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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이장희 글,그림 | 지식노마드 |
우리는 서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서울의 또 다른 얼굴, 무채색의 도시에 빛을 입힌다. 역동적인 대도시, 쇼핑의 천국, IT 코리아에서 한 겹, 겉옷을 벗으면 이 땅에서 우리의 '시간'이 보인다. 아프지만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고, 안타까움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사연도 있다. 저자는 우리가 지친 하루를 기대어가는 도시, 그 너머의 새로운 서울을 들여다본다. 그는 소소한 서울의 모습을 담아낸 한 권의 스케치북으로, 구석구석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이 도시의 이야기와 풍경으로 서울을 다시 말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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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DILKUSHA
힌두어:이상향
이 생소한 단어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
그렇게 이국적인 모습을 한 이상향은 종로구 행촌동의 어느 골목, 빽빽한 다세대 주택 사이에 끼어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낡은 모습으로 시들어 가고 있었다.
TV에서 우연찮게 딜쿠샤가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보며 인상 깊었던 건 무엇보다 거대한 은행나무였다. 그 좁은 골목에 그토록 커다란 은행나무가 교묘히 잘도 서 있구나, 라는 어떤 경이로움.
사람 만큼이나 고달픈 생을 살고 있는 서울의 나무들이여.
나무에 대한 욕심은 며칠 후 자세한 정보 없이 3호선 독립문 역에 나를 내려 놓았다. 그 날의 고생을 생각하면 이런 무모함도 없겠다 싶은데, 당시 생각으로는 나무가 크니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면 누구라도 대답해 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옆집사는 이웃에게도 관심이 없는 서울 사람들에게 동네의 나무를 알 것이라 기대한 건 큰 오산. 결국 행촌동 일대를 돌고 돌다가 ‘딜쿠샤’가 아닌 ‘귀신 나오는 집’으로 가르쳐 준 사람은 어느 크지 않은 부동산 주인 할머니였다.
“거기 귀신 나올 것 같이 으스스해, 앞에는 커다란 나무도 있어서 찾기가 어렵지는 않을거에요” 라며 할머니는 효자손을 들고 벽면에 걸린 커다란 지적도에 한 곳을 콕콕 짚어가며 말씀하셨다.
부동산에서 손수 그린 약도를 갖고 나무를 찾아가며 동네 사람들이 이 큰 나무를 잘 모르는 이유에 대한 의구심이 조금은 풀렸다. 연립주택의 좁은 골목 사이를 지나자 거짓말 같이 400년이 훨씬 넘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턱 하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앞에는 다 쓰러져 가는 붉은 벽돌 건물 하나.
나무만큼이나 인상적인 딜쿠샤가 있었다.
이제야 이상향에 도달했구나.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집주인이었던 앨버트 테일러의 한국 이야기는 구한말이었던 1896년, 탄광일로 아버지 조지 테일러가 평안도에 들어오며 시작된다. 그 후 아들 앨버트는 서울에서 UPI특파원 일과 수입품 판매상을 하며 브루스를 낳고 이 집을 지었다. 집의 이름은 한국에 오기 전 아시아를 돌던 중 인상 깊게 보아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인도의 궁전 딜쿠샤.
앨버트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최초로 세계에 타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독립선언문을 갓 태어난 브루스의 요람 밑에 숨겨 두었던 이야기나 일본으로 가는 동생의 구두 뒷굽에 선언문을 숨겨 도쿄에서 기사화 했다는 이야기는 꽤나 유명하다. 결국 이것들이 문제가 되어 일제에 의해 6개월 간의 감옥 생활을 한 뒤 국외로 추방되고 만다. 그는 1948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죽어서도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대로 양화진 외인묘지에 있던 그의 아버지 옆으로 돌아온다.
그 뒤 딜쿠샤라는 각자를 가진 이 건물의 정체는 오랫동안 잊혀져 왔었는데, 브루스 테일러가 87세의 나이로 서울을 찾게 되면서 비밀이 밝혀지게 된 것. 내가 본 TV다큐도 그 때 이야기였다.
그 앞으로 있는 거대한 나무는 권율장군의 집터에 있었다는 은행나무.
권율장군은 조선 중기의 군인으로 임진왜란에 있어 바다에는 이순신이라면 육지에는 권율이라고 할 정도로 대표적인 명장이다. 특히 수원성이나 행주산성에서 병력의 열세를 지형지물을 활용해 대승을 거두었던 전투들은 전술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간 통신사의 말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당시 이순신과 권율의 이름만 꺼내도 울던 아이들이 울음을 멎을 정도였다고 하니 두 장군의 기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잠시 나무 밑둥을 어루만지며 어느 옛날 권율의 손길도 이 자리를 스치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했다. 비록 나무는 계속해서 자라 그의 손길은 저 위 어디쯤으로 멀어졌겠지만 옛 사람들과 이렇게나마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했다.
그 아래 축대에 걸터 앉아 딜쿠샤를 스케치에 담았다.
이제 그 낡은 집에는 형편 어려운 열 일곱가구가 나누어 살고 있다.
그 많은 이들의 이상향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은행잎이 여름 바람에 살랑이며 시원한 소리를 냈다. 고개를 치켜들고 나무가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옛날 권율장군도, 오래 전 테일러도 가졌을 이 기분. 이 느낌들을 훗날 몇 백 번의 여름이 지난 후에도 누군가 이 자리에 앉아 더 커진 나무가 만들어준 그늘 아래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나지막이 소망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