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Byungki-Hwang 제공
최을영 | 자유기고가
61년 그리고 50년가야금 명인 황병기가 2011년으로 창작활동 50년을 맞았다. 가야금 연주를 시작한 지는 61년째다. 창작활동 50년을 기념하기 위해 2010년 12월 4일 후배 예술가들이 예술의 전당에서 헌정 공연 <황병기의 소리여행- 가락 그리고 이야기>를 열었다. 국악뿐만 아니라 록 음악, 무용, 미술을 하는 제자와 후배 예술가 52명이 나서서 그에 대한 헌정 공연을 펼친 것이다. 국악계에서 유래가 없는 공연이었다. 1959년 서울대 강사를 시작으로, 1974년 이화여대 국악과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제자를 키워낸, 또 최초로 가야금 창작곡을 만들어 국악 대중화를 위해 애써온 황병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우리 국악에 끼친 영향은 큰 것이었고, 61년 그리고 50년이라는 세월이 주는 울림은 그만큼 강했다.
영혼을 사로잡은 커다란 울림
황병기는 1936년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사업을 하던 아버지 황태문과 어머니 이영애 사이에서 12대 종손이자 3대 독자로 태어났다. 16살 터울의 누나 품에서 자란 황병기는 누나에 대한 정이 각별하다. 누나 덕분에 음악가가 됐다고 생각할 정도다.
“아마도 누님이 즐겨 틀어주던 축음기 소리는 나에게 최초의 음악교육이 됐을 것이다. 나는 요즘도 누님 덕분에 음악가가 됐다고 생각한다.”1)
어린 시절 그는 책 읽기 싫어 하고 놀기 좋아 하는 골목대장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공부를 지독히 못했”고,
“일요일에는 공부하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아침에 나가면 점심을 굶어가며 저녁까지 놀았다.”2) 다만 음악에는 소질이 있어 초등학교 내내 음악반에서 활동하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고, 초등학교 3학년 때에는 서울중앙방송에 출연해 독창을 하기도 했다.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된 것은 서울대 사범대학에 다니던 외당숙 김소열이 그의 집에서 기거하며 그를 지도한 덕분이었다. 김소열은 흥미로운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황병기의 호기심을 이끌었고, 책 읽기의 즐거움도 선사했다.
“아저씨는 교과서를 그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자유분방하면서도 포괄적이고 현장 중심으로 가르쳐 나는 저절로 배움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내 손을 잡고 남대문 위의 다락방에 올라가 조선조의 역사를 들려주고 일요일에는 학교의 빈 교실에서 풍금 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3)
김소열을 통해 처음 접한 국악은 지루했다.
“4학년 때 아저씨의 손을 잡고 국도극장에 가 명창들이 부르는 ‘춘향전’을 구경했다. 조금도 좋은 줄 몰랐다. 오히려 지루했다. 나는 그저 멍청히 앉아 있다 나왔다. 그날 저녁 아저씨는 ‘참 기막히더군. 멋있어. 네가 이 멋을 알려면 더 커야 할 거다’하며 혼잣말로 감탄하면서 인상이 깊었던 소리 대목을 애써 흉내 내고 웃었다. 나는 ‘멋이 무엇일까’하고 무척 궁금했다. 아저씨는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이 됐다. 1951년 부산으로 피란 가서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야금을 시작한 것은 아저씨가 좋다던 그 멋을 찾으려는 잠재의식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4)
경기중 2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해 부산으로 피난을 간 황병기는 거기서 처음으로 가야금을 접하고 그만 매료된다. 그의 입을 통해 가야금을 처음 접했을 때의 상황을 들어보자.
“3학년이던 어느 날 학교 운동장에서 쉬는데 모범생인 반장이 느닷없이 ‘가야금을 배우지 않겠느냐’고 말을 걸었다. 깜짝 놀랐다. 나는 가야금이란 역사교과서에나 나오는 악기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음악시간에조차 가야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가야금 연주를 들어보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반장에게 기죽기 싫어 ‘가야금을 어디서 배우느냐’고 물었더니 ‘일본 집 2층에서 장구 소리를 들었다. 장구를 가르치니 가야금도 있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호기심이 동했다. 왠지 모르게 끌렸다. 그날 바로 초장동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와 함께 그 일본집을 찾았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가니 문 옆에 ‘고전무용연구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문을 여니 바닥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수강생은 모두 여자였다.
