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맥거핀? 소셜 맥거핀(Social Macguffins)은 사회에 현존하는 적대들을 은폐?왜곡하는 사이비 적대를 의미한다. 사이비 적대는 무지한 대중을 향한 여론조작이나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단순히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계몽된 대중’이 즉각적으로 체험하고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심지어 스스로 재구성하는 ‘과잉의 현실(hyper reality)’이다. |
두 사람이 스코틀랜드행 열차를 타고 가다가 한 사람이 선반에서 짐을 발견한다. “저게 뭐요?”“아, 그거 맥거핀입니다.”“맥거핀이 뭐죠?”“스코틀랜드 고지대에 사는 사자를 잡기 위한 도구죠.”“스코틀랜드 고지대엔 사자가 없는데요?”“음, 그렇다면 맥거핀은 아무 것도 아니군요.”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의 가장 유명한 발명품 중 하나인 맥거핀에 관한 일화다. 맥거핀은 영화의 줄거리에서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관객의 눈을 잡아끌며 긴장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관객들만 알고 있는, 탁자 밑의 시한폭탄 같은 것들이다. 이 폭탄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계속 카메라에 잡히고 째깍째깍 시계도 돌아간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폭발하지 않는다. 즉, 맥거핀의 기능은 영화 속 서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관객들만 ‘낚는’ 것이다.
소셜 맥거핀은 무엇인가여기서 하려는 얘기는 영화 속 맥거핀은 아니고, ‘소셜 맥거핀(Social Macguffins)’에 대해서다. 물론 내가 방금 지어낸 말이다. 소셜 맥거핀(Social Macguffins)은 사회에 현존하는 적대들을 은폐?왜곡하는 사이비 적대(pseudo antagonisms)를 의미한다. 사이비 적대는 무지한 대중을 향한 여론조작이나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단순히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계몽된 대중’이 즉각적으로 체험하고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심지어 스스로 재구성하는 과잉의 현실, 보드리야르 식으로 말하자면 ‘하이퍼 리얼리티(hyper reality)’다. 20세기 후반부터 가속된 미디어크라시와 네트워크 혁명에 의해 담론의 변형은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또 더욱 거대한 규모와 빈도로 벌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에서 유통되는 담론의 오류를 교정하고 정확한 정보를 식별해내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소셜 맥거핀은 실체가 없거나 사소한 적대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회적 갈등인양 과장된 것들이다. 이게 범람할수록 용산참사, 삼성반도체 백혈병 의혹, 쌍용차 노동자 해고사태와 같은 중대한 적대들은 은폐되거나 왜곡되기 쉽다.
소셜 맥거핀을 굳이 밝혀내려는 목적은 무엇일까? 갈등과 적대가 완전히 종식된 조화로운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 아니다. 그런 세계는 터무니없는 환상이다. 사회가 존재하는 한 적대는 결코 종결되지 않는다. 만일 그런 사회가 반드시 올 거라고 약속하는 자가 있다면 의심해야 한다.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 사회는 적대와 갈등이 적나라하게 벌어지는 투쟁의 장이다. 적대관계는 일종의 사회적 상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특정한 계기나 사건을 통해 적대관계가 사회적으로 결정화(crystallization)하는 순간,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은 적을 명확히 인식하고, 전선을 긋고, 격렬히 싸우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천적 목표, 혹은 당위명제는 다음과 같다. 적대와 사이비 적대들의 혼돈 속에서 ‘고통스런 단말마’와 ‘작은 해방의 함성’을 예민하게 골라내는 것. 물론 그건 착취당하고 억압당한 자들-바로 우리들-의 목소리다. 그것은 피아를 식별하고 전선을 조금 더 명확히 분간하게 해줄 것이다. 앞으로 이 글에서 논의할 소셜 맥거핀은 대부분 “지금 여기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주가 될 터이다. 첨예한 현안들을 소셜 맥거핀이라는 프리즘으로 들여다볼 거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먼저 이해를 돕기 위해 사이비 적대의 좀 오래된 사례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가장 극적인 판본들이 박정희 정권과 노무현 정권 시기에 있었다.
