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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이장희 글,그림 | 지식노마드 |
우리는 서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서울의 또 다른 얼굴, 무채색의 도시에 빛을 입힌다. 역동적인 대도시, 쇼핑의 천국, IT 코리아에서 한 겹, 겉옷을 벗으면 이 땅에서 우리의 '시간'이 보인다. 아프지만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고, 안타까움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사연도 있다. 저자는 우리가 지친 하루를 기대어가는 도시, 그 너머의 새로운 서울을 들여다본다. 그는 소소한 서울의 모습을 담아낸 한 권의 스케치북으로, 구석구석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이 도시의 이야기와 풍경으로 서울을 다시 말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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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왕족이 살았던 여러 궁집들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보존되어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고, 그저 이름만 전해지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 중 수송동에는 수진궁이라 하여 예종의 둘째 아들 제안대군이 살았던 궁집이 있었으니 이는 지금의 종로구청 부근으로 당시에는 거대한 규모의 궁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진궁보다 더 유명한게 있었으니 바로 수진궁 귀신이다.
어릴적 비디오를 켜면 영화에 앞서 나오는 경고성 영상이 하나 있었는데, 내용인 즉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 비디오 때문에…”라는 문화부가 만든 공익성 계몽 영상이 그것이다. 이제 그 때 우려했던 비디오라는 미디어는 이미 도태되어 사라진 걸 보며 새삼스레 격세지감을 느껴본다. 그렇다면 그 옛날 어린이들이 무서워했던 것들 중 전쟁을 실감하는 이는 별로 없고, 마마로 순화된 천연두는 치료약으로 오래 전 사라졌으니 남은 하나가 호환이겠는데, 이 호환이란 무엇일까?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컴퓨터에는 익숙한지라 서로 잘 들어 맞는 의미의 호환(互換)은 알아도 이 호환(虎患)은 꽤나 생소해 한다. 그도 그럴것이 동물원에 가야 겨우 만나 볼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는 것을 재앙으로 여긴다는 말이 쉬이 와 닿을리 없다. 하지만,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인왕산에서는 호랑이가 목격되었다 하니 결코 웃어 넘길 일만은 아니었나 보다. 생각해보면 요즘 멧돼지도 만만치 않은데, 상대는 말 그대로 백수의 왕 호랑이가 아니던가!
그런데 조선시대 서울에는 이런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었다 하니 ‘한양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라야 쫓을 수 있다’라는 말까지 나온 전말은 다음과 같다.
어느 한양 호랑이가 북악을 타고 먹이를 찾아 서울까지 내려 왔는데 마침 아기가 울고 있던 집 앞에 멈춰 주위를 엿보고 있었다. 우리나라 아기의 울음소리는 동양에서도 유명하여 그 크기로는 중국까지 소문이 날 정도라 하는데, 특히 한양 아기 울음소리가 가장 컸다고 한다. 엄마가 아기를 달래는데 딱히 먹혀드는 게 없었다. 호랑이가 문 밖에 왔다 해도 울음을 멈추지 않고 곶감을 준다 해도 울음은 멎을 기미가 없었다. 이에 어머니의 “수진궁 귀신왔다”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아이는 울음을 멎는지라 그 자리에 있던 호랑이는 겁을 먹고 줄행랑을 쳤다는 것.
그렇다면 곶감보다도, 호환보다도 더 무서운 수진궁 귀신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수진궁에 살았던 예종의 둘째 아들 제안대군은 여인을 무서워하는 극심한 여성기피증이 있었다. 혈통을 잇고 싶은 왕실에서는 장가를 보내지 못해 안달이 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궁녀 누구라도 대군의 여성기피증을 낫게 하면 대군의 첩이 되게 하고 후한 상까지 내린다는 현상을 내걸기에 이르지만, 누구 하나 성공한 여인내가 없었다. 갖은 술수를 다해 접근한 몇몇 궁녀들이 성공하는듯 싶었으나 피부가 닿는 순간 대문 밖까지 도망치는 제안대군은 한 달 남짓 목욕을 할 정도로 대단한 결벽증까지 소유했었던 것. 결국 제안대군은 장가 못 간 몽달귀신으로 수진궁에서 죽었고 그 후 그 집에는 사람은 살지 않고 그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을 만들어 혼청을 모셨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불어 그 후 왕손으로 장가, 시집 못 가고 죽은 모든 이들을 수진궁에 합사했다 하니 몽달귀신, 처녀귀신의 집합소가 된 셈.
귀신 가운데에서도 시집,장가 못 간 귀신이 가장 무섭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일까. 한양 호랑이는 인왕산에서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 아예 자취 없이 사라지고 없는걸 보니!
이제 수진궁은 아무 흔적도 없이 표지석 하나로 남아 그저 값나가는 노른자 땅이 되어 앞다투어 높은 건물들 올라가기에 바쁜 곳이 되어 버렸다.
진정 돈이란 곶감이고, 호환이고, 수진궁 귀신이고 간에 가장 무서운 존재임에는 분명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