당시만 해도 남녀 간에 내외가 있던 터라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누군가 용건을 물었다.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가야금을 배우러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다미방 윗목에서 ‘들어오라’는 노인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렸다.
그는 우리를 앉히더니 가만히 줄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끝없는 신비에 사로잡혔다. 아득한, 그 깊이를 모르는 곳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에 혼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동아줄을 타고 우물 속에 들어가 깊숙이 감춰둔 보물을 처음으로 발견한 도둑놈의 심경 그대로였다.”5)
훗날
“나는 그 커다란 울림을 잊을 수 없다. 일본식 목조가옥 2층 다다미방 한구석에서 들었던 그 소리는 열다섯 살 소년의 영혼을 단숨에 사로잡았다.”며 그때를 회고한다.6)
곧장 집으로 돌아가 가야금을 배우겠다고 했으나 집안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황병기의 고집이 더 셌다. 공부에 지장이 없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결국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내 김철옥 선생에게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또 마침 그때 부산에 설립된 국립국악원에 드나들며 가야금 연습을 계속했다.
인물과사상사의 인기 도서
가야금과 생업의 경계에 머물다가야금 연습은 경기고 재학시절에도 계속됐다. 그러면서도 상위권의 성적을 계속 유지했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다. 하지만 법조인이 될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 건 법학의 이론체계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법조인이 될 생각은 애초에 없었어요. 법학과 국악 사이에서 고민한 적이 없습니다. 원래 부친의 뒤를 이어 사업가가 되고 싶었지만 저에겐 경영학이나 경제학이 구체적인 학문으로 다가오지 않았죠.”7)
법대에 진학해서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국립국악원에 다니며 가야금을 배웠다. 김영윤 선생에게 정악을 배웠고, 우리나라 최초로 가야금 산조 인간문화재가 되었던 김윤덕 선생과, 심상건 선생에게 산조를 배웠다. 그렇게 1958년까지 국립국악원을 드나들며 가야금을 배우고 연습했다.
국립국악원에 다닐 때 그는 가야금 연습뿐만 아니라 장차 배우자가 될 이도 만나게 된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던 때 국립국악원에 가야금을 배우러 다니던, 당시 서울대 문리대 4학년이던 5년 연상의 소설가 한말숙을 1955년 만나 1962년 결혼한 것이다.
한창 젊은 나이에, 국악을 배우고자 했던 사람도 적던 시기에, 그것도 남자가 가야금을 배우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황병기는 그래서 별종 취급을 당했다.
“중학교 때부터 별명이 영감이었다. …… 당시에는 남학생이 음악을 배운다는 것부터도 드문 일이었는데, 더?나 가야금을 배웠으니, 영감이나 할 법한 이상한 짓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서울법대에 진학해서도 매일 국립국악원에 다니는 영감이었다. 대학생이 되었는데도 고등학교 제복을 그대로 입었다. …… 신발을 고무신을 즐겨 신었고 짚세기도 신었다.”8)
그 별종이 국악계에서 처음으로 주목받은 것은 법대 2학년 때 KBS가 주최한 전국국악경연대회 기악부에서 1등을 하면서부터다. 졸업을 앞둔 그는 당시 서울대 음대 학장이었던 현제명에게 강사 제의를 받는다.
