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초라한 백범 김구 기념실, 병원 현관으로 쓰여…
경교장
백범 김구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 1996년 10월 23일 오전, 인천의 한 아파트에 ‘정의봉正義棒’이라 쓰여진 몽둥이를 들고 한 남자가 들이닥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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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0월 23일 오전, 인천의 한 아파트에 ‘정의봉正義棒’이라 쓰여진 몽둥이를 들고 한 남자가 들이닥친다. 당시 79세 집주인은 침입자가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운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렇게 처참한 최후를 맞은 이는 안두희. 1949년 김구를 암살하고 47년 뒤의 일이었다.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만일 그랬다면 어떠했을까?’라고 추측해 보는 것은 부질 없는 일이다. 하지만 김구의 죽음이 암살이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이 더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안두희도 결국 이데올로기가 낳은 피해자 중 한 사람. 죽기 전 시원스럽게 배후라도 말했으면 좋았겠지만 추측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으니 그저 씁쓸할 따름이다.
당시 군인 신분으로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는 군감옥에서 호의호식이라는 선처와 함께 2계급 특진이라는 이해가 되지 않는 대우를 받고, 얼마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즉시 사면, 복귀하여 전쟁에 참여하는가 싶더니 전쟁 후에는 군납 사업으로 대성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었다.
역사란 늘 그런 식이다. 진실이 밝혀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새로운 역사가 그 위를 덮는다. 결국에는 힘 있는 자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원한 건 없는 것처럼 영원한 승자도 없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승만은 독재자로 남았고, 김구는 민족의 등불로 기억되는 걸 보면.
백범 김구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경교장을 향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김구는 1945년 광복 이후부터 안두희에게 암살당하던 1949년 6월 26일까지 경교장을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다. 이 이름은 당시 적십자병원 자리에 있던 경기감영(현 경기도청)앞 개울에 놓여진 다리 이름이 경구교(京口橋), 혹은 이를 줄여 경교라고 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지금은 지하철 서대문역과 아스팔트 도로, 그 위에 고가도로까지 있으니 불과 50여 년 전의 개울과 더불어 경기도청까지 있었다는 광경은 쉽게 상상이 가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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