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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시 여행의 로망 고선영 글/김형호 사진 | 시공사 |
이 책은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 시간을 내어 자신을 다독이고 위안하는 여행을 떠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잘 꾸며진 관광지가 아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소박하고 정겨운 우리의 ‘소도시’들이다. 그곳에서 푸근한 동네 사람들의 노변정담에 끼어 보고, 맛나는 지역 음식도 맛보고, 역사를 품고 있는 오래된 건축물도 둘러보면서 여행자는 일상에서부터 가져온 묵직한 스트레스를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놓아 버린다. 녹록지 않은 일상에 갑자기 찾아온 휴식같은 시간. 여행자는 길 위에서 새삼 인생의 ‘소소한 행복’을 깨닫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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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 술통에 빠진 날
이런, 눈을 떴는데 이미 해가 중천이다. 옆 자리를 힐끔 봤는데, 김 선생이 도로롱 코를 골고 있다. 자고 있는 품새가 지난밤 막걸리에 푹 절여진 모습이다. 음, 그래도 다행이군. 민박집으로 잘 돌아왔나 보다. 풀 먹인 냄새가 나는 빳빳한 광목천 이불에 새삼 기분이 좋아져 얼굴을 부비며 생각을 되짚어 가기 시작했다.
어제 여기까지 어떻게 왔더라. 분명 효자동 홍도주막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삼천동까지는 갔더랬다. 두여인으로 갈까, 첫사랑엘 갈까 고민했고, 두여인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막걸리를 두어 사발 들이켰는데…, 들이켰는데…, 에라 모르겠다. 시큼털털한 술 맛이 떠오른다. 홍어 삼합의 알싸한 맛도 다시 떠오른다. 정수리가 조여 온다. 그래도 기분은 괜찮다.
전주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였다. 사실 전주는 여러 번이다. 5년 전쯤에는 전주비빔밥집을 찾아 헤맸고, 그 다음엔 매년 5월 초 쯤 열리는 전주 영화제를 보러 왔고, 그 다음 어느 겨울엔 한옥마을 때문에, 그리고 지난 가을엔 막걸리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 막걸리 맛을 못 잊어, 엄밀히 따지자면 막걸리 한 사발에 줄지어 따라나오는 푸짐한 안주 때문이지만, 올해도 다시 이 도시를 찾은 것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이번에는 꼭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가능한 한 여러 집을 전전해야지, 마음먹은 터였다.
한옥마을 승광재에 방을 하나 얻었다. 전주에 오면 꼭 한옥마을에서 민박을 한다. 오래된 나무 냄새, 아궁이에 군불 지피는 냄새, 반질반질하게 기름 먹인 종이장판 냄새에 기분이 좋아진다. 승광재는 조선 마지막 왕이었던 의친왕의 아들 이석 황손께서 머무는 한옥집이다. 한옥마을에서 유명한 학인당이나 양사재, 동락원만큼 큰 규모는 아니지만 소담한 맛이 있어 좋은 집이다. 딱 두 장의 요를 깔면 꽉 차는 작은 방 하나를 얻었다.
창호지 바른 문을 열고 잠시 오수를 취하려고 누웠다. 나른히 불어 오는 바람에 새소리가 묻어 오고 뎅뎅 풍경소리에 마음이 들떠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이럴 바엔 차라리 골목길 산책이 낫겠다 싶어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한옥마을이야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있겠나 싶었는데, 다시 찾은 마을에 유난히 멋스러운 카페들이 눈에 띈다. 대부분 한옥 속에 들어앉은 것들이다. 아예 새로 지은 한옥 카페도 보이고, 오래된 지붕과 골격만 유지한 채 새롭게 디자인한 카페도 보인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봉안된 경기전 맞은편의 카페 ‘고신’은 전에도 한 번 가 본 적이 있다. 바로 옆 ‘마닐 마닐manil manil’이라는 이름의 카페는 얼마 전 문을 연 신참 카페다. 테이블 네 개쯤 있는 아주 작은 카페인데, 90년 된 한옥집을 개조했단다.
골목을 헤매다 특이한 찻집도 발견했다. 1937년 지어진 한옥집에서 운영하는 찻집 ‘다호茶戶’는 특이하게 하루에 딱 다섯 명만 지압을 해 주는 지압 찻집이다. ‘쌍화탕과 지압이 유명한 곳’이라고 적혀 있는데 아쉽게도 주인장이 여행을 간 바람에 그 유명하다는 지압을 받지는 못했다.