“4학년의 마지막 학기도 다 되어가는 어느 늦은 가을날 서울 음대의 현제명 학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내년(1959년)부터 우리나라 최초로 국악과가 신설되는데, 졸업하면 가야금 강사로 나와 달라고 했다. 나는 그럴 만한 자격도 없고 시간 여유도 없다고 한사코 사양했지만, 현 학장이 ‘시간이 문제라면 그것은 내가 해결하겠소. 1주일에 한 시간만 나오시오. 아무리 바빠도 한 시간이야 낼 수 있을 것 아니오. 나는 미스터 황이 우리 대학에 적만 걸어놓아도 영광으로 알겠소’라고 하는 데에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은 새파란 나이의 사람이고 또 음악을 전공하지도 않은 사람을 우리나라 음악계의 원로이자 음악대학의 학장인 현제명 선생이 이렇게까지 평가해주고 간곡히 권유하니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월에 법대를 졸업하자 바로 3월에 음대의 강사가 되었다. 나는 음대에 일단 4년간만 출강하기로 마음먹었다. 최초로 가르치기 시작한 제자가 졸업하게 되면, 하나의 결실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정대로 4년 후 음대를 떠나 실업계로 나갔다.”9)
이후 그는 사회인으로서 생업에 몰두하면서 해외로 가야금 공연도 하는 등 생업과 가야금 사이의 경계인으로 살았다. 1964년에는 협신물산주식회사의 상무이사로 재직하며 명동극장을 운영했고, 1967년에는 태흥화학공업주식회사 기획관리실장을, 1968년에는 기록영화사인 보림영화사 대표, 1970년에는 도서출판 문조사를 세워 대표를 맡기도 했다.
이렇게 생업에 몰두하는 한편 그는 1963년부터 1967년까지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강사로 재직했고, 1967년부터 1973년까지는 이화여대에 강사로 재직했다. 가야금에 대한 지평도 끊임없이 넓혀가 1960년대에 김병호 선생에게, 1970년대에는 김죽파 선생에게, 1980년대에는 함동정월 선생에게 산조를 배웠다.
1974년 이화여대에 둥지를 틀기 전까지 그는 이처럼 생업과 가야금을 동시에 일종의 경계인으로 살았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음악과 관계없는 일을 할수록 나는 더욱 음악에 몰두했다. 나의 20대 후반은 실업에서 이탈된 음악인인 동시에 음악에서 이탈된 실업인이었다. 양쪽 모두로부터 소외된 존재였다.”10)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은 곧 다가왔다. 1974년 이화여대 신재덕 음악대학장으로부터 국악과를 만들기로 했으니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는 이화여대에 둥지를 틀게 된다.
“사업을 하지 않고서도 살 수 있겠지만 가야금을 타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11) 이후 정년퇴임을 하는 2001년까지 이화여대 국악과 교수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다.
골동품에서 전통으로황병기는 가야금 연주자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그가 유명한 것은 가야금곡을 처음으로 창작했기 때문이다. 가야금곡을 창작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1962년 되던 해에 점점 무슨 생각이 들었냐 하면요. 내가 지금 가야금이 좋고 우리 전통음악이 좋아서 가야금을 배우고는 있지만, 문학이나 미술 쪽에선 계속 우리 세대의 새로운 작품이 나오는데 왜 음악만은 옛날 것만 하는가? 우리 세대의 음악도 나와야 하지 않나? 그게 정상이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옛것을 있는 그대로 보존만 하면 그것은 골동품이다, 옛것이 오늘의 우리로 이어져 나아가야 그것이 전통이지 그냥 오늘과 단절된 채 옛것만 그대로 한다는 것은 골동품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12)
이런 생각과 더불어 그는 마침 클래식음악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아 창작을 해야겠다는 의욕이 일어나 작곡을 시작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바탕으로 옛 선비들의 노래인 가곡을 작곡했다. 그리고 그해에 박두진의 ‘청산도’에서 받은 감흥을 바탕으로 우리 음악 사상 첫 가야금 창작곡 ‘숲’을 내놓는다. 이후 ‘가을’(1963), ‘석류집’(1965) 등을 내놓은 그는 1964년에는 국립국악원 최초의 해외공연이었던 일본공연에 가야금 독주자로 참가했다. 또 1965년에는 하?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금세기 음악예술제’에 초청되? 가야금을 연주하고, 그곳에서 첫 앨범 <Music From Korea : The Kayagum>을 발매했다. 이 앨범은 미국의 음악잡지 <하이파이 스테레오 리뷰>에서 “절묘한 음색과 아름다운 선율은 현대인의 정신적인 해독제”라는 평을 받았고, 황병기는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리스, 시애틀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열었다.13)
창작 활동은 계속됐다. ‘가라도’(1968)에 이어 1974년 우리나라 가야금 창작곡의 대표음악인 ‘침향무’를 작곡해 발표한다. 스스로
“내 음악의 전환점”이라고 말하는 ‘침향무’의 창작 의도에 대해 그는
“전통(조선)을 벗어나기 위해 신라까지 거슬러 올라갔다”고 말한다.14) 조선조의 음악의 틀을 깨기 위해 신라시대로 되돌아가는 심정으로 작곡했다고 하는데, 그 과정을 들어보자.
