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본격적인 랩 댄스 시대의 개막 - 현진영 <2집> (1992)

1990년대 댄스 리듬의 가공한 확산, 그 시작은 바로 현진영의 이 앨범이었습니다. 그즈음의 학창시절을 거친 지금의 30대 음악 팬들이라면 ‘랩’이라고 부르는 당시 생경했던 장르를 기억하시겠죠.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1990년대 댄스 리듬의 가공한 확산, 그 시작은 바로 현진영의 이 앨범이었습니다. 그즈음의 학창시절을 거친 지금의 30대 음악 팬들이라면 ‘랩’이라고 부르는 당시 생경했던 장르를 기억하시겠죠. 큰 바지와 ‘엉거주춤’의 춤 등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당시의 스타일은 분명 엄청난 센세이션이었습니다. 댄스 문명의 시작, 현진영의 <2집>입니다.

현진영 <2집> (1992)

1990년 「슬픈 마네킹」으로 데뷔해 1992년 「흐린 기억 속의 그대」라는 폭죽을 터뜨린 현진영은 서태지와 아이들에 앞서, 그리고 1989년 홍서범의 「김삿갓」의 바통을 이어받아 영미권의 랩 음악을 일찍 소개한 인물로 손꼽힌다. 시작은 미미했으나 절정은, 절정까지만 창대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이후 몇 달이 지나 현진영이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발표한 그 해, 가요계는 일대 지각변동을 겪게 되었다. 이제 본격적인 랩 댄스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흑인들 사이에서 둥지를 트기 시작해 영미를 강타했던 파워풀한 댄스가 국경을 넘어 바다를 건너 여기에 안전 상륙했다. 본격적인 힙합이라는 이름 이전에 ‘랩’으로 소개되었던 이 참신한 음악은, 숱한 샘플링과 프로그래밍 그리고 키보드로 완성한 리듬과 추임새들을 동반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핵심이 되는 작업은 멜로디에 구애받지 않는 긴 ‘말’을 음악에 담는 것이다.

컴퓨터와 기계에 의존하는 음악은 10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 듣기에 약간은 허술해 보일 수도 있으나, 당시로서는 허점을 음미할 틈 없이 현란하고 빠르게 밀어붙여 정신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 사운드와 함께 모터를 장착한, 기성세대에게 난청을 자극한 자유로운 언어가 출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행이 되었다. 지금 우리가 오차 없이 매끈하게 가공된 댄스 음악을 듣고 지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시행착오의 본보기가 있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세 가지 버전으로 실린, 현진영 2집의 타이틀 곡 「흐린 기억 속의 그대」의 작곡가는 탁이준이의 멤버이자 훗날 현진영과 함께 I.W.B.H.를 결성하게 되는 이탁이다. 현진영과 함께 흑인음악에 대한 남다른 동경을 품고 있었던 이탁은 이 곡에 엄청난 공을 들여 100번 가량 편곡을 뒤엎고 바꾸고를 반복, 결국 지금의 모양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후일담이 있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이 곡은 ‘탑 텐’을 수 주 연속으로 찍어 현진영에게 감격 어린 눈물을 안겨주었다.

당대의 1등 가수 현진영을 발굴한 주인공은 현재까지 국내 음악계의 마이더스의 손이자 파워맨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수만이다. 항상 외국 시장을 통해 롤 모델을 찾아와 음악을 무역 수준으로 이끌어 올린 동물적 감각의 CEO 이수만은 현진영을 통해 본격적인 미국 음악을 이식했다. SM 엔터테인먼트 마크를 달고 있는 앨범은 훗날 프로듀서이자 디렉터 이수만의 권력을 예고하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진영 하면 또 춤이다. ‘엉거주춤’이라고 이름 붙인 당시의 춤은 이름처럼 넘어질 듯 말 듯 보이지만 사실상 강도 높은 스포츠급으로 댄스의 전문화를 말해주는 한 축이기도 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만큼이나 아직도 각종 레크레이션 무대에서 회자되고 있는 이 추억의 안무는 이후 흐름을 이어가는 이른바 ‘댄스 문명’의 발상지였다.

