질타의 권리가 없지요. 설령 그것이 옳다고 해도, 강제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명령과 복종을 요구하는 반성이란 또 다른 억압이 될 수 있으니까요. 제가 반성을 말하는 것은 ‘그저 지금 선 자리에서 주위를 돌아보자’는 말이지요. ‘다시re’ ‘비추어 보자flex’는 것이지요. 그것은 거울 앞에 서는 일과 같습니다. 거울이 뭡니까? 자기 모습을 되비치는 것이죠? 말하자면 반성은 돌아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매일 아침에 우리는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머리카락은 가지런한지 확인하지요? 그처럼 자기 마음에 내면의 거울을 비춰보는 일, 그것이 반성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반성력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선보이거나 자랑하거나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지요. 자기 삶을 정녕 자기 자신의 삶으로 느끼기 위해서, 자기 삶으로 주인으로서 느끼고 생각하며 살기 위해서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이 제 삶을 실감 있게 산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이런 실감 속에서 자기 것이 될 수 있겠지요.

스스로 반성하는 데는 즐거움이 따릅니다. 무슨 확실한 보상이나 대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반성 속에 이미 어떤 자기 갱신적 즐거움이 따르지요. 그것은 자기의 생활과 시간과 일상을 쇄신하는 즐거움입니다. 이것은 어떤 일의 성취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고, 또 사람과의 만남이나 사회적 기여 혹은 어떤 경험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가장 작게는 자기 자신에게 성실할 때, 자기자신을 속이지 않을 때, 그리하여 자기자신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 가장 절실한 마음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이지요.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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