“제가 작곡가로서 신라사람들한테 무용곡을 위촉받았다고 가정을 했습니다. …… 그랬더니 우선 음계부터 조선의 음계와 달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태까지 내려왔던 가야금 산조의 음계를 깨뜨리고 범패 음계로 바꾸었습니다. 범패라는 것을 학자들은 신라시대에 인도에서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범패 음계로 가야금 조율을 바꿔버린 겁니다. 우리나라 가야금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에요. 그 다음에 생각한 것은, 신라시대 미술품들이 굉장히 관능적이라는 것입니다. …… 이러한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것은 비조선적이죠. …… 자유분방하게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면서도 종교적인 법열의 세계를 지향하는 점이 바로 신라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침향무’ 연주에서 기술적인 면은 상당히 감각적이고 관능적으로 보이지만 종교적인 지고한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15)
황병기는 이즈음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활발하게 공연을 펼쳤다. 1968년 5월에는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을 만나 존 케이지 등 전위예술가들과 교류하며 무대에 같이 오르기도 했다. 1974년 황병기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침향무’를 초연한다. 이 연주에 대해 독일의 <호네퍼 자이퉁>은
“인간에 의해 형성된 자연과 오묘한 침묵의 미가 밀착된 이국적인 세계 속에서 청중은 두 시간 동안 황홀하게 도취되어 있었다. 이는 아시아의 전통음악이 가진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무수한 길을 찾아내 보여주고 있다”고 호평했다.16) 또 파리 공연에서는 소설
『25시』의 작가 콘스탄틴 게오르규가 직접 감동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또 이때에 그는 재독작곡가 윤이상을 처음 만나 교류하게 된다.
1975년에는 명동국립극장에서 뉴욕에서 활동하던 현대무용가 홍신자와 함께 창작곡 ‘미궁’을 초연했다. 여성관객이 비명을 지르며 중간에 뛰쳐나가는 일이 있었던 것에서 볼 수 있듯 이 곡은 전위예술로서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한동안 연주를 금지당했다.17)
이후 황병기는 ‘비단길’(1977), ‘영목’(1979), ‘아이보개’(1977), ‘전설’(1979), ‘산운’(1979), ‘하림성’(1982), ‘밤의 소리’(1985), ‘남도환상곡’(1987), ‘소엽산방’(1989), ‘춘설’(1991), ‘달하 노피곰’(1996), ‘시계탑’(1999), ‘낙도음’(2002) 등의 작품을 꾸준히 내놓는다. 앨범 또한 꾸준히 발매한다. <침향무>(1978), <비단길>(1979), <미궁>(1983), <춘설>(1993) 등이 그것이다.18) 또 2007년에는 <달하 노피곰>을 내놓았다.
황병기가 창작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바로 현대와의 교류다.