당대의 히트곡 「흐린 기억 속의 그대」, 「너는 왜」(현진영 go 진영 go)로 현진영은 이렇듯 춤과 음악이 함께 하는 역동적인 무대를 연출하여 1990년대의 유행을 창조한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로부터 시간이 흘러 유행가는 노래보다는 춤에 우선하게 되는 기현상을 낳게 되고, 이후 속출했던 ‘반짝 가수’ 혹은 ‘립싱크 가수’는 큰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는 것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한편 현진영이 이끌었던 댄스 팀 와와(Wawa)는 구준엽과 강원?를 비롯하여 익숙한 이름, 훗날 듀스(Deux)로 거듭나는 이현도와 김성재를 배출하기도 했다. 그랬던 이현도는 신예 작곡가로 참여하여 「너에게만」을 선사했다. 당대를 평정한 정상의 인기 가수와 함께 춤과 음악을 연마했던 이현도는 듀스의 마스터플랜을 와와에서 구상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이 앨범을 감상하는 데 있어 리메이크 곡들도 빼놓을 수 없다.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 신중현 작곡의 「미인」과 「봄비」를 랩으로 재구성했다. 원곡이 갖고 있는 후렴구의 주요 멜로디는 살리면서 그 정점에 도달하기까지, 인과관계를 맞춰 일상어로 밀어붙인 기발한 작사가 돋보인다. 현진영 특유의 재치가 살아 있는 대목이다.

맨날 먹고 자고 하다보니 10kg이 쪄버려서 ‘한동안 뜸했다’는 진행이나, 핑크빛 얇은 원피스를 입고있는 목선과 종아리가 예쁜 여자를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다고 말하는 구체적이고도 야릇한 가사들. 「현진영 go 진영 go」의 장난스러움을 이어가는 코믹한 터치가 일품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현진영은 절정의 인기를 맛본 후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한때 정상을 기록한 후 이어지는 심리적 압박으로 현진영은 결국 사회적으로 규정된 한 ‘범죄’에 탐닉해 안식을 찾았다. 하지만 자유로운 표현을 권장하면서도 도덕을 심하게 중시하는 우리의 연예계는 마약 사범에 엄중했다. 이후 앨범을 발표하고 새로운 그룹 I.W.B.H.로 복귀를 알렸지만 주홍글씨와도 같았던 마약의 그늘은 편견을 뛰어 넘지 못했고, 현진영 자신을 극복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나간 아쉬운 순간 앞에서 항상 ‘가정법 과거’를 붙이곤 한다. 현진영이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댄스는 어떤 양상으로 눈앞에 펼쳐져 있을까. 하지만 현진영의 여정이 그러했고, 이후 등장한 수많은 댄스 음악들이 그러하듯 장르의 생명력은 짧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록으로 전향했고, 해체를 선언한 듀스는 이현도의 부지런한 솔로 활동에도 불구하고 전만한 충격을 주지 못한다. 한때를 풍미했던 룰라 역시 종적을 감추었다.

현진영의 2집은 댄스 가수가 맛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댄스라는 장르가 가장 빛나던 순간과, 또 영속할 수 없는 장르적인 한계를.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통해 미국에서 이주해 온 랩과 댄스라는 획기적인 아이템, 그리고 이 유행으로 빚은 정상의 인기와 한없는 추락을 눈앞에 그릴 수 있다. 한편, 댄스 음악의 성장과 파급에 일조했지만 이후 자동판매기처럼 등장한 ‘붕어 현상’의 발원지였음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앨범이다.

글 / 이민희 (shamchi@naver.com)



제공: IZM
(www.izm.co.kr/)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오늘의 책

김기태라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장르

2024년 가장 주목받는 신예 김기태 소설가의 첫 소설집. 젊은작가상, 이상문학상 등 작품성을 입증받은 그가 비관과 희망의 느슨한 사이에서 2020년대 세태의 윤리와 사랑, 개인과 사회를 세심하게 풀어냈다. 오늘날의 한국소설을 말할 때, 항상 거론될 이름과 작품들을 만나보시길.

제 17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제 17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율의 시선』은 주인공 안율의 시선을 따라간다. 인간 관계는 수단이자 전략이라며 늘 땅만 보고 걷던 율이 '진짜 친구'의 눈을 바라보기까지. 율의 성장은 외로웠던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진심으로 안아주는 데서 시작한다.

돈 없는 대한민국의 초상

GDP 10위권, 1인당 GDP는 3만 달러가 넘는 대한민국에 돈이 없다고? 사실이다. 돈이 없어 안정된 주거를 누리지 못하고, 결혼을 포기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 누구 탓일까? 우리가 만들어온 구조다. 수도권 집중, 낮은 노동 생산성, 능력주의를 지금이라도 고쳐야 한다.

잘 되는 장사의 모든 것

선진국에 비해 유독 자영업자의 비율이 높은 우리나라. 왜 대한민국 식당의 절반은 3년 안에 폐업할까? 잘 되는 가게에는 어떤 비결이 있을까? 장사 콘텐츠 조회수 1위 유튜버 장사 권프로가 알려주는 잘 되는 장사의 모든 것. 장사의 기본부터 실천법까지 저자만의 장사 노하우를 만나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