진심을 담은 거짓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파병이 본격화하던 무렵인 1965년, 사람들이 깜짝 놀랄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차지철이 느닷없이 베트남파병 반대에 나선 것이다. 당시 국회 상정된 증파안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공화당 국회의원이 차지철이었다. 차지철이 어떤 인물인가. 박정희 측근 중의 측근이 아닌가. 실상은 허탈한 것이었다. 박정희가 측근인 차지철에게 파병반대 ‘쇼’를 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파병반대 여론이 비등하다는 핑계로 미국으로부터 좀 더 많은 걸 얻어내려는 ‘꼼수’였다. 이런 식으로 없는 내부갈등을 있는 것처럼 연출하는 것은 박정희의 특기였는데, 1963년 3월의 소위 ‘군 일부 쿠데타 음모사건’이 그 시초였다. 박정희가 민간인 정치해금을 추진하려하자 군 일부가 반발해 박정희를 죽이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것은 박정희가 이른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 위한 명분 쌓기 용도였다. 박정희가 실제로 살해될 뻔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에 비견되는 노무현 정권 시기의 소셜 맥거핀 역시 파병 건이었다. 당시 국회의원 유시민의 행보는 차지철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어떤 때는 대통령의 대미협상 부담을 덜기위해 국민들이 파병에 반대해줘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후에는 “네오콘의 보복” 운운하며 파병에 찬성한다. 유시민이 생산한 소셜 맥거핀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반대여론의 국면에 따라 이라크 파병 반대와 찬성을 지속적으로 오락가락했다. 그러면서 우리 군인의 생명과 김선일 씨의 죽음을 놓고 반전평화 세력이 그은 전선을 집요하게 교란시켰다.
또 하나의 사례로는 황우석 사태 당시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 홍혜걸의 “국론통일” 주장이 있다.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제목의 칼럼이었다.
“지난 해 기자는 영국 학술잡지 <네이처>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 의도는 명확했다. 그들은 황우석 교수의 업적보다 난자의 출처가 궁금했던 것이다. 겉으론 생명윤리를 내세우지만 속으론 연구진에 대한 흠집내기 의도가 역력해 보였다. (…) 우리가 뿌린 씨앗인데 남들에게 열매를 빼앗길 수 없다. 먼저 분열된 국론을 통일해야 한다.” 이를테면 ‘선진국이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을 질투해서 황우석 흠집내기에 나선다’는 식의 논리였다. 홍혜걸은 황우석을 둘러싼 한국과 선진국 사이의 가짜 적대를 설정해 사람들의 민족주의와 경쟁심을 자극했고 실제로 이 칼럼은 큰 반향을 불러왔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소셜 맥거핀이다.
소셜 맥거핀은 많은 경우 국익이나 공익, 혹은 정의를 빙자해 출현한다. 주의해야할 점은, 대부분의 소셜 맥거핀이 숭고한 내적 동기로부터 탄생한다는 점이다. 있지도 않은 내부갈등을 조작하는 짓을 밥 먹듯 했던 박정희조차, 그런 거짓말을 한 목적이 뭐냐고 물으면 ‘조국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라고 망설임 없이 답할 것이다. 100 퍼센트 그의 진심이리라 확신한다. 모르긴 해도 유시민 역시 소위 ‘국익’을 위해 그런 짓을 했을 것이다. 소셜 맥거핀은 ‘그럴듯한 가짜’일 뿐 아니라 많은 경우 ‘진심이 만들어낸 가짜’다. ‘진정성’ 같은 심정윤리를 통해 사회문제를 판단하길 좋아하는 한국사회야말로, 소셜 맥거핀이 자라날 최적의 토양이다. 이러한 토양은 최근 한국사회에 만연한 음모론적 사고방식들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