“창작국악은 현대를 살아가는 창작자의 지적 활동이므로 현대인의 감성을 수용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하는 예술사적 명제를 계승하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사실 국악에는 작곡의 개념이 없습니다. 다만 ‘가락을 짠다’고 말하지요. 체계적 이론과 방법론으로 접근할 수 없는 우리 음악에서 아름다움의 법칙을 찾아야 하는 작곡가로서의 고충이 많습니다. 국악 작곡가는 창작의 순간마다 우리 전통을 사랑하면서도 그 전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막상 전통을 깨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냈을 때는 언제나 허망함이 밀려옵니다. 전통으로 돌아가려는 욕구와 벗어나려는 욕구 사이의 긴장이 제 작업을 유지해주고 있는 힘입니다.”19)
국악의 대중화를 위하여황병기는 통일을 위해서도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다.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단장으로 재직 중이던 1990년 10월 북한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석한다. 민간인으로서 정부에서 허용한 최초의 방북이었다. 그해 8월 말 범민족음악회 준비위원장이던 윤이상으로부터 참가 의뢰를 받은 뒤 음악인들을 규합해 이룬 성과였다. 그는 범민족통일음악회에 대한 화답으로 ‘90송년통일전통음악회’에 북한 음악인과 기자 30여 명을 초청해 송년통일음악회를 성대하게 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국악의 대중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1994년 국악의 해 조직위원장을 맡았을 당시 황병기는 국악의 대중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예술을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당위나 윤리적 문제로 접근할 수는 없지요. 김치를 먹어야 한다고 누가 강요해서 먹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에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일단 들어보는 게 중요해요. 서양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국악도 틀림없이 좋아할 수 있어요. 서양음악 애호가들이 듣는 음악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바흐부터 바그너까지 불과 2세기 남짓한 특정지역의 음악에 불과한 것이지요. 인류가 만들어낸 음악의 유산은 크고 넓어요. 18~19세기 서양음악은 그 유산 중요한 일부임에는 틀림없지만 전부는 아니에요. 열린 마음을 가지면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들으시던 그 가락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리가 없어요.”20)
많이 접하지 않아 낯설다는 것이다. 일단 들어보면 다를 거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서양음악과 국악은 무엇이 다를까?
“서양음악은 벽돌을 쌓아놓은 것과 같은 음악이에요. 높낮이만 다른 똑같이 생긴 음들을 화성학이라고 부르는 일정한 규칙으로 쌓아놓은 구조물이지요. 그러나 국악은 음 하나하나의 생김새가 달라요. 벽돌이 아니라 기암괴석 같다고나 할까요. 그것은 차곡차곡 쌓을 수가 없어요. 기기묘묘한 돌멩이들을 늘어놓은 정원을 감상하려면 차를 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천천히 거닐어야만 그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지요.”21)
그 맛을 알려주기 위해 그는 여러모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2006년 국립국악관현악단 단장이 된 이후에는 좀 더 쉽게 일반 대중이 국악을 접할 수 있게 다양한 공연을 기획해 선보였고 높은 인기를 얻었다. 해설이 있는 연주회인 ‘사랑방 음악회’는 2007년 초연된 이후 전 좌석 매진을 기록했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엄마와 함께하는 국악보따리’도 큰 인기를 얻었다. 또 ‘황병기와 함께 하는 정오의 음악회’와 ‘뛰다 튀다 타다-테마가 있는 퍼포먼싱 콘서트’ 등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평생 국악에 헌신하다 보니 상도 많이 받았다. 1965년 공보부가 제정한 ‘국악상’과 ‘문화표창장’을 받았고, 1990년에는 한국공연평론가협의회의 ‘올해의 예술가’로 선정되었다. 또 영화 <영원한 제국>의 음악으로 1995년 백상예술대상 음악상을, 1999년 한국음향학회에서 수여하는 ‘에밀레 대상’을 수상했다. 200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2003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또 방일영 국악상을 받았다. 그리고 2004년에는 호암상을, 2006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상을, 2008년에는 일맥문화대상을, 2010년에는 후쿠오카 문화대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깊은 밤, 그 가야금소리』(풀빛, 1994)와, 재미 작곡가 나효신과의 대담집 『황병기와의 대화』(풀빛, 2001) 등이 있다.
