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 매화 보며 술을 마시느라 봄밤이 짧았습니다. 백매와 청매 더불어 피었고, 반가운 벗들이 모여들어 더없이 황홀한 밤이었지요. 호사스런 옛 선비들은 얼음 속에 촛불 밝힌 빙등으로 때 이른 야매(夜梅)를 비추었다지만, 어스름 달빛을 머금은 꽃잎도 그에 못지않았습니다. 그윽한 매향 앞에서 솟구친 술기운은 시 짓고픈 마음을 부추깁니다. 돌아가며 한 수 씩 읊조렸지요. 잔 기울이니 매화음(梅花飮)이요, 시 지으니 매화음(梅花吟)입니다. 모처럼 한껏 취했지요. 벗이 붙잡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는 길, 몸은 ‘갈 지 자’인데 마음은 ‘클 대 자’입니다. 살아서 누리는 기쁨 중에 꽃피는 봄날 보다 큰 게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당나라 시인 설도(薛濤, 770?~830?)는 봄꽃이 마냥 서럽다고 하네요. 그녀는 봄날의 그리움을 담아 ‘춘망시’ 여러 편을 지었지요. 시 한 수가 이렇습니다.
꽃이 펴도 함께 즐길 수 없고
꽃이 져도 함께 슬퍼 할 수 없으니
그리운 임 계신 곳 묻고 싶어라
꽃이 피고 꽃이 질 때는
花開不同賞
花落不同悲
欲問相思處
花開花落時
그렇군요, 저는 벗이 있는데, 그녀는 임이 없군요. 설도는 임이 없다면 꽃 피고 지는 봄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소연합니다. 남자도 꽃 피고 지는 것이 시름겹다고 한 문인이 있긴 있습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꽃 심을 때는 언제 필까 걱정하고 꽃 피면 언제 질까 걱정했답니다. 참, 걱정도 팔자라더니, 그의 시 ‘꽃 심기(種花)’는 이렇게 끝납니다.
피고 짐이 모두 시름겨우니
꽃 심는 즐거움 알 수 없어라
開落摠愁人
未識種花樂
이규보는 남자치고 엄살이 심합니다. 설도는 여린 여자였지요. 꽃물 들인 색종이에 곱살한 시를 적어 보내며 설레는 마음을 털어놓은 사연이 지금도 전해집니다. 저는 설도의 심정을 얼추 짐작합니다. 임 그리는 그리움은 꽃 피고 지면 못 견딥니다. 개화의 기쁨과 낙화의 슬픔은 더불어 나눌 상대가 있어야 더하거나 덜어지는데, 새록새록 임 그리우면 나오느니 한숨이요, 지느니 눈물입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어찌 되나요. 풀리지 않는 그리움은 원(怨)이 되거나 한(恨)이 됩니다.
저는 찾아 봤습니다. 원망으로 뭉친 그리움이 그림으로 그려진 사례가 없을까 하고요. 좀체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뻔히 아는 혜원 신윤복의 그림 한 장을 다시 봤더니, 아, 글쎄, 오늘따라 그 그림이 어찌나 서글프던지, 바로 이 것이로구나, 무릎을 쳤습니다. 속이 깊은 그림은 역시 볼 때마다 달라집니다. 뭐냐 하면, 「연당의 여인」입니다.
|
신윤복, 「연당의 여인」, 비단에 수묵담채, 29.6x24.8cm, 국립중앙박물관 | |
제가 왜 이 그림에서 울혈이 진 그리움을 돌이켰을까요. 장면은 여름날의 뒤뜰입니다. 서로 잎을 부비며 촉촉한 티를 드러낸 연꽃이 못 가득 피었죠. 세 송이 꽃은 연분홍빛 봉오리가 수줍습니다. 혜원은 연꽃의 새뜻함 보다 여인에게 하고픈 이야기를 숨겼습니다. 툇마루에 걸터앉은 그녀는 꽃다운 나이를 넘긴 기생입니다. 댕기 달린 트레머리는 무겁고 좁은 어깨는 안쓰러운데, 단속곳 훤히 드러낸 치마가 민망합니다. 조신한 나이의 앉음새가 아닌 거죠. 넋을 놓은 표정이 애처롭게도 수심에 찼네요. 그녀가 초점 잃은 눈빛으로 연꽃을 봅니다. 꽃이 부끄러운가요, 그녀의 회한이 내리깐 시선에 담겼습니다. 외롭고 한스럽다면, 그것은 다시 못 올 청춘이나 떠나간 정인이 그리운 까닭은 혹 아닐까요.
기생인들 고이 맘에 품은 사람이 없겠습니까. 아니, 기생이기에 넘보지 못할 사랑이라면 그 사랑 어혈이 질 테지요. 오동나무는 암수가 같이 늙어가고 원앙은 짝을 따라 함께 죽는데, 기생의 사랑은 어긋나기만 합니다. 애타는 그리움이 그래서 포한이 됩니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이 하필 연못입니다. 당나라 시인 맹교가 그녀의 서러운 그리움을 알았므까요. ?녀 편에서 대신 읊은 시가 있네요.
저와 임의 눈물로 시험해 볼까요
서로 있는 곳에서 못에 떨어뜨려
바라보다가 연꽃을 따게 되면
올해는 누구 눈물로 죽게 될까요
試妾與君淚
兩處滴池水
看取芙蓉花
今年爲誰死눈물은 짭니다. 통한의 눈물은 더 짭니다. 연꽃이 죽는다면 그리움에 한 맺힌 눈물 때문이겠지요. 맹교의 시 제목이 ‘원망하는 시(怨詩)’랍니다.
