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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이택광 저 | 아트북스 |
유럽 문화의 중심지이며 예술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는 대표 명소인 파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술을 사랑하며 문화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공간이 되어 주었던 파리. 인상파는 이러한 파리의 변화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낸 화가들을 칭하는 말이다. 지금 파리의 모습은 19세기 후반 오스망 남작의 지휘 아래에서 추진된 도시계획으로 완성 되었는데 이 때 인상파 화가들은 이 변화의 순간순간을 마치 스냅사진처럼 생생하게 그림으로 담아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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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점심」, 캔버스에 유채 , 160?201cm , 1873 , 오르세 미술관, 파리 | |
프랑스적인 삶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한 화가를 들라면 모네와 마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프랑스적’이라는 것은 19세기 프랑스 중간계급의 이상향이기도 하다. 귀족과 부르주아에 억눌려 있던 문화적 향수에 대한 열정이 봄날 들판의 꽃무더기처럼 피어났던 것이 인상파의 시대였다. 이른바 ‘근대의 삶’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파리의 거리였고, 파리지앵의 감수성이었다. 인상파의 역할은 화가의 스튜디오를 거리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을 단순하게 해석해서 인상파가 거리 풍경만을 그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반만 맞는 얘기이다. 도시의 거리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집이다. 모리조의 그림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런 집의 실내였다면 모네는‘정원 있는 집’이라는 전형적인 중간계급의 이상향을 즐겨 그렸다.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집이 모네의 그림「점심」속에 있다. 화사한 햇살과 향기로운 꽃들로 가득한 정원에서 한가하게 점심을 즐길 수 있는 ‘여가’야말로 근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모네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런 사치였다고 할 수 있다. 일정한 수입이 없던 모네였지만, 이 그림에 그려진 것 같은 쾌락을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젊은 모네는 언제나 댄디처럼 살고자 했다. 댄디는 어떤 존재인가? 외모를 중시하고, 교양 있는 말투를 구사하는 신사이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자기만족이고 자존심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자면, ‘초식남’에 해당하는 남자가 댄디이다.
여전히 그림이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모네는 인상파 전시회에 참가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네의 선택이 옳았다는 판단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카유보트와 피사로는 독립적인 전시회를 계속 진행하는 것이 장래를 보장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경제적인 곤경은 인상파를 더 이상 같은 집단으로 활동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메리 커샛이 가담하긴 했지만, 상황은 별로 진전되지 않았다. 이른바 예술운동으로 인상파는 성공했지만, 살림살이는 그렇게 나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댄디 생활을 계속하던 모네는 파산 위기에 몰렸다. 이를 계기로 모네는 인상파에 대해 공공연하게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는 동료들에게 앞으로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장퇴유를 떠나려고 했지만 갈 곳도 마땅하지 않았다. 모네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마네가 1,000프랑을 보내줬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이사 비용을 지불할 수가 없었던 모네에게 카유보트가 160프랑을 보탰지만, 그 역시 부족했다. 모네는 의사인 가셰 박사에게 돈을 꾸어달라고 간청했다. 얼마나 급했던지 아내 카미유를 좀 도와달라고 사정을 했다. 결국 가셰도 50프랑을 송금했다. 그래도 파리에 싸구려 아파트라도 얻으려면 1,000프랑이 더 필요했다. 결국 모자라는 금액은 카유보트, 드 벨리오, 그리고 마네가 추렴했다.
이때 카유보트는 모네의 형편을 고려해서 아르장퇴유의 정원을 그린 「점심」을 구매했다. 덕분에 모네는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꽤 널찍한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다. 일 년에 1,360프랑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모네에게 인상파 전시회보다 더 절실했던 것은 인상파 동료들이었던 셈이다.
1870년 이후 인상파 화가들은 서서히 각자 살 길을 찾아 떠나는 분위기였다. 파리로 모네가 이사한 사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러나 모네의 이사를 둘러싼 에피소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인상파 화가들은 더 이상 하나의 집단으로 묶이지 않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우정까지 모두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모네는 인상파 전시회에 더 이상 참가하지 않기로 했지만, 인상주의라는 이념을 버리지는 않았다. 생계 문제에 쫓겨서 인상파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장에 이어서 아들 미셸이 태어났기에 더욱 모네는 생활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모네와는 달리, 르누아르는 인상주의를 이탈해서 명백하게 살롱풍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샤르팡티에르 부인과 그 아이들을 그린 르누아르의 그림은 그의 방향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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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 「샤르팡티에르 부인과 아이들」, 캔버스에 유채, 153.7?190.2cm, 1878,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 |
사치스러운 가구와 장식으로 넘쳐나는 화실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귀부인과 아이들의 모습은 영락없는‘기념사진’을 연상시킨다. 꽃병과 과일쟁반이 보여주는 것도 살롱적인 주제의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인물의 배치는 살롱에서 요구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벗어나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림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살롱의 관객들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귀부인과 그의 아이들을 그렸다고 무슨 대수인가 싶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그림을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주문’을 받아야 가능한 것이다. 상상해보라. 파리에서 내로라하는 귀부인이 있는데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한다. 한번 그려볼 생각이 있느냐고 누군가 르누아르에 게 의향을 물어본다. 어차피 정치적인 원칙이나 이념에 무관심했던 르누아르는 찾아온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재빨리 요청을 승낙하고 화구를 챙겨서 귀부인을 찾아갔을 것이다. 세잔은 이런 르누아르에 염증을 느꼈다. 모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모습은 세잔 같은 정직한 사람에게위선적으로 비칠 만했다. 세잔에겐 오직 피사로만이 흔들리지 않는 인상파의 이상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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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55?47cm, 1875~77, 현대미술관, 뮌헨 | |
이렇게 굳건한 세잔의 신념은 1878년경에 그린 그의 자화상에서 고집스럽게 드러난다. 상황은 변했고, 인상파들은 흩어지기 시작했지만, 이들이 남긴 유산은 서서히 제몫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모네와 르누아르가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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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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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에 영미문화 전공 교수로 재직 중 경향신문에 ‘이택광의 왜’ 연재 중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미술'에 '인상파 아틀리에' 연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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