가야금은 숙명국악과 현대음악과의 교류에도, 젊은 음악인과의 교류에도 큰 신경을 쓰는 황병기는 실제로 후배 음악인들과의 격의 없는 교류로 유명하다. 특히 2001년부터 교류해온 세계적인 첼리스트 장한나와는 음악적인 친구 사이다. 장한나는 황병기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나한테 정말 심오한 영향을 준 것은 황 선생님의 음악 속에서 내가 느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듯한 그런 마음의 상태였다. 내 마음이 정신없이 산만하게 음악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서 내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의 고요함을 회복하는 그런 상태다. 아마 우리 국악에서만 가능한 흐르면서도 정지된, 그리고 서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그런 상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외국인들에게 선물할 일이 있으면 거의 다 황병기 선생님의 가야금 연주곡 음반으로 한다. 이 음악을 처음 듣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한결같이 음악의 힘에 놀라고 감탄한다.”22)
이처럼 젊은 음악인들과 격의 없이 교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탈권위적이고, 소탈한 성품 때문? 것이다. 한 강연에서 그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쳀 없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을 정도로 소탈하다.
“저는 (서울대) 후배들한테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것이, 제가 학교 다니고 젊었을 적에 나이 좀 먹었다고 어쩌라저쩌라 그러는 말이 제일 싫었거든요. 이와 관련해서 제가 좀 다른 예로 호(號)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국악을 하는 사람이고 또 나이가 먹은 사람이니까 다들 호가 있을 것으로 압니다. 그렇지만 저는 호가 없어요. 저는 호 같은 것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거든요. 왜 그러냐. 제 이름 하나 ‘황병기’라는 석 자의 이름 하나도 감당하기가 어려운데 무슨 또 이름을 만들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젊었을 적에 유행하던 말이, 요새도 유행하는지 모르지만, ‘보이스 비 엠비셔스’였지요.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제가 그 소리를 제일 싫어했거든요? 뭐 그냥 평범하게 살지, 무슨 야망이냐.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 엘리트라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기 자신이 우리 민족 내지 국민한테 폐나 안 끼치면 다행이지, 무슨 애국을 한다고 법석이냐. 그래서 저는 애국할 생각을 아예 갖지 않고, 우리 국민한테 폐나 안 끼치고 살았으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뭐 젊은 사람들한테 이래라저래라 안 하는 늙은이가 되기를 바랍니다.”23)
2011년으로 75살이 된 그는 거의 평생을 가야금과 함께 살았다. 그에게 가야금은 숙명과도 같다.
“지나고 보니까 가야금하고 저하고는 특별한 어떤 숙명적인 관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51년부터 가야금을 계속한 것도 그런데다가, 인생에 있어서 큰일들, 저희 집사람이 국악원으로 가야금을 배우러 와서 만났기 때문에 결혼도 가야금 때문에 했고, 가야금 교수가 되었으니 직장도 가야금 때문이고. 제가 1990년에 남한 사람으로는 최초로 판문점을 걸어서 북한에 간 제1호입니다.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분단의 장벽이 엄청나게 크게 느껴졌는데, 그 벽을 뚫고 저를 북한에 보내준 것도 가야금 소리에요. 제가 가야금 연주하러 갔으니까요. 지금 지내놓고 보니까 제 인생에서 모든 중요한 일이 가야금과 상당히 숙명적으로 얽혀져서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24)
숙명이기 때문에
“연주자는 일주일만 손 놓으면 못해요. 줄을 콩고물 주무르듯 해야 하는데 손가락이 엉켜 불쾌하거든. 어찌 보면 멍에이지만 꼼짝없이 얽매이는 그 맛이 그만이지.”25)라는 말도 자연스럽다.
가야금만이 아닐 것이다. 그에겐 음악도 숙명이다. 오늘 그가 바라보는 음악은 무얼까? 음악에 대한 그의 말로 이 글을 맺자.
“곧 져버릴 꽃이나 이슬처럼 사라져버리는 것들이야말로 우리 영혼을 울릴 때가 많다. 음악은 사라지는 것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것이다.”26)
| 주 |1) 황병기, 「나의 젊음 나의 사랑 1 : 가야금 대가 황병기 교수」, <경향신문>, 1996년 6월 3일, 31면.
2) 황병기, 「나의 젊음 나의 사랑 1 : 가야금 대가 황병기 교수」, <경향신문>, 1996년 6월 3일, 31면.
3) 황병기, 「나의 젊음 나의 사랑 1 : 가야금 대가 황병기 교수」, <경향신문>, 1996년 6월 3일, 31면.