그리움은 된통 서럽기만 한가요. 가슴 설레는 그리움이 당연히 있습니다.
|
전 김홍도, 「미인 화장」, 종이에 수묵담채, 24.2x26.3cm, 서울대박물관 | |
연꽃 보는 기생과 달리 이 여인, 하는 짓이 잔뜩 들떠있습니다. 두근대는 속내가 낯빛에 가득 서렸습니다. 엄청 큰 트레머리가 짓눌러 무릎에 괸 한 팔로 겨우 떠받치면서도 무에 그리 좋은지 연신 생글거립니다. 오늘 밤 그이가 올지 몰라 짙은 화장 끝내고서도 경대 앞에서 고혹적인 매무새를 다시 다듬고 있군요. 머리끝에 달린 수식과 조붓하게 덧붙인 동정, 그리고 세워놓은 거울이 그녀의 두방망이질하는 가슴을 닮아 붉게 물들었습니다. 이마에 바른 분, 허리에 맨 띠, 자그만 외씨버선이 유난히 하얗게 보여 붉은색과 어울린 규방이 매우 농염한 분위기를 띱니다. 여인의 지분 향내가 밖으로 번져 나오는 그림입니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지만, 단원의 솜씨라고 보기에 좀 어설픈 구석이 있습니다. ‘단원(檀園)’이란 붓글씨가 김홍도의 필적을 흉내 낸 모양이고, 옷 주름선이 자연스럽지 않아 뻣뻣한 데다 떡 진 머리카락이 단원의 섬세한 붓질과 거리가 있지요. 아무튼 ‘미인 화장’이란 제목처럼 당시 여인네 풍속을 엿보게 하는 데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어엿한 집안의 규수로 보기는 어렵겠지요. 색정이 넘치니까요. 연지가 번지지 않게 붉은 입술을 오물대는 여인의 예쁜 짓이 더욱 그렇군요. 부디 보고프고 그리운 임 만나면 좋으련만 행여 못 온단 기별 들을까 제가 지레 걱정입니다. 목마른 그리움이 목타는 기다림으로 바뀌는 비극이 좀 많습니까. 당시 중에 시견오의 ‘오지 않는 노래(不見來詞)’가 꼭 그 짝입니다.
까막까치 숱하게 울었건만
해가 져도 오지를 않아
하릴없이 화장 갑 들고서
닫았다 열었다 되풀이 하네
烏鵲語千回
黃昏不見來
漫敎脂粉匣
閉了又重開헛되이 거울 보며 눈썹 그리는 일 없기만 바랄 따름입니다.
부재와 결핍이 그리움을 낳지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그리움은 바로 곁에 두고도 그리워해야 하는 일입니다. 참으로 몹쓸 그런 정황을 묘사한 맞춤한 그림이 있습니다. 혜원 신윤복의 필치를 본뜬 작품 ‘서생과 처녀’는 아닌 게 아니라 눈물겹습니다. 그림을 볼까요.
|
작가 미상, 「서생과 처녀」, 종이에 수묵담채, 25.1x37.3cm, 국립중앙박물관 | |
창호지 너머로 등잔 불빛이 어른거리는 단칸방 시골집 마당입니다. 야물딱지게 생긴 서생이 밤 이슥하도록 글을 읽는데, 상투 없이 사방관을 눌러쓰고 수염자국 안 뵈는 걸로 미뤄 기껏 열대엿 살입니다. 보름달이 뜬 게 분명한 것이 사립문 얽어놓은 가닥까지 환하게 비칩니다. 가을 무렵입니다. 잎이 진 나무가 휑하군요. 기둥에 몸을 숨긴 낭자머리 아가씨가 숨소리 죽이며 서생의 거동을 훔쳐봅니다. 무릎 아래 내려온 외가닥 머리채가 윤기 나는데, 얼굴은 어쩐지 수심이 그득하네요. 묻지 않아도 알 만합니다. 서생이 그리워 밤마다 드나들었건만 그는 아예 돌아앉은 돌부처입니다. 여닫이 문짝을 잡고 왔다는 기척을 알릴까 주저하다가 아서라 말아라, 주춧돌에 올려놓았던 한발 마저 내려놓는 심정, 야속하기 이를 데 없는 정황이지요. 상사병은 사람한테서 옮습니다. 모진 그리움 끝에 앓게 되는데, 타고 또 타도 연기가 나지 않는 증세를 보입니다. 오죽하면 옛 노랫가락에 남았겠습니까.
사람이 사람 그려 사람 하? 죽게 되니
사람이 사람이면 설마 사람 죽게 하랴
사람아 사람 살려라, 사람 우선 살고 보자서생이 읽던 서책을 마저 읽고 등잔을 끄고 나면 그녀는 하염없이 발길을 돌리겠지요. 그리고는 다음 날 밤, 무엇에 쓰인 듯 다시 서생 집을 찾을지 모릅니다. 이미 그날 대낮, 먼발치에서 가슴 링이며 그리운 얼굴 엿보고도 말입니다. 생시에 보고 꿈에 보고, 거듭 보고 봐도 그립기는 여전합니다. 조선 문인 이명한이 일찌감치 시조로 읊었지요.
꿈에 다니는 길이 자취 곧 날작시면
임의 집 창밖이 석로(石路)라도 닳을랏다
꿈길이 자취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하기야 임 생각에 잠 못 드는 밤, 꿈에 와 뵌단 말조차 허사일진대 깨어 있는 들 그 또한 꿈속의 꿈이려니, 그리움은 기어코 일장춘몽과 같은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