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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이장희 글,그림 | 지식노마드 |
우리는 서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서울의 또 다른 얼굴, 무채색의 도시에 빛을 입힌다. 역동적인 대도시, 쇼핑의 천국, IT 코리아에서 한 겹, 겉옷을 벗으면 이 땅에서 우리의 '시간'이 보인다. 아프지만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고, 안타까움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사연도 있다. 저자는 우리가 지친 하루를 기대어가는 도시, 그 너머의 새로운 서울을 들여다본다. 그는 소소한 서울의 모습을 담아낸 한 권의 스케치북으로, 구석구석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이 도시의 이야기와 풍경으로 서울을 다시 말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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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를 보고 테일러의 묘소에 한 번 가본다는 것을 이렇게 저렇게 미루고 있다가 가을이 시작될 무렵 양화진 외인묘지에 들렀다.
양화진 묘소는 외국인들이 배를 타고 와서 처음 내렸던 양화진 포구에 자리잡고 있다. 아마도 먼 고향의 그리움을 향한 출발지 같은 의미도 지녔으리라. 또한 양화진에 도착한 외국인들은 돈의문(서대문)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정동에 외국인 부락이 많이 생긴 이유이기도 하다.
외국인들의 묘지를 가보면 우리네 공동묘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웬지 우리들에게 무덤이라는 것은 될 수 있는한 멀리, 때로 명당이라는 이름하에 산 속 깊숙이 숨어 버리곤 하는데, 그들의 묘는 일상 속에 함께 있는 기분이다. 그래서 외국 도시 한가운데 공원처럼 자리 잡은 묘비 사이를 거닐다 보면 죽음이 그리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구나 싶어진다.
양화진 외인묘지도 복잡한 서울 한 복판에 차분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묘비 사이로 나 있는 작은 길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과거 어느날 배가 들락거렸을 양화진 포구는 이제 8차선 강변도로가 시원스레 뚫려 끊임 없는 자동차 소음만을 토해내고 있었고, 어디서 날아 왔는지 산비둘기 두 마리가 근처 소로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 풍경들은 모두 그림처럼 느릿하게, 때로 멈춘 듯 정지해 있었다. 가느다란 10월의 햇살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들 사이로 반짝거리며 비추던 어느 묘비에 써 있던 말.
신이시여.
길고 긴 빛은 끝나고 이제 여기에서 휴식을 가집니다.
테일러가의 묘지를 찾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묘역 안내판에 당연히 있을거라 생각하고 안내판만 확인하며 돌아다닌 것이 판단착오. 업적(?)의 경중이 없지 않겠지만, 묘역 안내판에 모든 이들의 명단이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 결국 하나씩 묘비명을 읽어내려갔다. 전에도 이 곳을 찾은 적은 있었지만, 목적의식을 갖고 거닐어 보니 더 많은 것들이 보였다. 친절하게 설명된 해설판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우리 역사 안에서 사라져간 많은 외국인들을 만났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꼭 이렇게 무덤에까지 안내판을 꽂아 업적(?)이라 해야할 것들을 일일이 나열해야만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테일러 묘비는 마지막에 있었다.
양화진 묘소를 자세하게 둘러 보라는 뜻이었을까. 묘하게 반대쪽부터 돌기 시작해 마지막에 다다르니 그의 이름이 보였던 것. 묘비에 써 있는 글을 읽어보았다. 영어는 고어(古語)로 써 있었다. 나중에 돌아와 검색해 보니 이 글은 세익스피어가 죽음의 평안함을 이야기한 「노래(song)」라는 시의 한 부분이었다.
thou thy worldly task hast done, Home hast gone and ta'en thy wages
그대여, 그대는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마치고 돌아가 보상을 받았다.
글을 수첩에 옮겨 적고 한동안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이상향.
그 단어 하나를 매개로, 이미 끝을 맺은 이상향과 아직 진행중인 이상향이 서로 마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