풍수지리에 일가견이 있는 교사 출신의 황인구 씨가 이 자리에 집을 지었고, 6년 전부터는 사위가 전통찻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 하숙했던 사람 중 14명이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니, 터가 좋긴 한가 보다. 대문에는 너덜너덜해진 영어 사전이 놓여 있다. 내가 서울대에 못 간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낮달이 점점 선명해진다. 오후 한나절 동안 한옥마을 골목길을 들쑤시고 다녔더니 목이 칼칼하다.
택시를 타고 효자동이요, 했더니 기사 아저씨가 대뜸 막걸리 마시러 가냐고 묻는다. 배낭을 멘 차림새로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효자동이나 삼천동을 가자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단다. 본래 그 지역 맛집은 택시 운전사가 주룩 꿰고 있는 법. 어디가 제일 맛있냐고 물었더니 날름 답이 돌아온다.
“아따, 효자동 홍도주막이 유명하긴 한디요, 나는 삼천동 두여인 집이 최고로 맛있습디다. 그 옆 사랑채도 많이 가긴 허는디요, 거근 외지인이 더 좋아하데요.”
전주에는 막걸리 골목이 여럿 있다. 가장 유명한 삼천동에는 막걸릿집이 서른 개가 훌쩍 넘는다. 삼천 2동 우체국 골목 양옆으로 늘어선 막걸릿집이 매일 불야성을 이룬다. 삼천동과 이웃한 평화동에는 10여 개의 막걸릿집이 있다. 모악산 아래 있어 산꾼들의 아지트인 이곳은 넉넉한 인심으로 유명하다. 스무 집쯤 모여 있는 서신동 막걸리 골목은 기본 안주로 삼계탕이 나오는 집이 많다. 이곳에는 전주의 젊은 층이 선호하는 집들이 많은데 ‘옛촌’이 유명하다.
한옥마을 인근의 경원동 막걸리 골목은 옛날식 주막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근처의 24시간 운영하는 콩나물국밥집 거리와 연결되어 있어 ‘진짜 주당’들이 많이 찾는다. 효자동은 막걸릿집 수가 많지는 않지만 홍탁으로 유명한 홍도주막이 있어 단골이 많은 동네다. 여기에 신흥 막걸리 타운인 인후동까지 합세해 전주에는 총 200여 곳의 막걸릿집이 성업 중이다.
홍도주막 앞에 섰다. 외관은 여전히 말쑥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달달한 막걸리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이제 저녁 7시가 조금 넘었는데 이미 만석이다. 왁자지껄한 소란 속에 벌써부터 주막 안은 달아오른 취기로 흥건하다. 주방은 훤히 열려 있다. 멍게며 개불, 활어들이 담긴 수족관이 길에 늘어서 있고 한쪽에는 전주 주조 도장이 찍힌 막걸리가 산처럼 쌓여 있다. 이리 저리 부대끼며 찌그러진 양은주전자도 차곡차곡 쌓여 곧 출동할 태세다. 연탄 난로 위에는 모두부가 뜨끈한 물 속에 들어앉았다.
이내 자리에 앉아, 막걸리 한 주전자요, 외쳤다. 주모는 맑은 술인지 탁주인지를 물어 온다. 기본은 맑은 술이 나온다. 전주 술꾼들은 막걸리를 가라앉혀 윗부분의 맑은 술만 마신단다. 배가 부르지 않고 다음날 머리가 아프지 않기 때문이다. 기본 한 주전자에 750ml짜리 막걸리 세 통이 들어간다. 한 주전자에 12,000원이니 술값이 참 착하다. 게다가 안주까지 공짜니 기분이 째진다.
술이 반쯤 찬 주전자가 등장하고 줄줄이 안주가 딸려 나온다. 살 오른 청어 소금구이에 홍어무침, 족발, 닭똥집, 삶은 고둥과 아까 봤던 모두부도 등장한다. 마른 오징어의 눈알만을 모아서도 한 접시를 만들었다. 여기에 두툼한 돼지고기와 묵은 김치를 넣고 보글보글 끓여낸 찌개도 올라온다. 세어 보니 모두 16가지다. 마음이 들뜬다. 얼른 앞사람을 재촉해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킨다.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목젖을 툭 치고 내려가는 맛이 일품이다.
‘꿀꺽, 크으~’
발갛게 무친 홍어를 한 입 물었다. 많이 삭진 않아 쿰쿰한 맛이 덜하지만 단순한 고춧가루 양념과 어우러져 산뜻하다. 묵은지 한 조각을 주욱 찢어 두부에 올려 입 안에 넣는다. 두부는 부드럽고 묵은지는 아삭하다. 혀가 즐거우니 절로 흥이 오른다.
- 본문 中에서