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기업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대학 동창 철우를 만났다.
그 친구는 대학시절 학교 뒤 산동네에서 자취를 했다. 겨울이면 연탄을 땠다. 나는 그때 그 친구 자취 집에 단골처럼 들락거렸던 멤버였다. 물리 숙제도 함께 하고, 술도 마시고, 여러 관심사항에 대해 토론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당시 학교에서 배울 수 없었던 “일 더하기 일이 이가 아닌 삶”을 배웠던 것 같다. 그 당시 이야기를 했다.
“야 임마 그때 연탄가스로 죽을 뻔했던 거 기억나냐!”
“그래?! 아침에 일어나면 어지러웠던 게 기억이 나는 거 같기도 해.”
어렵다면 어려웠던 시기. 힘들었다면 힘들었던 시기. 즐거웠다면 즐거웠던 시기. 지나놓고 보면 대학은 “낭만”이라는 꼬리표를 남긴 시간이었고 그렇게 만들어준 대학의 존재가치는 효율을 따지지 않는 자유정신 속에 있는 것 아닐까?.
철우가 술 한잔 마시고 한마디 내뱉는다.
”다시 대학을 간다면 방황하고 싶네, 그걸 그땐 많이 못 했어!”
“야, 인마 그때 너 방황해서 지금 부사장 된 거 아니야?”
“그런가?!”
어떤 기계나 기구도 공급된 에너지 이상 많은 일을 할 수 없다물질과 에너지가 결합된 곳이 우주다. 물체는 질량을 가지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지만 에너지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사람과 장소와 물체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에너지 형체로 소통될 때만 에너지를 느끼고 관측할 수 있다..
에너지가 전달되는 과정에는 효율이 존재한다. 이상적인 기계들은 100%의 효율을 가지고 작동한다. 하지만 세상엔 그런 기계는 없다. 100%의 효율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나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어떠한 에너지라도 전환 과정에서는 손실이 존재한다. 어떤 기계도 자신이 가진 이상의 에너지를 창출할 수 없다. 에너지의 핵심은 “방출”보다도 끊임 없는 “충전”에 있다.
어떤 사람이 빵을 굽는다. 오븐 속 열의 100% 전부가 빵 굽는 데 쓰이지는 않는다. 오븐 속의 철판을 데우는 데에도, 공기를 데우는 데에도 열이 쓰여야 한다. 빵을 굽기 위해 쓴 에너지가 빵을 굽는 데 30% 쓰였다면 30%의 효율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나머지 60% 정도는 소모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소모라면 소모 없이 빵을 굽겠다고 설치는 사람은 욕심이 많든지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자동차는 휘발유라는 연료를 이용해 화학에너지를 바퀴를 굴리는 데 필요한 역학적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기계다. 휘발유가 연소될 때 분해되면서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에너지가 전환되면서 휘발유 속 탄소 원자는 공기의 산소와 결합하여 이산화탄소를 만들며, 수소원자들은 산소와 결합하여 물을 만든다. 결과적으로 높은 에너지 상태가 물과 같은 낮은 에너지 상태로 전환되면서 자동차가 굴러가는 것이다.
휘발유를 사용하면 에너지의 일부만이 바퀴를 굴리는 데 전달된다. 나머지는 손실이다. 보통 휘발유나 디젤의 경우 30% 이상의 에너지 효율을 얻기 힘들다. 70%의 에너지는 손실이다. 인간의 한계, 과학의 한계인 것이다. 연비 100%의 자동차는 꿈이 아니라 불가능한 과학적 사실인 것이다.
에너지 전환의 물리적 핵심은 “비효율성”에 있다에너지가 전환될 때는 유용한 에너지 이외에 쓸모 없는 에너지도 나온다. 가끔 인간을 기계와 같이 다루려는 시도가 있다. 형이하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살아 있는 세포로 만들어진 특별하고 아주 정교한 기계일 수 있다. 따라서 다른 기계와 마찬가지로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한다. 충전 없이 에너지를 방출하다 보면 어떤 기계든 망가질 수밖에 없다. 지구상의 대부분의 생명체는 여러 종류의 탄수화물로 에너지를 얻는다. 휘발유가 자동차 엔진에서 연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음식물 분자들에는 소화된 후 “잉여 에너지”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남은 에너지가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효율은 어떨까?먹이사슬 속 제일 아래층에 있는 플랑크톤은 효율이 높다. 자신의 체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에너지가 적다는 것이다. 먹이사슬의 단계가 올라갈수록 지수적으로 비효율성은 커진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얼룩말이 1Kg을 유지하는 데 100Kg 이상의 풀이 필요하다. 육식동물인 사자의 경우 1Kg의 몸무게를 유지하는 데는 얼룩말 10마리가 필요하다. 먹이 사슬의 위쪽 고등동물로 갈수록 에너지 전환은 비효율적이고 때론 비합리적이다.
창조적인 일을 하는 인간의 경우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가장 나쁜 연비와 고약한 특성을 가진 자동차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연료를 채워 넣는다고 그냥 움직이는 존재도 아니고, 채찍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도 아니다. 오른쪽으로 튼다고 해서 틀어지지도 않는 경우도 있다.
인간은 사랑 받고 보호받으며, 자존감이라는 잉여의 에너지를 통해 무한의 에너지를 창조해내고 서로 소통하면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존재다. 최악의 효율 속에 의외의 창조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존엄성과 행복 추구의 권리라는 틀 속에 인간의 에너지 영역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창조적 인간을 효율과 연비라는 과학적 카테고리 속에서 경쟁시키고 바라보는 꼰대 같은 사람이 주위에 있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에필로그요즘 연구년을 보내고 있다. 3년에 한 번 6개월 동안 수업 없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학교가 기회를 준 것이다.
지난 3년 동안의 강의와 연구의 레이스에 딱 지칠 때쯤 다가온 연구년은 정말 안식을 주고 있다. 그 안식 중 하나가 집중해서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다음 부수적인 일 중 하나로 음악을 다시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이토록 사소한 일들이 어려웠는지? 요즘은 ‘버즈’라는 밴드의
<라이브 앤 어쿠스틱>을 자주 듣는다. 여유가 없을 땐 듣는 음악의 폭이 좁아지지만 이것 저것 마음껏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 자주 안 듣던 음악도 좋아진다. 또다른 안식은 마음 편히 전공서적이나 논문을 벗어나 책을 읽을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연구실 책장에 꼽혀 있던 보르헤스 전집에 우연히 읽기 시작하면서 요즘은 이 책에 빠져 있다. 여유가 있으니 음악과 책들도 즐기고, 이 여유에서 얻은 에너지를 다음 학기에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