4) 황병기, 「나의 젊음 나의 사랑 2 : 가야금 대가 황병기 교수」, <경향신문>, 1996년 6월 4일, 31면.
5) 황병기, 「나의 젊음 나의 사랑 2 : 가야금 대가 황병기 교수」, <경향신문>, 1996년 6월 4일, 31면.
6) 황병기, 「나의 젊음 나의 사랑 1 : 가야금 대가 황병기 교수」, <경향신문>, 1996년 6월 3일, 31면.
7) 유인화, 「가야금 명인 황병기 국악인생 60년, 창작인생 50년…언제나 ‘지금’이 가장 좋아요」, <경향신문>, 2010년 11월 16일, 26면.
8) 황병기, 「나의 20대 : 고교 제복에 짚세기 신고」, <월간샘터>, 1991년 3월호, 50쪽.
9) 황병기, 「나의 20대 : 고교 제복에 짚세기 신고」, <월간샘터>, 1991년 3월호, 51~52쪽.
10) 황병기, 「나의 젊음 나의 사랑 4 : 가야금 대가 황병기 교수」, <경향신문>, 1996년 6월 6일, 31면.
11) 황병기, 「나의 젊음 나의 사랑 7 : 가야금 대가 황병기 교수」, <경향신문>, 1996년 6월 12일, 31면.
12) 황병기*서울대학교기초교육원,
『가야금 선율에 흐르는 자유와 창조(서울대 기초교육원 관악초청강연)』(생각의나무, 2008), 32쪽.
13) 황병기, 「나의 젊음 나의 사랑 5 : 가야금 대가 황병기 교수」, <경향신문>, 1996년 6월 8일, 31면.
14) 문학수, 「고대의 깊은 우물서 현대음악 길어올린다」, <경향신문>, 2004년 12월 13일, 13면.
15) 황병기*서울대학교기초교육원,
『가야금 선율에 흐르는 자유와 창조(서울대 기초교육원 관악초청강연)』, 생각의나무, 2008, 84~85쪽.
16) 이세기, 「동양의 신비 끌어올리는 황병기의 금선」, <월간문화예술>, 2002년 1월호, 89쪽.
17) ‘미궁’은 2000년대 들어 갑작스레 괴담의 주인공이 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이 곡을 들은 사람 300명이 죽었다, 작곡자가 이 곡을 쓰고 죽었다, 이 곡을 세 번 들으면 자살한다는 식의 괴담이 인터넷을 통해 유포된 것이다.
18) 이 앨범은 모두 스테디셀러가 됐으며, 1993년과 2001년 각각 재발매되었다.
19) 박천호, 「‘94 국악의 해’ 황병기 조직위원장 “우리 음악 열기 생활화 최선”」, <한국일보>, 1994년 1월 31일, 7면.
20) 김정곤, 「내년 국악의 해 준비위원장 황병기 교수」, <한겨레>, 1993년 12월 18일, 9면.
21) 김정곤, 「내년 국악의 해 준비위원장 황병기 교수」, <한겨레>, 1993년 12월 18일, 9면.
22) 장한나, 「내 마음속의 별 : 첼리스트 장한나의 ‘황병기 선생님’」, <동아일보>, 2006년 11월 18일, 45면.
23) 황병기*서울대학교기초교육원,
『가야금 선율에 흐르는 자유와 창조(서울대 기초교육원 관악초청강연)』(생각의나무, 2008), 111~112쪽.
24) 황병기*서울대학교기초교육원,
『가야금 선율에 흐르는 자유와 창조(서울대 기초교육원 관악초청강연)』(생각의나무, 2008), 115~116쪽.
25) 오미환, 「환갑 맞아 공연 갖는 황병기 교수 : “가야금줄에 얽매인 삶 멍에지만 그맛이 그만”」, <한국일보>, 1996년 4월 22일, 27면.
26) 김소진, 「잠깐독서 : 깊은 밤, 그 가야금소리/황병기 지음 예술관*살아온 얘기 등 짧은 글속 ‘긴여운’」, <한겨레>, 1994년 10월 26일, 13면에서 재인용.
제공: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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